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의 오늘은 재벌의 헌신과 피와 땀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국민은 기업을 일으켜 재벌로 키워온 사람들에게 진실로 감사의 염을 가져야 한다. 문제는 그런 걸출한 기업인의 후계자를 어떻게 뽑느냐 하는 것이다.
재벌기업, 커져버린 영향력
IMF가 나고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리 30대 재벌 중 거의 반이 도산했다. 이들이 도산하는 바람에 수많은 은행들이 거덜이 났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수십 조 원의 국민 세금이 들어갔다. 수천수만의 하청업체들이 동반 도산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다. 그들을 뒤치다꺼리하느라 또다시 막대한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었다.
이 도산한 재벌 기업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대우의 김우중 회장을 제외 하고는 거의 전부 총수 CEO가 창업자가 아니라 창업자의 2세였다는 것이다. 그 2세 경영자 중 누구도 아버지로부터 경영을 물려받기 전에 독자적으로 사업을 크게 일으켰다거나, 어떤 계열사를 맡아 경영자로서 능력을 입증한 경력이 있었다고 듣지 못했다. 그 대부분이 단지 창업주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경영권을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재벌 기업들의 총수를 그가 회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임하기에는 그 기업들의 중요성과 국민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커져 버렸다. 어지간한 재벌은 그 재벌의 성패에 계열사 직원과 그 가족, 그리고 하청업체 직원의 가족까지 합치면 수십, 수백만의 식구가 목을 매달고 있다.
수십만, 수백만의 삶이 터를 같이 한다는 것은 마치 그들이 하나의 조그만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것을 순전히 혈통을 기준으로 했다. 그래서 왕을 뽑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보니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도대체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되는지 알 수가 없고, 때때로 무능한 사람이 왕이 되어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왕이 되면 아무리 실정을 해도 혁명을 하지 않는 이상 그를 중간에 바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정은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해서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공화제로 그 근본 체제를 바꿨다. 공화정이란 한마디로 혈통으로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선거로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뽑고, 그러나 그 사람이 잘 못 다스리면 그를 바꿀 수 있게 하는 체제이다.
어떤 사람이 구멍가게를 차려서 장사를 한다면 그 가게가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바로 그 가게이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이 죽으면 가게가 그 아들에게 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는 정치 체제로 치면 왕정에 해당된다. 왕이 곧 국가이기 때문에 왕이 죽으면 그 아들이 대를 잇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구멍가게가 점점 더 커져 직원이 수백 명이 되어 회사가 주식회사로 바뀌었다고 하자. 그것은 바로 왕국이 공화국으로 바뀐 것과 같다. 그때부터는 CEO를 국민에 해당하는 주주들이 뽑고 또 여차하면 바꿀 수 있게 된다. 그 뽑고 바꾸는 절차는 민주주의의 원칙, 즉 다수결에 의해 하는 것이다.
능력 있는 총수를 뽑아야
회사가 주식회사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 주인이 계속 그 주식의 과반수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혈통으로 후계자를 뽑던 제비뽑기로 뽑던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고 그것이 그 회사의 운명이다.
