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1주기에 맞춰서 출간된 <김대중 자서전>(전2권)을 기념해,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삼인은 독후감 대회를 개최했다. <김대중 자서전>을 읽은 다양한 연령 및 계층의 독자들이 저마다 느끼고 생각한 내용을 풀어내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지난 8월 20일부터 10월 20일까지 2개월에 걸쳐서 진행된 이 독후감 대회에 총 130여 편의 응모작이 모였다. 황현산(문학평론가), 김성재(김대중도서관 관장), 김정환(시인), 고종석(작가), 나희덕(시인) 씨 등의 심사위원은 이 중 총 6편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프레시안>은 이 중 3편(1등 1편, 2등 1편, 3등 1편)을 추려서 게재한다.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시상식은 11월 19일(금) 오후 5시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리며, 이희호 여사가 직접 시상을 할 예정이다. 1등 (1명) 박신호 2등 (1명) 차효찬 3등 (4명) 유병학, 박찬이, 서지민,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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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8월 18일.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고 여느 때와 같이 나는 피곤에 지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보시던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으로, 그의 죽음을 나에게 전하셨다. 나는 조금 의외라는 놀라움, 그것으로 그 분의 서거 소식을 접했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나의 일상은 평상시처럼 흘러갔다. 정신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스터디 그룹을 하는 대학 동기들을 만나 이 시대를 뜨겁게 살아가는 대학생인척 하기 위해, 그의 죽음과 현실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떠들어댔다. 물론 내 의견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섞여 있지 않았다.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떠들어대던 이야기를 귀동냥하여 마치 내 의견인 것처럼 지껄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저 개인의 앞길에만 급급한 이 시대의 현실을 대표하는 수천만 대학생 중 하나 일 뿐이었다. 내가 그때 관심 있는 것이라곤 내일은 무엇을 입을까, 저 남자가 나에게 관심이 있을까? 이번 달 용돈이 얼마나 남았더라. 앞으로 무엇을 하며 먹고 살까. 하는 것들이었다. 그야말로 근시안. 그 자체였다.
이런 내 모습이 아버지의 눈에는 아마 한심하게 비쳤으리라. 나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한 시대의 청년이었다. 한창 민주화 운동과 독재, 그리고 그밖에 모든 것이 회오리처럼 뒤엉킨 혼란의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우리 또래의 아버지들이 대부분 그러하시듯 매일 신문과 뉴스를 보고 정치 사회면을 미간을 좀 심각하게 찌푸리고는 한참동안 들여다보시곤 하였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뉴스와 신문을 봐야한다고 하며 나의 진한 화장과 짧은 치마를 보시며 혀를 끌끌 차시곤 하였다. 하지만 나의 눈에도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구시대의 고리타분함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아무리 역사 교과서에서 그 격동의 시대를 떠들어 대봤자, 내게는 단지 외워야 할 지겨운 공부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대를 누군가가 살았고 그게 현실이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으며 진지하게 생각해보려는 시도조차하지 않았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가해졌던 무자비한 만행의 결과를 담은 사진조차 현실이라기보다는, SF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밖에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두 내게는 현실 밖의 세상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항상 내 발밑 앞길만 내려다보던 내게 어느 날 아버지께서 넌지시 책 하나를 내미셨다. 바로 故 전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이었다.
| ▲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프레시안(손문상) |
딱딱 끊어지는 짤막한 문장과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모범생이었다는 출세한 인물의 비슷비슷한 전기를 보며 솔직히 또 한국사 교과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뭐, 책을 읽고 달라진 생각이라고는 '평화로운 미소로 사람 좋은 걸음을 걷는 김대중도 젊은 시절엔 의외로 투쟁적이고 모험적인 사람이었구나'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책도 어느 위인의 전기와 한국사 교과서를 반쯤 뒤섞은 것 같은 골치 아픈 두께의 책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책을 완독한 후 아버지와의 시간이 기대와는 달리 묘한 기분을 들게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깊은 대화 전까지 나는 한 번도 우리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나와 비슷하게 철이 없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시대와 나의 시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3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는 단지 시간의 간격만은 아니었다. 내가 어떡하면 용돈을 더 받아낼 수 있을까 궁리하던 나이에 우리 아버지는 언제 끌려가지 않을까, 주변에 도사리는 공포와 암묵적인 양심의 침묵 그리고 알 수 없는 묘한 단절을 겪으며 세상을 훔쳐보려 했었던 것이다.
긴 시간을 거쳐 드디어 책을 완독한 후 아버지께 나는 다 읽었다며 책을 돌려드렸다. 그러자 신문을 보시던 아버지께서는 그대로 신문에 눈이 떼지 않고 나를 앞에 앉게 하시더니 어떠했냐고 물으셨다. 평소와 똑같은 말투셨고 나도 건성건성 판에 박힌 감상을 전했다.
"음, 전에 알던 김대중은 그냥 평화를 사랑하고 좀 느긋하고 편안한 느낌의 대통령이었는데 이 자서전을 읽은 후에 느낀 김대중은 꿈을 져버릴 줄 몰랐고, 민중을 읽는 힘과 용기와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도전정신이나 용기가 부족한데 그 사람은 가족의 희생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꿈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 나갔습니다. 저 같으면 절대 못할 일이지요.
어떻게 보면 솔직히 김대중의 가족이 좀 불쌍하기도 해요. 김대중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연금당하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으니까요. 그래도 용케 그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좀 솔직히 대단한 거 같아요."
