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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회창을 찍었던 내가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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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97년 이회창을 찍었던 내가 부끄럽습니다"

[<김대중 자서전>을 읽고서 ②] 차효찬 씨

지난 8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1주기에 맞춰서 출간된 <김대중 자서전>(전2권)을 기념해,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삼인은 독후감 대회를 개최했다. <김대중 자서전>을 읽은 다양한 연령 및 계층의 독자들이 저마다 느끼고 생각한 내용을 풀어내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지난 8월 20일부터 10월 20일까지 2개월에 걸쳐서 진행된 이 독후감 대회에 총 130여 편의 응모작이 모였다. 황현산(문학평론가), 김성재(김대중도서관 관장), 김정환(시인), 고종석(작가), 나희덕(시인) 씨 등의 심사위원은 이 중 총 6편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프레시안>은 이 중 3편(1등 1편, 2등 1편, 3등 1편)을 추려서 게재한다.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시상식은 11월 19일(금) 오후 5시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리며, 이희호 여사가 직접 시상을 할 예정이다.

1등 (1명) 박신호
2등 (1명) 차효찬
3등 (4명) 유병학, 박찬이, 서지민, 이시우

☞관련 기사 :

박신호 : "그의 뜻을 이을 '카이사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고난이 필요한 시대 고난의 과녁"이었다고 표현했다. "일본 수도의 한 호텔에서 토막져 죽어야 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공표한다는 이유로 납치, 살해된다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가 얼마나 야만스런 공포, 폭력으로 점철됐었는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화물 포장용 테이프로 둘둘 감긴 손에 돌인지 쇳덩이를 달고 붕대로 꽁꽁 싸매져 차디찬 바다에 수장해 정적을 제거해야만 만족하는 권력자가 통치하는 나라. 우리의 시절은 그대로 참담이었다.

폭력의 역사를 운 좋게 한 발 비껴서 태어난 나에게 민주주의는 사실 공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애써 얻으려 '투쟁'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흔적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정치 교과서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이 자신의 의사를 언어로 표현한 5000년의 세월 이래 우리가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누린 건 1987년 항쟁 이후이다.

그것도 야권의 분열 덕으로 집권한 군사 정권의 연장과 그 정권에 역사적 명분을 저버린 채 야합한 문민정부를 제외하면 1997년 정권 교체 이후라는 당혹스런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저기 널려있던 우리의 민주주의란 것은 10년이 조금 지난, 일천한 신생아일 뿐이다. 그토록 공기처럼 당연했던 우리의 민주주의가 5000년 역사상 고작 10년이라니!!!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아갈 권리가 태어나기 이전 정해졌던 고대 노예제를 지나 수많은 한문고전으로 치장해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정신의 쇠우리를 쳤던 조선 왕조, 그곳엔 주인 어른의 밭은 헛기침에도 뜰 한 구석에서 몸을 떨어야 했던 종놈의 비참이 있었다. 더구나 낡고 삭은 이념의 감옥 조선이 폭삭 사그라지고 들어선 체제는 민주공화정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였다. 자신의 언어도 버려야 했던 그 자괴감…. 그리고 남북분단과 전쟁. 이후의 기나긴 군사독재의 연속…. '잃어버린 10년'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이제껏 있어보지 못한 민주정권 10년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한 가운데 인간 김대중이 서 있다. <김대중 자서전>은 김대중이라는 '성공한' 정치인의 유년 시절부터 생을 마치기 직전까지의 일종의 정치 일대기이다. 1권은 일제 시대부터 집권 전까지이고(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서술이 많다) 2권은 집권 후의 정치적 의제에 따른 업무 처리 결과나 내막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프레시안(손문상)
그런데 <김대중 자서전>의 저자가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신분이다 보니 자서전의 내용 역시 국민께 드리는 보고 형식에 가깝다. 구체적인 연도와 개월 수를 기록해가며 자신의 일 추진 배경과 결과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대중 자서전>을 읽기 전 우연히 들은 1969년 효창운동장 연설에서의 인간 김대중의 거칠 것 없는 포효와는 또 다른 꼼꼼한 기록이었다.

"미친 황소의 갈 길은 도살장 뿐"이라며 공화당과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영구독재를 경고하던 당시의 예언자적 사자후는 익살과 박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자서전>에서 만날 수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이상을 거침없이 토해내는 투사의 모습이 아니라 이상을 담지한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냉정함이 묻어있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냉철한 현실주의자로서의 모습은 백범 김구 선생을 평가하는 데서 일단을 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한 만의 단독 정부를 막으려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고 이후 일체 단정에 참여하지 않은 백범 선생의 한계를 지적한다. "정치인은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살펴 미래를 향한 진리를 구하는 것이지 진리만 붙들고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정치 신념은 그의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목이다. 김구 선생의 단정 불참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더욱 쉽게 한 것이었다. "현대사의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신탁 통치 또한 이미 남한과 북한에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가 들어와 있는 이상 영구 분단의 긴박하고도 엄중한 역사적 순간이었다면 한시적 신탁 통치로 통일 조국의 독립을 기도해야 했다는 현실적 역사 감각을 보이고 있다. 그럼 김일성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독립투사로 그 공로가 컸고 국민들을 결집시키는데 아주 성공한 사람이지만 정권을 잡는데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고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독재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 목포 형무소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죽임을 간신히 모면하고도 흔히 있을 수 있는 극우반공의 길을 걷지 않고 이승만 정권의 반공독재와 김일성의 공과를 냉정히 가려보는 현실적 합리주의자의 모습인 것이다.

