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형사사건의 선고공판에선 평소 판결로만 말하던 법관들이 약간의 개인적인 소회와 사설을 늘어놓는 게 일종의 관행이다. 그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말이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심적 부담을 많이 느꼈지만 '오직 법리에 따라서만 판단했노라'는 당연한 얘기가 그것이다. 이상스런 건 이럴 때면 거의 예외 없이 엉뚱한 판결이 튀어나온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법관의 법철학이 빈곤하고 현실인식이 상투적인 탓이 클 것이다. 법으로 밥을 먹고 살지만 법을 판단할 때 어떤 실질과 과정을 중시해야 하는지 제대로 성찰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일 이건희 등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꼭 그랬다. 오직 법리에만 충실하고자 했다는 2심 판결은 한마디로, 내용과 방법이 모두 그릇될 뿐 아니라 논거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내용적으로는 총수일가를 위한 특혜성 저가발행에 완벽한 면죄부를 줌으로써 향후 재벌총수의 경영권 유지강화 및 탈세승계 시도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민주화이후시대 최악의 판결 중 하나다.
방법론적으로는 시대의 요구와 현실의 맥락은 물론 건전한 상식과 원초적 정의감과 담을 쌓고 단순한 개념조작만으로 법적 판단을 추구하는 형식주의적 방법론의 극단적 적용례의 하나다.
이런 이중의 이유로 이번 2심 판결은 앞으로 전국의 로스쿨 강의실에서 두고두고 반면교사로 회자될 게 틀림없다. 나아가서 한국 사법사의 불명예의 전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게 틀림없다.
반면 무죄판정을 받은 이건희 회장은 더없이 좋다. 무엇보다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법적 시비에서 벗어났다. 당장 컴백하거나 당장 승계해도 뭐랄 사람 없다. 그야말로 '행복한 눈물'이 쏟아진다.
'돈황제'덕에 작은 총수들도 저가발행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됐으니 절로 어깨춤이 나온다. 하수인들도 형사처벌 걱정 없이 마름노릇에 몰입할 수 있게 됐으니 한시름 크게 덜었다.
2심 판결의 핵심: 저가발행은 주주손해일 뿐 회사손해가 아니다
2심 판결의 핵심은 간단하다. 저가발행은 발행회사의 손해가 아니라 기존주주의 손해라는 것. 따라서 발행회사에 대해서가 아니라 기존주주에 대해서만 배임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
이 단순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특검이 이건희 회장을 기존주주가 아닌 발행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발행회사에 대해 배임죄를 저지른 혐의로 잘못 기소했기 때문에 무죄라는 것.
나아가서 기존주주가 법인인 경우 배임주체는 고의로 실권한 법인주주의 경영진이지 저가발행을 획책한 발행회사의 경영진이 아니라는 것. 물론 고의실권을 교사한 총수는 교사범으로 유죄.
이런 사이비 법리를 쉽게 풀어보자면, 경영권 편법승계가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수 있지만 법리적으로는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것.
총수일가를 상대로 회사주식을 헐값에 발행해준 발행회사의 경영진은 앞으로 배임죄로 처벌받을 염려를 붙들어 매 놓아도 된다는 것.
특히 친인척, 임직원, 계열사 등 총수의 특수관계자들로 주주가 구성된 비상장계열사의 임원들은 앞으로 총수일가를 상대로 신주발행 등 자본거래 시 아무런 걱정 말고 특혜조건을 붙이라는 것.
이유는 결국 단 하나. 주주는 주주일 뿐,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주주손해는 주주손해일 뿐, 회사손해로 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비난가능성은 크지만 법적 처벌은 못한다는 것. 상투적인 봐주기논리의 법적 버전인 셈이다.
1심 판결보다 한술 더 뜬 2심 판결
비유하자면 2심 판결은 1심이 죽여서 관 속에 넣고 파묻은 총수배임 통제법리를 다시 끄집어내 난도질하고 확인사살을 가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1심 판결은 2심 판결보다는 여러 모로 덜 무모했다. 1심은 적어도 제3자 배정방식의 저가발행에 대해서는 회사손해를 인정하고 배임죄를 물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2심 재판부는 1심의 이런 '양다리 걸치기' 해석을 파기했다. 제3자 대상 신주발행이건 기존주주 대상 신주발행이건, 저가발행으로 배임죄가 안 된다는 법리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항소심은 제3자 배정방식의 SDS사안에서도 '배임죄가 성립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식으로 빠져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저 '회사손해가 없어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하면 됐다.
