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누군가의 글에 관해 평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그것은 나의 지적인 박약(薄弱)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김원과 같이 '유령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정치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지니고 있는 '비판 지성'의 저작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유령들의 삶과 자신의 삶', 결국 양자의 관계를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그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각자도생이 지배적인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서평'은 결국 그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사유, 재정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결국 이 책에 대한 서평은 '김원과 유령의 관계'에 대해 평하는 것을 넘어 결국 '나와 유령의 관계', 한 발 더 나아가 그 유령을 매개로 '김원과 나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김원의 저작은 여전히 두껍다. 이전에 내놓은 <여공 1970 : 그녀들의 반역사>(이매진 펴냄)에 비하면 다소 가벼워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묵직하다. 좋은 의미로 평가하면 '역사학과 정치학'의 만남을 추구하기 때문이고 좀 자극적인 말로 하면 '자기 완결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불필요한 것들'을 부가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처럼 '자극적인 평'으로 시작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김원이 드러내고자 한 것이 바로 그 '그 불필요한 것'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구인가. 이른바 유령들, 즉 '서발턴(subaltern)'이다. 이 책 속에 나타나는 이주 여성 노동자, 광부, 도시 빈민, 무등산 타잔, 소년범, 광주 대단지와 부마 항쟁의 이름 없는 '폭도들'이 그들이다.
| ▲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 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김원 지음, 현실문화 펴냄). ⓒ현실문화 |
이런 의미에서 김원의 연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표현을 빌려 나름의 이유를 말하면 '추상 수준이 높고 진부한' 나의 생각을 보다 미시적이고 경험적인 수준에서 풍부하게 해줄 수 있는 '기초 작업'이라 믿기 때문이다. 얼마 전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 펴냄)의 저자 김영미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나는 '대중의 역사화'를 모토로 내건 그 작업이 '지역에서 누가 지배하는가?'라는 낯익은 '지역 엘리트 연구'를 연상시키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미시 권력'이 어떻게 '거시 권력'에 비대칭적으로 포섭되면서 전체 지배 구조를 재생산해 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 연구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이에 비하면 서발턴 그 자체를 다루고 있는 김원의 저작은 '대중의 역사화'라는 것에 더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평가는 자의적인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나에게 "분석 수준을 훨씬 내린 구체적이고 경험적 작업"을 요구하는 김원의 글과 행간 속에서 나는 '내가 바로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는 그의 '어떤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거대 서사'라고 불리는 사건과 운동 속에서 '묻혀버린 서발턴'을 (…) 지나친 폄하와 멸시로부터 구해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발문(跋文)에 그려진 그의 저작에 대한 상찬은 내 생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음을 '인증'해 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저작에 관한 더 이상의 칭찬은 오히려 사족일 듯하다.
그렇기에 이제 시비를 걸 순서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에 실려 있는, 이미 이전에 읽었던 몇 편의 글들과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읽게 된 또 다른 글들을 보면서 그렇게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하나는 소재와 관련된 것으로 내가 태어나서 전전한 곳들이 바로 '서발턴'들이 유령처럼 살다 사라진 그런 곳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김원의 '유령들'이 나와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았던 익숙한 이들이고 사실 지금도 나의 몸에는 그 삶이 다양한 언어로 각인되어 있기에 그렇다.
다른 하나는 김원이 '유령들'을 살리기 위해 여전히 '과잉 비판'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한데, 나는 김원이 유령에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한 기존의 '민중', '계급' 담론들과 그에 근거한 실천들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서, 특히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는 책 모두(冒頭)의 발문을 보면서, 속으로 '저런 비판을 언제까지 하려는 것일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그 어떤 정통을 주장하는 담론들, 김원의 말을 빌리면 '근대적 지식 체계'에 근거하고 있는 민중, 계급을 중심에 놓은 발상들, 실천들은 상이한 의미 부여와 무관하게 이미 주변으로 밀려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록 그런 비판 자체가 의미가 없지 않아 내가 김원의 주장에 공감하는 바 적지 않지만, 그래도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이제는 진부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진부함이 반복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정통의 거처'가 여백으로 남아 여전히 '그 어떤 그림자 효과'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표현하여 그 정통에 의한 '어떤 트라우마'에 김원이 시달리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김원이 '하나의 견고한 바위이고자 했던 정통'에도 애초 미세한 차이와 분열이 있었다는 것과 바로 그것이 그 정통을 무너지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할 때, 그리고 김원 자신이 그 자발성 여부를 떠나 정통의 '외부'에서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때로는 그 정통에 동조하면서도 미세한 차이, 분열의 씨앗으로 존재, 작동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실마리로 하여 자신을 더욱 객관화시킬 때, 그 트라우마로부터, 따라서 '진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떤 단초가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서발턴을 드러내고 하는 김원과 같은 '비판 지성'이 "고립감, 이질감의 차원에서 서발턴과 동질성을 느끼는 김원"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서발턴 드러내기'가 김원 자신의 치유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정통은 예나 지금이나 내가 집착하고 있는 자유주의와 그에 근거한 '정치' 아닌가. 