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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가 되고 싶다면 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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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가 되고 싶다면 이들처럼

[프레시앙의 글] '권력의 핵심'들께 길동이를 강추합니다

요즘 세상은 재미가 없다. 정당한 요구를 하던 노동자들은 얻어맞으며 강제해산되고, 국민 간식에서는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이물질이 나오고, 치솟는 물가는 앞으로도 계속 오를 거라고 하고, 한국어 제대로 쓰기도 어려운데 영어에 몰입해야 한다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의 장삼이사들은 사는낙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스를 가득 채우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께서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운하를 파야 하고, 의료보험은 민영화시키고, 경제 성장 공약에 걸맞게 재테크에 능한 내각을 구성하는 등 소시민들의 먹고 살기 위한 걱정과는 영 거리가 먼 딴 나라 얘기만 읊어대신다.

도탄에 빠진, 혹은 도탄에 빠질 우리들을 위해 영웅호걸이라도 짠~하고 나타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지만 그건 꿈같은 얘기일 뿐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TV를 켜고 사극을 본다. 원하는 대로 골라 볼 수 있다는 IPTV 시대에, 무려 백여개의 채널을 공급하는 케이블TV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나마 살 맛 나는 세상을 보여주는 게 '공영' 방송의 '사극'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긴 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하루하루가 무사안일하기를 바라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걱정하고 응원하는 이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인물은 17세기 조선 백성에게나 21세기 대한민국 소시민에게나 공평하게 위로를 안기는 홍길동 되시겠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살라"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아무 것도 안 하며 살다가 왜 살아야 하는지,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서 한 번 죽어 본 길동은 죽다 살아나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는지 무너지기 전에 스스로 지켜야 해"라는 멋진 말을 달고 살면서 자식을 팔아넘길 정도로 곤궁한 백성들의 삶에 오지랖 넓게 참견하기 시작한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 보니 무서운 것도 없는지 천륜조차 끊어버리게 만든 '아버지의 법'에 감히 맞서며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저들에게 물을테니 저들이 어떤 대답을 하는지 지켜보라"며 아버지 홍 판서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더니 기어코 서자 도둑인 주제에 적자 대군 창휘에게 '내가 너를 선택했노라' 반말을 날리며 대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역모에 합류한다.

창휘의 어머니 대신이자 가장 충직한 신하인 용문의 노객주는"지키려는 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자는 두려운 것도 없는 법"이라며 길동을 평가절하하지만, 한낱 도둑에 불과한 홍길동은 진정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두려운 것, 가장 무서운 힘인 여론을 소환해 창휘를 선택하고 창휘의 명분이 적통대군에서 백성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도록 질문을 퍼붓고 몸소 행동으로 믿음을 준다.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제도의 결함과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 했던 원작자 허균의 혁명적인 사상이 한복에 상투머리가 아니라 빈티지 레이어드 스타일에 웨이브 파마를 한 <쾌도 홍길동>을 통해 제대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인물은 길동과는 달리 태생부터 고귀한 적통 대군 충녕이다. 태생은 다르나 장자가 아니기에 왕권에서는 물론 정치에서도 빗겨 서야 목숨 부지가 가능한 왕자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계산이나 어떤 노림수 없이 그저 백성들의 안녕이 치국(治國)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신념과 진심 하나로 이상을 부르짖는 유생과 하급 관원은 물론 전략으로 무장한 노회한 정치꾼마저 포섭해가며 스스로 왕의 재목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그 역시 아래로부터 시작된 힘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충녕이 급기야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왕이 된 순간부터 국본의 지위를 획득하고 권력을 몰아준 왕세자를 제치고 보위에 오른다는 것을,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는 어진 임금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역사책과 위인전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어쨌거나 비단 옷을 입고 모두에게 존대를 받는 왕자이기에 장차 <대왕 세종>이 되실 충녕의 행보가 길동의 팔자걸음만큼 통쾌하지는 않지만 충녕 역시 길동이처럼 세상의 중심에 누가 있어야 하는지, 정치의 참 말뜻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길동과 충녕, 그리고 그들을 둘러 싼 인물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왜 왕이 되어야 하는지, 과연 왕은 누가 만드는 것인지? 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왕을 만드는 거냐고 묻는다. 길동과 대군 창휘의 자문자답, 충녕의 고뇌는 왕을 있게 한 존재가 누구인지에서 출발해 어떤 왕이 되어야 하는지로 향한다.

제발 이 나라의 지도자와 권력의 핵심들께서도 이런 고민을 좀 해주시면 좋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쾌도 홍길동>이나 <대왕 세종>이나 정치색을 물씬 풍기는 정통 사극이 아니라 퓨전 사극을 표방하고 나선 드라마이다. 특히 <쾌도 홍길동>은 초반부터 리얼리티가 휘발된 판타지라는 지적을 많이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들의 속을 후련하게 풀어주는 건 실용을 앞세운 새 정부가 아니라 퓨전 사극 속 판타지이다. 리얼리티 떨어지는 판타지에 몰입하는 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한다면 대꾸할 말은 단 하나 뿐.

"우리들의 판타지와 당신들의 판타지는 영 다른 모양입니다. 판타지가 다른 만큼 우리들의 바람과 당신들의 바람도 그토록 다른가 봅니다."

누군가 현대 사회는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민중이 눈 뜨고 자각하면서 신분상승의 의지를 불태우는 역동적인 대중의 사회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길동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물론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이미 오래 전에 옛말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날 수 없고,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이 점점 멀어지고 있어서 역동적인 대중의 사회는 애저녁에 물 건너 가버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요즘 세상은 재미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수의 민중이 시선을, 입을, 매체를 거머쥔 현대 사회의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

설혹 정권이 공영 매체를 휘어잡는다 해도 우리에겐 낮은 인프라로도 오히려 할 말은 제대로 하는 매체와 판옵티콘 같은 권력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다 캐치할 수 없는 인터넷이라는 무궁한 공론장이 있으니까.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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