그뿐 아니다. 이건희 회장에 대해선 1심과 똑같은 형량을 선고했지만 이학수 부회장 등 하수인들에 대해선 1심이 부과한 벌금형을 몽땅 면제해주고 대신 사회봉사명령을 내렸다.
누구 명의의 벌금이든 이건희 회장이 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졸지에 횡재한 건 이건희 회장. 실질적 의미의 벌금액이 무려 1천880억이나 줄었고, 덕분에 비자금도 같은 액수가 덩달아 굳었다.
하나 더 있다. 2심 법원은 에버랜드와 SDS는 자금필요라는 정당한 목적이 아니라 세금을 내지 않고 경영권을 물려주려는 불법적인 목적으로 저가발행을 추진한 사실을 100% 인정했다.
반면 1심은 모든 반대정황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당한 자금수요가 있었다고 강변한 삼성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발행목적부터 부당하다고 인정하면 차마 무죄선고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손해의 개념도 1심 법원은 좀 복잡했다. 회사란 주주들을 실체로 삼는 영리법인이기 때문에 '회사손해로 포섭될 수 있는 주주손해'가 있다는 걸 인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다수설과 대법원도 인정해 온 이런 회사손해 법리도 별 이유 없이 배척한다. 마치 용어가 다른데 무슨 소리냐고 하는 듯하다. 상법 424조의2 해석도 마찬가지로 불분명하다.
상법 424조의2는 발행회사 경영진과 짜고 불공정가액으로 신주를 발행받은 통모인수인에게 발행회사에 대한 차액반환의무를 지운다. 우리법이 저가발행을 회사손해로 본다는 확실한 증거다.
한번 물어보자. 모든 재화에는 제값이란 게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회사경영진이 신주를 발행할 때 가능하면 제값을 받고 팔 의무가 있겠는가, 없겠는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신주를 발행하는데 제값이 얼마인지 알아볼 아무런 합리적인 노력도 하지 않고 아무 값에나, 특히 헐값에 발행해도 무방하다는 얘기는 제 정신 갖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주발행 시 이사들의 임무는 누가 뭐래도 첫째, 신주발행의 목적이 당면한 자금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인지, 둘째, 신주가격은 적정하게 책정돼 있는지, 셋째, 기존주주들이 사정상 100% 인수하지 못할 경우에는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인수시킬 것인지 등을 성실하게 논의하는 데 있음이 분명하다.
누구의 눈에도 명백한 위와 같은 이사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허술한 법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이런 임무를 면제해 주는 윤똑똑이 법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삼성 등 재벌지배구조 현실상 배임처벌은 필수
2심 재판부의 현실인식은 오늘 선고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정말 형편없다.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재벌그룹의 지배구조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 하다.
설마하니 엘리트 판사들이 이런 초보적인 사항조차 모를 리 없을 터. 애써 눈을 감았다고 표현해야 더 정확할 게다. 그렇다면 더 문제다. 눈 감아선 안 될 것을 눈 감아줬기 때문이다.
조세포탈과 지배권이전을 목적으로 하는 헐값발행에 면죄부를 부여하면 남는 법적 제재는 민사소송 밖에 없다. 과연 배임처벌법제가 없는 미국처럼 민사소송으로 해결이 가능한가?
우선 에버랜드나 SDS같은 한국의 비상장 알토란 계열사들의 주주 구성이 그룹총수와 친인척, 계열사와 임직원 등 특수관계자들로 돼 있는 엄연한 사실을 모르는가.
그 결과 총수의 횡포에 대해 민사소송을 제기할 일반주주가 없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것인가.
그나마 법인주주 중에 '상장'계열사가 있는 경우에는 이중(二重) 대표소송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표소송에는 두 가지 고질적인 문제가 따른다. 하나는 대표소송에서 승소해도 제소주주 본인에게는 직접 돌아오는 보상이 전무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개인적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대표소송을 내려 해도 제소요건, 특히 주식보유요건에 가로막혀서 낼 수가 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단 한 주를 보유해도 대표소송을 낼 수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선 상당한 지분을 소유할 때만 가능하도록 법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현재와 같은 소유지배구조 아래서는 재벌총수의 배임적 사익추구를 민사적으로 막을 수 있는 법적 수단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총수의 강탈행위를 눈감아주는 임원의 배임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형사처벌이 필요하다.
