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정권 내내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6자회담이 획기적으로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던 '2.13 합의'가 성사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2.13 합의 직후 한반도를 넘쳐흘렀던 낙관적 전망은 어느덧 사라지고, 북핵 불능화라는 초기 단계조차 버거워 보이는 것이 현 실정이다.
이제 2.13 합의 1주년을 맞지만 북한이 취해야 할 모든 핵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이 강력히 희망하는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및 적성국 교역금지법 적용 해제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근 평양을 방문했던 성 김 미 국무부 과장이 북한의 핵 프로그램 목록을 제출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이와 반대로 북측은 지난 해 11월에 이미 핵 신고를 완료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2월 말에는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평양에서 공연할 예정이어서 북·미간 '오케스트라 외교'가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되고 있다.
2.13 합의는 북핵문제 해결과정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합의에 의하면 북한 핵시설의 폐쇄·봉인, 감시와 검증, 모든 핵 프로그램의 신고, 관계 정상화, 경제 및 에너지 지원,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체제 등 거의 모든 현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도록 되어 있다. 이상의 합의가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현재 북핵문제는 상당한 진척을 이뤄 반환점을 돌았을 상황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재까지 북핵 불능화는 80% 이상 진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북핵문제 해결과정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은 불능화보다는 핵 프로그램의 정확한 신고 문제이다. 북한은 2007년 말로 예정되었던 신고 시한을 넘겼을 뿐만 아니라 미국측에 이미 신고서를 제출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미국은 그러한 신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객관적 정황상 북한이 정확한 핵 프로그램 신고를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게 현 상황이다.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체로 세 가지이다. 하나는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의 존재 여부로, 북한은 아예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 둘째는 북한과 시리아간 핵협력 연계설이다. 마지막은 이미 추출된 플루토늄 규모와 처리에 관한 것이다. 미국은 애초 50여 kg으로 추정하던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량을 30kg 내외로 추정치를 바꿨다. 고농축우라늄(HEU)라는 표현도 더 이상 쓰지 않고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라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시리아 연계설도 주로 행정부 내 일부 강경파들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2007년 초부터 부시 행정부는 과거에 비해 유연해진 반면, 북한은 마치 부시 행정부를 대신하여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기를 기다리는 듯이 망설이는 형세이다. 실상 현재의 국면은 미국, 한국, 북한 모두 과감한 카드를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은 조만간 북한에 대해 좀 더 엄격한 상호주의를 요구하는 새 정부가 출범할 예정이다. 미국은 곧 대통령 후보 선정을 위한 예비선거가 끝나고 각 당 후보가 정해지면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들어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이 와중에서 먼저 손해 볼 카드를 꺼내들 이유는 없어 보인다. 북한은 한국과 미국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다음 카드를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북한의 전략이 예의 시간 끌기, 살라미 전술, 본질적이 아닌 부차적인 순서의 문제로 몽니부리기 등 예상 가능했던 수순으로 전개되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북한의 연기는 이미 대부분 국제사회의 관객들에게 초연, 재연을 넘어 식상할 정도로 자주 보여줬던 것들이다. 북핵 드라마는 언제나 '데자뷔(Déjà-vu)'일 수밖에 없는가? 이제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쳇바퀴처럼 겉돌던 북핵 해결과정에 획기적인 처방이 필요한 단계에 와 있다. 이명박 정부는 과연 그러한 기발한 발상을 할 수 있을까?
2. 'MB 독트린'은 북핵문제를 풀 수 있을까?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2월 5일 잠정 확정한 국정과제 보고서는 이 당선인이 선거과정에 제시했던 3대 비전, 92개 약속, 508개 세부공약을 인수위의 세밀한 검토과정을 거쳐 5대 국정지표, 21대 전략, 192개 국정과제로 정리했다. 5대 국정지표는 활기찬 시장경제, 인재대국, 글로벌 코리아, 능동적 복지, 섬기는 정부 등 다섯 가지이다.
