버스가 호남 지역으로 접어들자 도로 양쪽 논밭에는 지난 몇 주간 쏟아 부었다던 폭설의 흔적이 나타난다. 국경의 남쪽은 따뜻하고 포근해야 옳다. 하지만 눈앞에선 삭막하고 황량한 풍경들이 이어진다. 얼어붙은 눈덩어리가 곳곳에 쌓여있다. 차승원 주연의 멜로영화 〈국경의 남쪽〉 촬영현장인 전북 전주를 찾아가는 길이다. 여기 사람들,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차가운 바람이 휙 코끝을 때린다.
다행스럽게도 촬영장인 소리문화의 전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따뜻했다. 무엇보다 시끌벅적하고 요란했다.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만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 '영광스런 조선 로동당 만세' 등의 선정적인 구호들을 적은 플래카드들이 극장 곳곳에 펄럭이고 있고, 알록달록 한복을 차려입은 아주머니들, 짙은 파란색의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 훈장을 주렁주렁 단 군복을 입은 할아버지들이 객석에 앉아 혁명 가극 〈당의 참된 딸〉 공연 관람에 열중하고 있었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의 수는 대략 1,000여 명. 모두 이날의 〈국경의 남쪽〉 촬영에 동원된 엑스트라였다. 북한 오케스트라의 호른 연주자 김선호(차승원)가 탈북 직전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장면을 위해 현지인 전주에서 뽑혀 왔다. 북한 의상을 입고 경직된 자세로 객석에 앉아 있는 이들은 언뜻 보기에도 뉴스에서 접했던 북한 사람들 이미지 그대로였다. 이들뿐이 아니었다. 혁명 가극 〈당의 참된 딸〉 공연을 위해 동원된 뮤지컬 〈명성황후〉 팀 소속 배우 300여 명과 진짜 오케스트라 100여 명 등 이날 동원된 출연진만 1,400여 명에 이른다. 제작비만 무려 5억원이 투입됐다.
〈국경의 남쪽〉은 〈짝〉과 〈장미와 콩나물〉 〈현정아 사랑해〉 〈아줌마〉 등의 드라마를 연출한 안판석 감독의 데뷔작이다. 안판석 감독은 데뷔 감독답지 않은 여유 있는 태도로 1,000명이 넘는 출연자들로부터 집중력과 연기력을 뽑아냈다. 〈국경의 남쪽〉은 북한 만수예술단의 호른 주자였던 김선호가 연인 이연화(조이진)를 남겨두고 탈북해 새로운 연인(심혜진)과 만나 힘겨운 남한 정착 과정에 위안을 얻던 찰나 북에 두고 온 연화가 탈북했다는 소식을 듣고 갈등에 빠지게 되는 내용을 다룬 멜로영화다. 코미디 배우로 이미지가 굳어진 차승원이 연기 생활 10년 만에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다고 해서 촬영 전부터 화제가 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날 촬영 현장에서 차승원은 10년 차 베테랑 배우답게 지루해하는 사진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삼개월 동안 맹연습한 호른 연주 실력을 과감하게 선보이는 등 엔터테이너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순제작비 50억 원이 투입된 〈국경의 남쪽〉은 현재 촬영 막바지 단계. 벚꽃 만개하는 4월이면 차승원의 탈북자 연기와 호른 연주 실력을 감상할 수 있다.
[인터뷰] 제목 : 나도 멜로 연기 할 수 있다 부제 : 〈국경의 남쪽〉의 차승원
〈광복절 특사〉 〈선생 김봉두〉 〈귀신이 산다〉 〈혈의 누〉 〈박수칠 때 떠나라〉 등으로 명실공히 흥행배우로 인정받고 있는 차승원이 이번엔 멜로 연기에 도전한다. 새영화 〈국경의 남쪽〉에서 차승원은 북한에 연인을 두고 온 아픔과 남한에서 만난 새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탈북자 김선호 역을 맡아 오랜만에 감성지수 높은 모습을 선보인다. 〈국경의 남쪽〉 전주 촬영 현장에서 차승원을 만났다.
북한의 연애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본질적으로는 북한과 남한의 연애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북한의 연애가 조금 더 상대방을 배려하고 조심스럽다는 점에서 구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인 탈북자 문제를 건드린다.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 영화는 이념의 상처를 안고 있는 평범한 두 남녀가 사랑하는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정치사회적으로 특별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출연을 결심했다.
코믹 연기를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일 것 같은데? 연기에 임하는 자세는 코미디영화나 멜로영화나 다 같다. 〈박수칠 때 떠나라〉도 엄밀히 말하면 코미디영화는 아니었다. 코미디영화를 찍을 때 더 웃겨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다만 이번 영화에서 맡은 김선호 역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애절한 사랑을 하는 역할이라 만들고 포장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힘 닫는 데까지 열심히 노력하겠다.
호른과 평양 사투리를 짧은 기간에 배우는 게 쉽지 않았겠다. 평양 사투리는 탈북자로부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삼 개월 동안 배웠다. 평양 사투리 특유의 억양은 살리되 내 식으로 고쳐서 연기하고 있어서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다. 반대로 호른은 배우기가 쉽지 않았다. 호른이 금관 악기 중 가장 힘든 악기라고 한다. 어지간해서는 소리 내기도 힘들다. 내가 악보를 못 읽기 때문에 아예 선생님의 손동작과 몸동작을 통째로 암기하는 방법을 썼다. 극중에서 호른 부는 장면은 고작 서너 번 밖에 안 나오지만, 적어도 연주하는 자세와 주법 만이라도 제대로 해보자 싶어서 3-4개월 동안 열심히 배웠다. 이제 소리는 낼 줄 안다. 이번엔 호른 실력까지 칭찬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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