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상품이나 사업 마케팅에 힐링이 붙지 않으면 참신하지 않아 보인다. 거리나 사이버 세상에는 힐링 산업(Healing Industry)이 넘쳐난다.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힐링캠프에는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등장하여 고생담을 털어놓고 있다. 결론은 "이제 힐링되었어"이다.
2000년대 초반 중국에서 황사가 불 무렵 웰빙(wellbeing)이라는 신개념이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황사는 오래전부터 있던 현상이었으나 중국의 산업화와 함께 우리에게 환경오염, 공해라는 환경재앙으로 나타났다. 악재로서의 황사는 결국 산업화, 즉 인간이 만든 재앙이었다. 그전인 1990년대 '위험사회'라는 개념도 우리 사회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산업화는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해 불확실성은 급증했다. 근대건축, 현대토목시설들에서도 대형참사사건이 수시로 발생했다. 식량혁명을 가져오리라 예상했던 GMO식품은 종간의 질서를 허물며 생물계를 교란하는 괴질병을 만연시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환경보호와 웰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웰빙 산업의 등장이었다. 웰빙 산업을 주도하는 것은 대기업이고, 웰빙 상품들은 고가로 팔리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웰빙이 식상해져 갈 무렵 200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힐링(Healing)은 웰빙보다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힐링을 확산시키는 전도사의 역할을 하는 것은 경영 마케팅분야이다. 힐링은 블루오션처럼 힐링이 붙으면 참신한 개념, 상품, 서비스로 변신한다. 물론 고가가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힐링의 추억
그런데 힐링은 엉뚱하게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어릴 때 배가 아플 때면 어머니에게 달려가 배를 내밀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배를 쓸어주며 "내 손은 약손이고 니 배는 똥배다~"를 몇 번인가 반복하면, 마술을 부린 듯 복통은 사라지고 어느 듯 잠에 빠져들곤 했다. 어머니의 그 손은 참 힐링의 손이었다.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치료사들이 있었다. 어머니 아니면 할머니, 또는 가족 중 한 명이 치료사의 역할을 하곤 했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들려주던 자장가는 어떤 힐링뮤직보다도 편안하게 숙면을 들게 하는 주술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학교에서 생긴 불평거리나 친구들간에 생긴 갈등거리를 어머니나 친근한 가족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면 시원하게 해소가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가족은 힐링의 공간이었다.
또한 예전에는 마을마다 치료사들이 있었다. 액땜도 해주고, 병도 고쳐주고, 억울한 사람을 대신하여 분노와 원한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며 치유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무당들이었다. 물론 사기치는 무당도 적지 않았으리라. 물론 그런 시대를 낭만화해서는 안된다. 그런 대가족 시절이나 혈연, 지연으로 점철된 공동체 공간에서도 수많은 불화나 갈등, 차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국민의 대다수는 일자리를 찾아서 농촌과 가족을 떠나 대도시로 이주를 했다. 그런 사이에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핵가족이 급증하면서 힐링 가족 공동체, 마을 공동체도 사라졌다. 일상생활의 모든 것은 상품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밥은 식당, 노래는 노래방, 술은 술집, 놀이는 놀이방, 병은 병원, 안마는 맛사지방, 상담은 상담소, …. 산업의 분업화는 일상생활도 전문화, 분업화시켜 놓았다. 모두는 돈을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급기야 친구도 돈으로 사는 시대가 되었다. 결혼식 하객조차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과정에서 몸과 마음의 불편이나 고통을 함께 나눌 가족, 이웃도 사라졌다. 4살박이 어린아이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바쁘다. 나의 희노애락을 같이 나눌 사람이 없다. 등 근육이 뭉쳐도 풀어줄 사람이 없다.