다수설과 대법원판례에 도전하는 1,2심 판결, 용기의 원천은?
서기석 항소심 재판부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당시 사장과 전무의 배임죄를 인정한 1, 2심 판결은 물론 맥소프트 사안 등 저가발행 관련 대법원의 기존판례도 뒤집는 가상스런 용기를 보여줬다.
재판부의 말마따나, 아직까지 다수설은 회사손해를 인정하는 입장이고 대법원 판례도 같은 입장이다. 1, 2심 모두 굳이 다수설과 대법원에 도전하면서까지 이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셈이다.
두 재판부는 무엇을 위해 이런 노고와 용기를 아끼지 않았을까? 추상같은 정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이회장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선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실제 상황이 정반대인 경우 어떻게 행동할지를 물어보면 된다.
즉, 기존의 다수설과 대법원판례가 무죄라고 하는 가운데 유죄 주장을 전개하는 소수설이 혜성같이 나타난 정반대의 상황을 가정해 보자.
이런 가상의 상황에서도 과연 민병훈 재판부와 서기석 재판부는 그럴듯한 소수설에 의존하여 대법원판례와 다수설에 도전하면서 이회장에게 유죄선고를 내렸을까?
과연 오직 법과 정의만을 찾기 위해 그런 용기를 냈을까?
만약 재판부 스스로 답변을 머뭇거리거나 혹은 재판부가 그럴 것으로 대다수 국민들이 판단한다면 이미 정의로운 판결은 아니기 쉽다.
오히려 재판대상의 신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지 않도록 두 눈을 질끈 감은 정의의 여신과 달리 1, 2심 법원은 눈을 뜬 채 이회장의 신분을 지나치게 의식한 것 아닌가.
2심 재판부의 양형이유, 공정한가?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회장에 대한 1심의 양형부당 여부를 검토하면서 2심 재판부가 관대한 양형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설명한 게 좋은 예다.
첫째, (병명을 대여섯가지도 넘게 열거하며) 건강상태가 안 좋다.
둘째, 체납세액과 벌금을 이미 납부했고 필요시 증여세 추가납부 의사도 밝혔다.
셋째, 삼성전자를 키운 경영능력으로 국가경제에 기여했다.
넷째, 삼성그룹을 통해 많은 신규고용을 창출한 공로가 있다.
다섯째, IOC위원, 레스링협회회장, 동계올림픽유치위원으로 봉사하며 한국체육 발전에 기여했다.
여섯째, 성품, 가족관계 등을 고려할 때 특별히 문제될 게 없다.
어쩌면 한두 개 더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저런 것도 봐줄 사유가 되는구나 싶을 정도로 빠짐없이 또한 상세하게 거론했다.
특히 주렁주렁 달린 병명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열거할 때는 이회장의 민감한 개인정보를 이렇게 샅샅이 공개해도 될까 싶었다.
이회장의 체육계 감투경력도 지루할 정도로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 내렸다. 너무나도 편파적인 과잉서비스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항소심 재판부의 코미디 같은 '마지막 당부'
서기석 부장판사는 마지막으로 피고인들에게 한 가지 당부가 있노라고 운을 뗐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약간 긴장됐다.
비록 실정법상 처벌대상이 아닌 것으로 결론 냈지만 따끔하게 훈계를 가할 줄 알았다. 이런 기대는 곧 어긋났다.
"실정법상 처벌대상은 아니지만 피고인들의 행위는 사회적 비난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앞으로 국가발전에 헌신해 달라"는 단 한 문장의 싱거운 주문이 '마지막 당부'의 전부였다.
솔직히 실소를 넘어 좀 역겨웠다. 더군다나 앞으로 '국가발전'에 헌신해 달라니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회장 등 피고인들이 경영일선에 컴백하지 않는 이상 국가발전은커녕 기업발전도 시킬 수 없는 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 귀에는, 이제 1, 2심 법원이 경영권 불법승계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으니 거리낄 것 없이 경영일선으로 돌아가라는 덕담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만약 정의로운 법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관대하게 처벌해서는 안 될 여러 이유들도 똑같이 나열한 후 추상같이 꾸짖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여섯 개만 떠올려보자.