그러나 만일 그 주인의 지분이 점차 줄어들어 50%에 미달한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전혀 다른 스토리이다. 이제부터는 창업주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머지 51% 주주가 어떻게 원하는가 하는데 따라 후계자가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재벌 기업들은 모두 주식회사들이다. 그리고 우리 재벌들의 총수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주식의 지분은 대부분 많아 봐야 10% 정도이고 대부분 5%도 채 안 된다 (예를 들어 삼성의 경우 1-2% 대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총수가 아니라 90%에 달하는 주주들이 '어 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에 따라 후계자가 결정되는 것이 옳다. 혈통이 하나의 고려요소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불과 10% 내외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경영주란 그 기업의 주인이라기보다는 다른 90% 주주의 재산을 위탁 받아 경영하는 수탁경영인 쪽에 더 가깝다. 그 수많은 시민의 운명을 책임지는 수탁경영인이 물러났을 때 그 후임을 능력에 관계없이 혈통 하나만을 기준으로 뽑는다는 것은 깊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그것은 마치 북한의 김정일이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창업주의 아들이라고 해서 꼭 최고경영자가 못 되란 법은 없다. 선진국에도 창업주의 아들이 최고경영자가 된 예들이 얼마든지 있다. 능력이 있다고 인정만 되면 아들, 손자 아니라 첩이라도 관계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 사람에게 수십,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릴만한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IGM 세계경영연구원이 행한 설문조사에서 CEO의 70%가 '재벌의 후계자는 경영능력이 입증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답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재벌의 총수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식에게 수십, 수백만 국민의 삶의 터전을 맡기는 것은 국민과 역사 앞에 심하게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짓이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도 참으로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다. IMF 때 망한 10여 개 재벌의 2세들의 삶을 보라. 그들은 가업을 수성하지 못한 데 대한 회한과 자책 속에서 평생을 살고 있다. 호의호식하고 있을지 몰라도 마음은 아마도 참담할 것이다. 그에게 경영권을 맡기지 않고 주식만 상속하고 경영은 유능한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겼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 2세들의 삶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행복한 것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사회 멤버가 되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전문경영인을 감독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 부자들의 예를 보라! 세계의 수많은 부자들이 경영 능력이 입증되지 않은 아들에게는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고 주식만 물려주었다. 대신 그로 하여금 이사회 멤버로서 경영을 감독하고 큰 결정을 내리는 중요한 일만 맡겼다. 회사도 잘 되고 본인도 행복한 삶을 산, 너무나 많은 2세, 3세들이 있다. 포드 자동차의 창업주 헨리 포드의 증손자 윌리엄 클레이 포드 주니어(51세)를 보라. 그는 잠시 회사의 경영을 맡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후 일생의 대부분을 이사회 멤버로서 전문경영인의 경영을 감독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결론은 간단하다. 재벌의 총수는 자식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기 전에 그 자식에게 그만한 자질과 능력이 있음을 나머지 90%의 주주에게 납득을 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90% 이상의 지분을 가진 주주들이 나서야 한다. 그것은 주주들 자신의 경제적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자위권의 행사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수상이 능력도 검증되지 않은 자식에게 수상직을 물려주려고 한다면 국민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반(反)기업 정서'라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왜 우리나라에만 유독 '반 기업 정서'가 강할까? 국민들이 왜 그들에게 떡을 주고 일자리를 주는 기업을 그렇게 미워할까? 그 뿌리에는 바로 그 본질이 '공화국'인 기업이 '왕국'처럼 운영되는 데 대한 반감이 깔려있다. 기업을 '왕국'이 아니라 '공화국'으로 운영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의 출발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경제가 선진화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할 본질적인 이슈이다.
이재용 전무의 처신
이러한 관점에서 현 삼성 사태를 보자. 삼성 사태의 핵심에 놓여 있는 이재용 전무의 요즈음 마음은 참 복잡할 것이다. 본인은 스스로가 구시대의 폐습에 젖은 앞 세대가 저지른 온갖 비정상적 탈법 행위들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전무는 현 삼성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재벌의 비자금 사건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현대자동차 그룹이나 SK그룹사건 같이 일정한 요식 행위를 거치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 갈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현 삼성 사태는 그 보다 훨씬 더 깊은 근원적인 이슈를 내포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 전무가 불과 16억 원의 세금을 내고 거대한 삼성 그룹 전체를 차지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결코 잊지도, 용서하지도 못하고 있다. 평생 피땀 흘려 모은 불과 몇 십억 되는 재산을 상속하려고 해도 무거운 상속세 때문에 고민하고 신음하는 그 수많은 중소 기업인들을 보라. 상속세 때문에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도 물려 줄 수 없어 고민하는 그 수많은 소시민들을 보라.이 상황에서, 이 전무가 세금 16억만 내고 매출이 거의 200조에 육박하는 세계적 거대 기업을 손에 넣으려 한다는 생각을 국민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 전무가 그 동안 삼성의 주식을 확보해 가는 과정이 설혹 100% 합법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결과는 온당한 정신을 가진 국민이라면 용납하기가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법원에서 판결을 내린 것 같이이 전무의 주식 획득 과정은 온갖 불법과 탈법으로 얼룩져 있다. 삼성이 온갖 방법으로 무늬를 입히고 색칠을 했지만 국민은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다. 이 불법과 탈법의 멍에를 뒤집어 쓴 채 경영권을 얻어서 과연 이 전무가 삼성의 경영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큰 화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 이다. 그 때문에 대기업의 CEO는 사실상 공인으로 취급되고 있고 공인과 대등한 윤리의식과 윤리적 행태를 요구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전무가 그 승계과정상 온갖 불법의 멍에를 쓰고서 온전히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설문을 통해 CEO들이 지적한 대로 '거대 기업의 후계자는 경영 능력을 입증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수십, 수백만 국민의 삶을 책임질만한 능력과 자질이 있음을 입증하여야 한다. 이것은 정말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CEO 한 사람이 잘못 들어와 불과 몇 년 만에 거대 기업이 몰락한 경우는 너무나 많이 있다.