힐링 없는 시대 힐링의 길
심지어 계속 문제가 되어온 학교체벌과 반인권적 상황으로 인해 인권이 있는 교육을 위하여 학생인권선언을 하면서 학교체벌을 금지하게 되었다.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학생인권선언의 원 취지는 교사들은 학생에 대해 체벌을 하는 대신 교육적인 감화로서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움을 주라는 것이었다. 교육적인 감화에는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기에는 교사들도 너무 바쁘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과학기술부는 학생들의 폭력을 학생생활부에 기록하도록 하는 형벌보다 더 나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교육 당국은 교사들로 하여금 잘못된 행동이나 폭력을 행한 학생들을 살펴서 바꾸려는 노력하도록 독려하기 보다는 가장 비교육적 방식으로 학생을 내몰도록 하고 있다. 교육당국은 어린 학생들을 진심으로 선도하기 보다는 코너로 내몰고 있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최근의 묻지마 범죄를 하는 사람들, 야동에 중독된 사람들 중 상당 수는 어린 시절부터 야동이나 폭력영상물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과거의 대가족 속에 살 때였다면, 어린아이의 그런 취향이 방치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이 그런 어린이의 괴벽이나 폭력지향성을 진정 치유해 주었다면, 그러한 폭력범으로 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힐링이 없어서 괴물로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방치되어 살아가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사회에 힐링 상품과 서비스가 넘쳐날수록 상처와 고통이 넘쳐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런 고통과 상처가 어디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뿐이랴. 그들의 상처가 그러하다면 신자유주의 산업고용정책에 내몰려 직장 잃고, 목숨 잃고, 가족 잃은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는 어떨까? 죽음으로 내몰려진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의 상태는 이미 자본주의에 의한 사회적 타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2명의 쌍차 노동자들의 죽음은 그들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노동자들마저 트라우마로 몰아 가는 것은 아닌가.
뿐만 아니라 가난에 의해 버려진 아이들, 미혼모라는 오명에 의해 간난아이를 버려야 하는 어머니들, 가부장제의 바위덩어리를 못 이겨내어 가족에서 튕겨져 나간 홈리스 피플 아버지, 코리아드림을 꿈꾸며 빚내어 한국에 왔으나 불법으로 내몰려, 산업재해 당하고도 치료비는커녕 임금,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은 채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국제결혼을 통해 남편의 폭력에 내몰려진 외국인 여성 등 그들이 당하는 고통도 어마어마하다. 고통의 방치는 '사회적 괴물'을 만들기 십상이다.
힐링 상품은 넘쳐나지만, 진정한 치유는 없다. 이런 현실을 자본주의 시장에게 맡겨도 되는가.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국가도, 사회도, 개인들도 지혜와 실천을 모아야 한다.
우선 국가는 범죄자를 양산하는 조치가 아닌, 예방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전자발찌나 화학적 거세 또는 물리적 거세는 또하나의 국가의 폭력이지 예방이 되거나 치유가 될 수 없다. 상습적 성폭력범이라고 하여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결정되지 않았고, 사이코패스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사람을 사회 제도가 괴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또한 억울하지만 억울함을 풀길이 없고 공정하게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범죄자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차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건 초보적인 인권의 기본 사항이다.
또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치유는 바로 사회복지와 상통한다. 어린이, 여성, 노인, 빈민, 사회적 소수자, 외국인 노동자와 그 자녀 등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임에 틀림없다. 이들을 공평하게 살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사회 편의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들이 당하는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멈추기 위해서도 법제도로써 상처와 고통을 주는 관행이나 제도를 중단하여야 치유에 기여할 수 있다.
다음으로 국가적 치유의 노력만이 아니라 사회적 치유 노력이 절실하다. 두 가지 방향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는 시장의 영역에서 필요하다. 자본주의 기업은 기표로서의 '힐링'상품을 유발하는 대신 노동자와 공생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를 고통에 빠뜨리고 종종 죽음으로 내몰면서 힐링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노동자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정당한 일자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이 시장을 발전시킬 수 있고, 노동자도 소비자도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필요하다. 이제 와서 전통적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에서는 하나의 운동으로 '힐링 또는 살림의 운동'을 모색할 수 있다. 아파트 공동체 운동으로부터 도시 공동체 운동, 도시와 농촌 교류운동, 농촌 공동체 살리기 운동 등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공동체 운동이 절박하다. 종교단체들도 신도를 상품으로 여기는 태도를 지양하고 진정한 치유를 위한 노력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들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최근의 나주 성폭력범 사건을 보듯이 부모에 의해 버려진 어린아이가 자라선 폭력적인 어른이 된다. 그 어린아이가 부모와 가족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았더라고 그러한 폭력범이 되었을까? 다시 말해 피해자의 치유 없는 방치는 더 큰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교훈으로 받아야 한다.
힐링이 본질적 치유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힐링의 또 다른 문제이자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힐링을 벗겨내자. 상품은 치유의 힘이 없고 있더라도 부분적일뿐이다. 심지어 현재의 힐링 상품은 소외와 차별로 응축되어 있다. 사람만이 사람을 참 치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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