내가 감상을 말하자, 아버지는 '더 깊게 생각한 것을 말해 보아라, 너의 쪽지를 살짝 보았다'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힐끗 쳐다보셨다. 원래 책을 읽을 때 순간순간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놓는 습관이 있었던 나는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이시니 감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 당시에 아버지께서도 젊은 시절이었는데 어째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왜 그렇게 잔인하고 또 치졸하게 김대중한테 복수하는 박정희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됐어요." 나의 감상을 가만히 들으시던 아버지는 보시던 신문에서 눈을 떼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셨다.
나는 화를 내실까 조금 걱정했다. 그러나 의외로 아버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찬이야, 네가 느낀 게 정말 그거니?"라고 물으셨다. 내가 대답이 없자, 아버지는 '내가 너를 혼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이시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부끄러운 이야기라며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당신의 젊은 시절을 나에게 전해주셨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에 한창 젊은 20대를 보내셨다. 세상은 혼란과 공포로 가득했고 7남매 중 외동아들인 아버지는 대학을 서울로 오게 되면서 처음 세상에 눈을 떴다고 하셨다. 서울은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와 열정이 가득했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무언가 멋있는 어려운 말을 써가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고, 숨어서 이야기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독립 운동을 하던 독립 투사같이 멋있어 보였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당시의 자신을 '부끄럽지만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호기심에 가득차서 금서를 읽는 풋내기'라고 표현하셨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 '멋있음'뒤에 치러야 하는 '희생'에 대해 알아버렸다고 하셨다. 그 희생을 감수할 만큼 아버지는 그렇게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으며 용기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가난한 노부모의 기대를 받고 상경한 아버지는 고향을 떠올리자 두려움이 점점 커졌고 서울은 상상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단 것을 깨달았단다. 여기저기 금지곡과 금서가 나돌았고 말 한마디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그런 곳에서 시골 뜨내기인 아버지는 모든 것을 경계했고 살아남기 위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정의를 외치고 자유를 찾으며 신념을 가슴에 안을 때 '나 역시 피 끓는 젊은이로써' 세상에 뛰어들고 싶었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는 지고 가야할 짐이 있었고 무엇보다 두려웠다고 하셨다. 몸이 불편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아버지에게 의존하며 가난에 허덕이던 시골 부모와 자신의 공부를 위해 희생한 누님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가족들을 떠올리면 차마 자신만의 양심을 위해 살아갈 수 없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눈과 귀를 닫았다. 그리고 스스로 믿으셨다. 그들이 속이는 대로 그것이 진실일 것이다. 라고 믿으셨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비겁하고 양심이 없는 사람으로 영원히 패배의식에 젖어 살 것 같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직도 인정하는 것이 두렵다고 하셨다.
언젠가 나는 아버지에게 지나가는 소리로 친구 부모님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이야기였는데,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그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계셨던 모양이다. 친구의 부모님은 모두 운동권 출신이신데, 그 집은 친구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너무 날 다그친다며 불만에 했던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그날 그 소리를 듣고 많이 속상했다고 하셨다. 정말 스스로 답답한 사람으로 굳어버린 것일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속 깊고 여리신 분이었다. 내가 읽은 김대중은 '인자한 모습의 대통령'에서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대통령'으로의 변화였지만 아버지가 읽는 김대중은 아마 '자신의 숨겨둔 젊은 시절의 양심을 마주보게 하는 날카로운 모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김대중의 자서전은 단순히 김대중이라는 한 사람의 정치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한 시대의 자화상이었고 살아있는 역사였다. 그의 삶을 통해 내가 봐야할 것은 그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결혼을 했고 어떻게 정치적 성공을 이뤄내었는가가 아니라, 그가 왜 그렇게 싸워야 했으며 왜 눈물을 참아야 했는지를 보아야 했으며, 그의 눈을 빌려 내 아버지, 내 어머니들이 그 시대에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보아야 했다.
그동안 내가 보았던 세상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세상이 아니었다. 나에게 당연히 주어진 세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만든 세상을 우리는, 나는 단지 선물 받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또한 명심해야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역사책 속의 피를 흘리고 총탄 앞에 맞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같이 가슴을 앓아가며 세상으로부터 고개 숙이고 양심의 상처를 가린 채 살아가야했던 '그들'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더 이상 아버지를 운동권을 미워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의 아버지는 시대의 드리운 먹구름과 천둥 속에서 숨죽여 울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일반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비록 아버지는 박정희 아래서 살았지만 나에게는 김대중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신 것 같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양심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 말이다.
아버지는 이 뭉클한 대화의 말미에 만약 또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는 또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하셨다. 만약 당신이 운동권이 되었다면 '아마 찬이, 너를 영원히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잖니?'라고 하시며 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시곤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나는 담배를 피우러 가시는 아버지께 책을 한 번 더 빌려보겠노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어설프게 꿇어 앉아 있는 당혹스러운 표정의 나에게 빙그레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가 읽은 것은 글씨였지 글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세상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알기위해 나는 책을 다시 한 번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위해 아귀다툼을 하며 살아온 나에게 이 짧은 대화는 아주 긴 여운을 남겼다. 나도 나중에 나의 자식들에게 나의 젊은 시절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 때 내가 할 이야기가 고작, 엄마의 쇼핑 목록과 남자친구의 이야기뿐이라면 나는 참 비참해질 것 같다. 그리고 한심한 엄마로 남을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고 세상을 향해 두 눈을 두릅 뜨고 살아가야겠다. 이 시대의 살아있는 청춘이 되기에 아직 나는 늦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나는 다시 한 번 더 그의 책장을 두드린다. 아마 두 번째 읽는 그의 책속에서 나는 아버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바라는 나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를 포함한 이 시대의 한심한 젊은이들이 모두 '김대중'이라는 사람의 삶을 통해서 그의 정치적 행보를 읽기보다는 나의 아버지들, 그리고 나의 어머니들의 젊은 시절을,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앓아야 했던 가슴의 한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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