<김대중 자서전> 1권엔 유년시절의 추억과 이승만 정권 이후 민주당 대변인 시절의 일화도 소개돼 있지만 역시 관심이 가는 부분은 유난히도 많았던 김대중 대통령의 죽을 고비였다. 목포 형무소의 학살 모면, 교통사고를 위장해 달려들던 트럭, 그리고 1973년 일본에서의 납치 살해 기도, 그리고 신군부의 사형 선고…. 아마도 이런 일련의 암살 기도에서 기적같이 살아남은 그이기에 사람들은 인동초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혹자는 말한다. 인간 김대중은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이 뜨거운 태양아래 꿈결처럼 살해돼 하나 둘 스러져 갈 때 감옥에서 목숨을 바쳐야 했다고…. 그것이 역사의 격랑에서 피를 먹고 자라는 민주주의의 요구였다고…. 그런데 난 동의할 수 없다. 그건 또 하나의 야만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어떤 개인에게 이념을 명분으로 죽음을 강요할 순 없다.

그가 비록 대의를 위해 큰 뜻을 품은 정치인일지라도 그건 예외 없이 지켜져야 할 인륜이다. 무도자에게 일말의 타협을 하지 않은 채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영원히 사는 것"과 큰 흠 없이 살아남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은 그 누구도 "그래야 했다"라고 당위를 펼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말한다.

"나는 결코 스스로를 순교자로 의식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상주의자를 자처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인간입니다. 순교도 이상도 현실의 전진과 일체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조작에서 미국 망명에 오르는 일련의 과정을 그는 상세히 기록한다. 정부 내 감형을 반대하는 강경 세력들을 설득할 구실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있었고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자필 편지를 돌려달라고 수차례 요구했으나 이는 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죽음이 무서웠다"는 정치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보면 김대중이라는 한 인간의 선택, 즉 그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한 인간의 생명이 구원됐다는 개인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측면에서도 다행스럽고 옳은 결정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1997년 IMF라는 국난을 맞아 집권한 그는 우선 4대 부문 개혁을 단행한다. 공공 부문의 민영화와 부실 은행과 부실 기업을 정리하고 노동도 유연화시킨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외환 보유고가 39억 달러인 상태에서는 선택지가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노동 유연화는 민주노총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합법화라는 열매와 함께 도입된 것이다. 이로써 국난의 원인이라고 본 관치 금융을 청산하고 외환 보유고를 1200억 달러로 늘렸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 국민기초생활보장제(2000년)와 4대 사회보험을 완성한 점도 독자로서 눈이 가는 부분이었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인권"이라는 그의 인식은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라 "수급권자"라는 언어 인식에서 보듯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고 국민은 당당하게 지급받을 권리가 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외에도 의약 분업이나 IT 강국을 위한 전자정부 도입도 눈여겨 볼만 한 대목이다.

정치적 분야에서의 그의 행적은 작은 과오를 돋보기로 들이대기엔 너무도 그 역사적 의미가 두드러진 것이었다. 우선 햇볕 정책을 추진하는 기본 남북 인식인 그의 3단계 통일론은 40여 년 전에 준비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하고 논리적인 것이었다. 각자의 체제를 인정한 위에 교류를 활발히 하는 남북연합과 국방, 외교를 연방정부의 대통령과 연방의회가 갖고 남과 북엔 지역 자치정부를 두자는 남북 연방 단계, 그리고 이후의 완전 통일이라는 의제는 급격한 통일이 불러 올 인재를 예방하는 논리 정연한 통일론이었다.

특히 북한 문제를 해결한 후에도 6자회담을 상설화해서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를 책임지자는 그의 복안은 자연자원이 없고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우리는 외교만이 살 길이라는 그의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하고 제주4·3 사건 및 의문사 진상 규명에 나선 점, 평균 30년 이상 복역한 비전향 장기수 63명의 북송, 1994년 핵 위기 때 카터 방북을 제안한 점도 김대중 대통령의 대한민국에의 기여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성사시킨 남북정상회담….