첫째, 이건희 회장은 부친으로부터 삼성전자, 삼성생명, 중앙일보 등 계열사 주식들을 차명으로 상속받음으로써 막대한 상속세를 포탈했다.
둘째, 경영권 불법승계를 위한 저가발행은 에버랜드와 SDS 외에도 삼성전자, 제일기획, 서울통신 등 판박이로 진행됐다. 다만 공소시효가 지난 탓에 처벌하지 못할 뿐이다.
셋째, 누가 뭐래도 자식들에게 엄청난 저가로 신주를 발행해 줌으로써 막대한 부당이득을 올린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에버랜드 저가발행은 96년 사면직후, SDS저가발행은 집유기간 중 이뤄졌다.
넷째, 95년 전노비자금 때와 04년 대선자금 수사 당시 최고액 뇌물을 갖다바친 것으로 드러났다.
다섯째, 안기부X파일의 폭로내용과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생생하게 증거하듯이 정기적인 '떡값'살포 등으로 검찰 등 국가사정기관의 영혼을 오염시켜왔다.
여섯째, 04년 대선자금 수사기간 중에도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에게 태연히 떡값이 전달되는 등 반성하고 중단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2심도 행위무죄가 아니라 기소잘못으로 무죄라는 점 인정
설령 2심 재판부의 사이비 법리를 100% 수용하는 경우에도 저가발행이 '발행회사'의 죄가 안 된다는 것이지 누구의 죄도 안 된다는 건 아니다.
1심과 2심 모두 신주인수권을 총수와 비서실의 지시에 따라 포기한 주주법인들의 경영진에 대해서는 자사에 대한 배임죄를 물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경우 이회장 등 피고인들은 당연히 휘하의 전문경영진에게 배임행위를 교사한 특수교사범으로서 실행범인 전문경영진보다 더 무거운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이런 사태가 전개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특검이 이건희 등 피고인을 에버랜드와 SDS 저가발행의 주범으로 기소했기 때문인데 이 부분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건 특검이 이회장 등을 에버랜드와 SDS 저가발행의 주범으로 기소한 건 하등 잘못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특검이 추가적으로 이회장 등을 주주법인들의 배임행위(고의실권)의 주범이나 교사범으로도 기소했더라면 더 좋았다. 최소한 이런 부분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검찰의 과제로 넘겨야 했다.
이 경우 1심과 2심도 법인주주의 고의실권에 대해선 배임죄를 적용하여 중벌에 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물론 법학교수들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고 고발했었다.
1심과 2심 모두, 법인주주 경영진이 고의실권을 통해 자사가 보유한 기존지분의 가치하락을 초래한 행위를 회사에 손해를 끼친 명백한 배임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법리구성 아래서는 고의실권 법인주주의 숫자만큼 많은 배임죄가 이회장 등에게 성립하기 때문에 덩달아 형량도 무거워지게 마련이다.
이쯤 되면 특검이 늦어도 2심부터는 공소장 변경절차를 밟았어야 하는 것 아닌지, 혹은 1심과 2심 재판부가 특검에게 공소장 변경을 요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공소장변경은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만 허락된다. 그런데 사실관계가 100% 동일해도, 이회장이 발행회사의 저가발행의 주범으로 기소된 사안과 주주법인의 고의실권의 주범으로 기소된 사안은 완전히 다른 사안이고 공소장 변경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요컨대, 1심과 2심의 사이비법리에 따르더라도 이회장의 무죄는 발행회사의 저가발행에 국한되지 주주법인의 고의실권에 적용되진 않는다. 당연히 1심과 2심은 모두 이회장을 배임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이유를 특검의 법리오해와 기소잘못 탓으로 돌린다.
진정성 없는 특검 탓 돌리기
나는 1,2심 법원의 '특검 탓' 타령엔 조금도 진정성이 없다고 본다. 특히 2심 법원이 조금이라도 이회장 등이 형사절차에 고유한 엄격한 형식주의 덕분에 법망을 빠져나갔을 뿐 "사회적 비난가능성이 매우 높은 행위"를 저질렀다고 믿었다면 서기석 부장판사의 '마지막 당부'가 그토록 하나마나한 단문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민병훈 재판부와 서기석 재판부 중 단 한 사람만이라도, 에버랜드와 SDS 사안으로 드러난 갖가지 총수배임 관행의 불법성과 반사회성, 그리고 반민주성을 진정으로 개탄했다면, 그 길고 난삽한 판결문의 어느 구석에선가 이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혔을 것이다. 이회장 등에 대해서는 다만 운이 좋아서 법망을 빠져나갈 뿐 큰 죄인으로서 평생 자숙하며 살라고 일갈했을 것이다.