외교안보 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글로벌 코리아' 과제의 경우 ▲새로운 한반도 평화구조 창출 ▲실용적 통상외교ㆍ능동적 개방 ▲세계로 나가는 선진안보 ▲친환경 경제ㆍ에너지 구조 ▲아름다운 삶과 창의 문화 등 5대 전략을 세우고 그 아래에 47개 과제를 마련했다. 우선 비핵화에 기초한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구조 창출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북한핵문제 해결,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 추진, 한미 전략동맹, 남북 인도적 문제 해결 등의 핵심과제 4개를 선정했다. 또 나들섬 구상 추진과 동북아 신협력체제 구축, 비무장 지대의 평화적 이용 등 중점과제 3개와 동북아 지역 전략적 파트너십 구축, 남북협력 기금의 투명성 강화 등 일반과제 2개를 추진키로 했다. 또한 세계화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창조적 실용외교를 구현하는 전략으로 자원·에너지 외교 강화를 핵심과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새 정부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다변화하고 대외개발원조(ODA)를 확대하며, 국제 평화유지활동을 강화키로 했다. 선진 안보 전략을 위한 핵심과제로는 국방개혁 2020을 보완할 방침이다. 또 중점·일반과제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의 적정성을 평가하고 보완키로 했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는 북핵 폐기를 우선적 외교 현안으로 설정하면서 국익을 외교정책의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 당선인이 후보시절 제시한 'MB독트린'의 핵심은 이른바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으로서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문호를 개방할 경우 한국이 국제사회와 함께 적극적인 대북지원에 나서 1인당 국민소득을 10년 내에 3000 달러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골자이다.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400억 달러 규모의 국제협력기금 조성에 나서기로 한 것은 북한이 핵 폐기의 대가로 받을 수 있는 내용을 보다 구체화했다는 의미가 있고, 이는 과거 1970년대 동구권의 민주화와 인권 등을 경제협력과 연계한 '헬싱키프로세스'를 한반도에 적용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이 구상은 북한이 핵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핵 프로그램 신고를 놓고 치열하게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북핵 문제가 고비를 넘지 못하고 다시 위기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함께 핵 문제로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의 이러한 구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문제 해결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 아직 단언하기는 이르지만 희망을 가질 필요는 있다. 물론 MB 독트린을 자세히 보면 허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도 재원문제는 언급이 없고, 한강 나들섬 구상도 개성공단 경험에 비춰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또한, MB 독트린 최대의 장애는 '비핵'이 안 되면 '개방'이나 '3000'은 시작도 못한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남북관계가 경색되거나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단계적 구상뿐만 아니라 동시 병행적 전략을 구상해 둘 필요가 있다. 아직은 MB독트린의 구상이 현실에 부딪혀 어떤 효력을 발휘할지 알 수 없다. 정책적 좌충우돌도 있을 수 있고,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부가 바뀐 후 당연히 겪는 학습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학습의 시간이 얼마나 길지, 그리고 정책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의 반응 방식이다.
참여정부도 처음에는 의욕적이고 야심차게 출발했다. 그러다가 곧 현실에 부딪혀 경로수정이 불가피한 단계에 봉착했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경로수정을 적시에 제대로 할 융통성이 부족했고 준비도 충분치 않았으며 어디로 방향을 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불필요한 이념적 잣대를 고수하고 명분과 싸우며 시간을 보내다가 막상 이제는 방향전환을 해야겠다고 판단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것이 참여정부의 외교안보에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이명박 정부가 진정 실용을 표방한다면 이러한 우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 이명박 정부가 북핵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북핵문제 해결은 가능하지만 쉽지는 않다는 것이 그간의 교훈이다. 북핵문제 해결에 정답은 없지만 몇 가지 원칙적인 문제부터 풀어나가면 언젠가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이다.
우선 대화의 동력을 잃지 않도록 관련국들을 격려하면서 핵 신고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2.13 합의 이후 1년이 경과하면서 관련국들 모두 회담 피로감에 젖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동력이 많이 상실된 듯한 느낌이다. 지금은 한국, 미국, 북한 모두 과감하게 움직일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 탓도 있지만 피로감의 핵심은 북한이 시간벌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우라늄 프로그램을 신고할지가 상당히 고민스러울 것이다. 불능화는 이미 알려진 핵시설에 대해 합의된 조치를 취해 복구에 1년여가 소요될 수준으로 못쓰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핵 프로그램 신고는 북한이 가진 핵능력의 전모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전략적 결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북한이 신고를 지연시키면 시킬수록 핵을 포기하겠다는 전략적 결단을 아직 내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완전하고 확실한 신고가 없이는 핵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보는 미국의 입장은 확고하다. 따라서 언제 어떤 형태로든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북핵문제 논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현재로는 다른 우회로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막상 이명박 정부가 출범해도 한국이 할 수 있는 바는 많지 않다는 데 새 정부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현재 많은 기대와 함께 우려가 있다. 인수위가 하듯이 북핵 문제도 전봇대 뽑듯이 단기간에 모든 걸 해치우겠다는 과욕으로 접근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북핵문제는 어쩌면 이명박 정부 임기 내에 해결되지 않을 문제일지도 모른다. 너무 조급하게 실적위주로 접근하지 말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이번에야말로 북핵문제를 뿌리까지 뽑는다는 심정으로 접근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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