이재용 전무는 정말 자신에게 삼성 그룹을 경영할 만한 능력과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IGM 세계경영연구원이 행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경영 분야의 가장 전문가라고 할수 있는 대한민국 CEO들 중 불과 13% 만이 이 전무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32%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전무의 과거 경력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 전무의 경영 능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매우 어렵다. 이 전무가 CEO로서 경영을 한 벤처 기업들 (e-삼성 사건)은 불과 몇 년 만에 300억 원 이상의 막대한 적자를 보고 망해 버렸다.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이 전무가 그 막강한 삼성의 배경을 가지고 사업을 했으면서도 이렇게 참담한 경영 성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이 전무가 삼성의 경영권을 쥐고 나서 이와 비슷한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참으로 머리가 아찔해 질 수 밖에 없다.
이 전무가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자신이 이병철 회장의 손자, 이건희 회장의 아들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삼성의 경영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온당한 사고가 아니다.
삼성을 살려야 한다
우리 온 국민이 동의하는 하나의 명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삼성이라는 기업은 살려야 한다'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드문드문 나타난 삼성 특검의 조사 결과를 얼핏 보아도 수많은 차명계좌와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 미술품 구매를 둘러싼 탈법, 정관계로비 의혹 등 엄청난 비리가 산재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만약 이 모든 의혹들의 상당 부분이 사실로 밝혀지는 경우, 그것은 삼성 그룹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힐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국가 경제에 심대한 악영향을 줄 것이다.
과연 어떻게 '경제를 살린다'는 국가적 지상 과제와 합치되는 방법으로 삼성의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국민의 여러 사람과 대화해 본 바에 의하면 대다수 국민은 삼성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이 모든 분노의 근저에 '경영권 불법 승계'라는 이슈가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을 국민은 '삼성의 원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원죄는 어느 존경받는 대기업 CEO가 필자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된다. '한 마디로 오만한 재벌이 능력도 별로 없는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 온갖 불법과 비리를 저질렀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하여 나라를 통째로 부패시켜왔다' 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의 분노가 앞으로 삼성 문제의 해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참으로 걱정스럽다. 삼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원죄를 해결해야 한다. 다른 모든 문제는 우리나라 재벌들에 있어 왔던 일들이고 그 나름대로 일정한 해결의 선례들이 있다.
참으로 중대한 책임이 이재용 전무의 어깨위에 놓여 있다. 이 전무의 처신 하나에 삼성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이 전무가 정의와 의를 찾아 나가는 우리나라의 용기 있는 젊은이가 되어야 한다. 지금이 이 전무가 국민에게 스스로가 그런 사람임을 알리는 절호의 기회이다. 부모에게 기대어 불로소득으로 거대왕국을 삼키려는 탐욕스러운 젊은이의 이미지를 송두리째 날려버려야 한다. 지금이 우리나라에 정의와 글로벌 스탠다드가 넘치도록 하려는 그 큰 물결을 선도하는 지혜롭고 용감한 젊은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 이 글은 세계경영연구원(IGM)이 발행하는 <글로벌 스탠다드 리뷰> 3월 2일자에 실린 것으로 <글로벌 스탠다드 리뷰> 측의 양해를 얻어 전재한 것임.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