그 역사적인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 비디오테이프를 쌓아 놓고 하루 종일 녹화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 순간의 내막을 읽을 땐 특히 흥미로웠다. 60년 이상 분단된 채 살고 있을 혈연으로 연결된 북녘 사람들에 대한 원초적 궁금증과 감격이었을 것이다. 북한 지도자에 대한 자세한 묘사에서부터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의 후일담(금수산궁전 참배 문제 등), 또 향후 파장(1억 달러 전달의 애초 의도가 4억 달러 전달로 끝난 현대 대북 송금 특검) 등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물론 <김대중 자서전>에는 그의 성공한 정치 행적만 기록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두 가지 과오가 기록돼 있는데 하나는 1987년 야권 분열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은 분명 잘못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고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는 아픈 여운을 남기고 있다. 누가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에 더 알맞고 절치부심하다 드디어 민주공화정을 쟁취할 적기가 왔다는 감격적 판단을 했을지라도 야권통합을 이루지 못한 것은 당시의 정치인들 모두의 허물임에는 분명하다.

두 번째는 14대 대선 즈음 노태우로부터 받은 20억 원의 격려금이다. 이에 대해 그는 "그 돈은 받아서는 안 될 돈이었다. 국민들에게 고백은 했지만 내 정치 인생에서도 돈과 관련된 추문이었으니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덧붙일 아쉬움이 있다면 바로 그의 "용서의 정치"가 아닐까 싶다. 이는 모두의 느낌이라기보다는 한 독자로서의 개인적 공상에 가깝다.

"내가 박해를 받은 당사자이기에 이를 허용할 수 있는 가장 적임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결정하고 영국의 무혈 정치 전통의 예를 보면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옛 독재자들을 사면했지만 그건 역사의 심판에 맡겨야 하지 않았을까?

비단 내 전 재산이 30만 원이라며 피 묻은 독재자들이 영화를 본다, 스포츠를 관람한다 말하며 태연히 돌아다니는 것에서 우러나는 분노 때문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 하듯 수많은 다수의 피해자들이 고문당하고 살해되고 암매장된 채 말이 없이 누워있는 참혹 속에서 공분의 침묵은 살아남은 자가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반발이 있을지라도 역사의 심판에 맡기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물론 이는 박정희의 지역 차별과 1987년 국민의 위대한 승리 이후 야권 분열에서 심화된 지역 분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김대중 대통령 나름의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난 아쉬웠다. 용서의 정치라는 개인적 신념은 종교적 세계관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어도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들 앞에선 살아남은 자들의 권리는 될 수 없는 것이기에….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 목표로 민주주의 국가 완성과 민족 통일에의 이바지를 꼽았다. 정권 교체와 햇볕 정책, 국난 극복으로 인해 그는 소기의 목표를 성취하고 역사의 부름에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햇볕 정책이라는 민족 공생의 도도한 흐름에 그의 작은 흠결은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북은 핵개발을 했으며 3대째 세습과 왕조의 참담함을 연출하고 있고, 남은 민간인 사찰을 자행하고 발각되자 공문서까지 파괴하는 서슴없는 뻔뻔함으로 민주주이에 먹구름이 낀지 오래다. 그러나 핵개발은 햇볕 정책이 아닌 미국의 강경책 때문이라는 그의 논리는 그대로 사실이다. 그리고 동족상잔을 겪은 우리에게 햇볕 정책은 결국은 가야 할 겨레의 길이다.

1997년 겨울. 태어나서 처음 투표를 했던 나는 김대중 후보에 표를 던지지 않았다. 나는 당시 여당 후보에게 간단히 표를 던지고는 며칠 후 군에 입대했다. 당시 그 역사적 순간에 동참할 수 없었던 것은 열여섯 살 혈혈단신 상경해서 세상없어도 <조선일보>만은 구독해야 하는 줄 아셨던 소시민인 아버지와 그가 일군 가정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의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역사의 격랑에 비껴서 있었던 게, 아니 아무 의식 없이 역류했던 젊은 내 모습이 못내 아쉽고 부끄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두 발로 서려 발걸음을 떼었음에 다행스럽기도 하다. 중국의 문사 루쉰은 자신이 지금은 기고 있지만 계속 배워서 일어서려 한다고 말했다. "생존하고 있는 한 계속 학습할 것"이라는 것이다.

<김대중 자서전> 읽기는 내 두 발로 서서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성숙시키는 데 도움을 준 또 하나의 버팀목이자 시대의 증언이었다. 본문 어딘가에 "사람은 아는 만큼 변한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나는 이 자서전이 수년간의 망명, 6년간의 수감 등 분명 개인의 비참을 딛고 일어난 김대중 대통령이지만, 단지 위대한 한 정치인의 전기로 읽혀지는 데서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문구는 내 느낌을 반영한 명문이기도 하다. 자서전을 통해 개인이 아닌 굴절된 우리시대의 수많은 억울함과 참담함이 읽혀져야만 개인이 아닌 시대를 읽는 부호로서의 김대중은 역사 속에 그 의의를 간직할 수 있겠기에 말이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하다못해 컴퓨터 자판이라도 두드리라고 했던 그의 마지막 외침도 저 멀리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갔다. 엄중한 분단은 그림자가 되어 계속 어른거리고 있고 민주주의는 투쟁적 항쟁에서 일상에의 고착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무엇을 할 것인가….

유사 이래 있어보지 못했던 10년의 민주주의를 공기처럼 마시고 편안히 살았던 나 자신에게 스스로 되물어 본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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