김원의 말처럼 서발턴들의 "구불구불한 저항과 동의" 아래 그들은 여전히 건재하며 그렇기에 한편으로 '박정희 체제'와 동거, 공감하면서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급진적인 실천들을 '진부한 것'으로 내몰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김원이 나의 진부성을 '경험적 분석의 빈곤'에서 온다고 비판한 것은 일면 적절한 지적일 수 있으나, 내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자'로 계속 남아 있는 한 비록 그러한 비판을 온전히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나에게 붙여진 '진부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현실의 비대칭적인 부당한 사회관계들, 그에 내재하여 작동하는 권력 관계들을 해체시키지 않고서는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김원이 우려하는 것과 달리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나아가 그 어떤 발상과 이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김원이 우려하는 것처럼 과거 '정통'이 그랬듯이 계급의 중심성을 강조하면서 여타의 것을 주변화시키거나 그 하위에 종속시키는 데에도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자기 통치성의 발현으로서의 민주주의'의 핵심은 모든 착취와 수탈, 억압과 배제의 사회관계들에 대해 비판하고 투쟁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자본주의를 넘는 것은 단지 노동자 계급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평등의 사회관계'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과제라는 점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나는 '사회주의'가 노동자 계급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김원의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나에게 민주주의는 언제나 급진적인 것이고, "셈 되어 지지 않은 자들의 것으로서의 정치(민주주의)"를 말하는 랑시에르에게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와 '적대를 자유주의적 정치 경쟁의 틀 속에서 관리하고자 시도하는 급진 민주주의' 사이에는 좁지 않은 간격이 존재한다. '적대' 그 자체가 이미 정치인 것이다. 이것이 김원이 질문한 '민주주의의 급진화'에 대한 짧은 답변이다.
내가 김원이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해오고 있는 '서양(남성) 중심적인 근대적 지식 체계' 및 그에 기초한 '정치'에 대한 이론적 비판보다 '서발턴의 정치' 그 자체에 더 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양자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김원에 의하면 서발턴은 '사건'을 통해서만 역사 속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비극적인 존재일지 모른다. 즉, '서발턴의 정치'란 서발턴이 기존에 주어진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사건의 순간'에만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며 구성된다. 그리고 그 서발터니티의 흔적을 찾아가며 "또 다른 서발턴의 서발턴이 사건을 통해 계속 귀환한다." 광주 대단지 폭동, 부마 항쟁, 그리고 이랜드 노조 여성들의 투쟁처럼 말이다.
하지만 '주어진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사건의 순간', 즉 '봉기의 정치'는 빈번하지 않기에 이 지점에서 김원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서발턴의 정치'는 '사건'이 아닌 일상 속에서 작동될 수는 없는 것인가. 이런 질문의 연장 속에서 본다면 문제의 핵심은 그 어떤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기보다 일상 속에서 그러한 정체성들 사이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해 나가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사건 속에서의 탈정체화'라는 것도 결국 일상의 과정을 통해 그 모든 정체성들의 동등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들과 투쟁하며 그 정체성들을 자기화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즉 '다원적인 정체성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 인정을 넘어 그 정체성들 사이의 평등성의 구축과 자기화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그 모든 정체성들이 나이다'라고
그러나 '자기 언어를 가지고 있는 김원'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아니 그 또한 고민 중일 것이다. 그렇기에 서발턴의 고통을 공감함으로써 유령과 같은 그들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업이야말로 근대 역사 서사와 제도화된 정치의 한계를 드러내는 시작일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면서 책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리라.
물론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한 김원의 '서발턴 드러내기'라는 작업 자체가 '일상의 정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시작일 뿐인데, 왜냐하면 그들을 아무리 잘 드러낸다고 해도 서발턴이 그들을 서발턴으로 만드는 기존의 부당한 사회관계들과 권력 관계들을 일상적 수준에서 문제시하고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사건을 통한 짧은 해방'과 '죽지 못해 사는 긴 일상'으로의 복귀를 반복하는 궤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의 언어가 없는 서발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김원과 같은 비판 지성에 의존하여 사건 사후적으로 자신을 재현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기에 오래된 문법으로 다시 묻는다. 진정 '서벌턴의 정치'는 일상에서 불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데, 바로 이를 매개로 김원과 내가 좀 더 대화하고 함께 실천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김원의 건투를 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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