최소한 이래야만, 여론의 부담도 학설의 불명확성도 다 떨쳐내고 오로지 양심과 법리에 입각해서만 어려운 판단을 내렸노라는 서두의 변명이 약간의 진정성이라도 갖지 않겠는가.
눈 먼 법리는 법의 이름을 빌린 불법
마지막으로 한국의 법관들이 사뭇 비장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오직 법리에만 충실하겠다는 약속을 할 때마다 십중팔구 바보천치로 전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봐야겠다.
법리(法理), 즉 법의 이치를 올바른 시대정신과 예리한 현실인식, 건전한 상식과 원초적 정의감과 무관하게 형식논리와 개념조작을 통해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건 유치찬란한 법철학이다.
예컨대, 제3자에 대한 저가발행 때 기존주주들이 겪는 지분가치 하락을 주주손해로만 볼지, 아니면 회사손해로도 볼지는 관련개념의 이해만으로 쉽사리 정해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이와 같은 법리쟁점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배경과 맥락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
이를테면, 특혜성 신주발행이 이사회 결의과정에서 저지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주에 의한 발행저지소송이나 발행무효소송이 제기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서, 그 이유가 당해사안에 특별한 건지, 아니면 일반적인 건지 살펴보고 민사적 통제방법의 실효성을 가늠해야 한다. 배임죄 구성요건을 어느 정도 엄격하게 해석할지는 그 다음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1심과 2심 법원이 배임죄의 구성요건 중 하나인 회사손해의 개념을 넓게 잡을지, 아니면 좁게 잡을지는 단순한 개념정의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총수배임의 생생한 실태와 재생산기제, 정치경제적 폐해, 법적 통제기제의 작동조건과 작동여부, 삼성지배구조의 특징, 삼성3세승계의 전모 등을 밝히지 않고는 전혀 답할 수 없는 문제다.
반면 1심과 2심은 이런 실질적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고민한 흔적이 없다. 아니, 둘 다 이런 문제들과 씨름하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작정했다. 이른바 '법리'에만 충실하겠다는 다짐이 바로 그것이다.
법의 이치는 분별(分別)의 이치다.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분별해서 각자에게 그의 몫을 찾아주는 이치다. 이걸 제대로 하기 위해선 복잡한 현실과 다양한 가치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1심과 2심은 정반대다. 복잡한 것에는 눈을 감고 사전만 들춰보면 해결이 가능한 것처럼 그린다. 나아가서 이런 방식이야말로 오직 법(리)에만 충실한 방식이라고 강변한다. 이건 법리모독이다.
아무튼 법리획득을 위한 고려과정에서 실질적 문제들을 '몽땅 세일'에 부친 1, 2심이 '부심하고 고민'한 건 단 하나의 개념적 쟁점, 즉 주주손해의 개념과 회사손해의 개념이 다른지 여부였다.
1심은 회사=주주이기 때문에 "회사손해로 포섭될 수 있는 주주손해"가 개념상 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았고 2심은 그 무슨 알쏭달쏭한 소리냐며 '강은 강이요 산은 산이라'고 선언한 게 다를 뿐.
나는 이런 판결들에서 어떠한 진지성과 성실성도 찾아내지 못한다. 법과 정의의 분별에 필수적인 도덕적 긴장과 지적 노고를 조금도 감지하지 못한다.
만약 판단이 쉽지 않은 사안에서 적용되어야 할 구체적 법리를 구하는 일이 이렇듯 단순하고 피상적이라면 누군들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왜 법관을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모셔야 하느냐 말이다.
절대 봐서는 안 되는 피고인의 신분은 애써 보고 꼭 봐야 하는 구조와 맥락은 애써 외면하는 그릇된 판단과정을 법리에 대한 충성으로 포장하는 난센스는 하루바삐 극복해야 한다.
김인국 신부는 이번 판결이 전 국민의 영혼을 오염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나쁜 법리는 '호환마마'보다도 더 무섭기 때문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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