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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공고생, '동해' 아닌 '나이트'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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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공고생, '동해' 아닌 '나이트'로! 왜?

[프레시안 books] 황현진의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한 마디로 말하면, 황현진의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문학동네 펴냄)는 일단 정서적으로 끌리는 소설이다.

오지랖 넓은 미장이 아버지와 철없는 잠꾸러기 엄마, 썰렁한 공고생 아들 '태만생'을 둘러싼 초라하고 궁상맞은 일상의 장면들이 어쩐지 유쾌하면서도 짠하게 다가온다. '용산구 한강로 101-1번지'부터 '101-15번지'까지, 허름한 담장과 대문들 안에 깃들인 소소한 사연들도 저마다 애틋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아무것도 미화하지 않고 조금도 과장하지 않으면서, 장면 하나하나와 공간 구석구석을 아름답고 정감 있게 살려내는 신인 작가 황현진의 솜씨가 무척 인상적이다. 그녀가 그려낸 소설 속 인물과 풍경들은 '가난'이나 '재개발 지역' 같은 추상적인 언어로는 잡히지 않는 생생한 구체성과 삶의 체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 세계가 이미 사라졌거나 곧 스러져갈 공간이라는 점도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을 한다. 만생의 부모는 "달러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행"을 선택하면서 열아홉 살 만생을 학교 앞 옥탑방에 홀로 남겨두고 떠난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강하고 남자다운 척해도 어쩔 수 없이 두렵고 외로운 소년 만생은 기억 속의 가족 앨범을 한 장씩 넘기면서 지나온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이제는 떠나온 동네, 곧 허물어질 옛집을 돌아보는 만생의 시선에도 쓸쓸한 안타까움이 감돌고 있다. 그 시선에는 오래 묵은 시간과 이야기들이 소복소복 쌓여 있는 우리 곁의 '용산들'을 밀어버리고, 길 잃은 고양이나 개들을 거둬 먹이는 열린 대문 집 할머니와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할매, 살아 있는교?"라고 소리치는 이웃 아저씨를 잃어버린 우리 자신의 허전함과 아쉬움이 배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지난 세월을 추억하는 옛날 풍의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는 만생과 그 친구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대 청소년의 좌충우돌 성장기가 전면에 부각돼 있다. 두 명의 소년(만생, 태화)과 두 명의 소녀(오선, 유진)가 겪게 되는 감정의 엇갈림과 예측불허의 성 경험이 엉뚱 발랄하고 진솔하게 펼쳐지는 한편, 만생이 태화를 따라 '가짜 명품 삐끼'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태원이라는 공간 또한 위태롭고도 생기 넘치게 묘사돼 있다.

'이방인들'의 땅이자 "미군의 거대한 PX"인 이태원은 만생의 부모가 전 재산을 여행용 가방 하나에 넣고 떠난 '아메리카'의 축소판 혹은 '짝퉁' 아메리카다. 선량하고 어수룩한 만생의 부모가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를 향해 멀고먼 여행길에 오른 뒤, 어딘지 못미덥고 얼렁뚱땅한 만생은 이태원 거리에서 험난한 세상살이를 배우고 있다.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용산구 한강로'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고 '아메리카'의 허상을 거울처럼 비추면서 소설 전체를 떠받치는 한 축이 된다.

▲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황현진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이 정도만으로도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잘 짜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황현진의 등단작이자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인데, 이 이야기가 어떻게 신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였을지 넉넉히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내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다.

잔잔한 에피소드들이 아기자기하게 얽힌 구성은 이 소설의 커다란 장점인데, 문제는 전체 스토리라인을 밀고 나갈 굵직하고 결정적인 사건들마저 작은 에피소드들 가운데 하나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런 경향은 정말 중요한 문제들을 슬쩍 회피하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는 태도와도 통할 수 있다.

만생이 일하는 '개사장'의 가게가 가짜 명품 단속반에 걸리는 사건만 해도 그렇다. 단속반이 뜨는 일은 이들에게 가장 위급한 비상사태로, 아르바이트 첫날부터 거듭되는 경고와 주의를 통해 어느 정도 미리 예고된 사건이기도 하다. 자신이 "무척 위험한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만생은 태화에게 "만약에 사장처럼 재수 없이 단속반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는다. "사장처럼 호적에 별 그리는 건 아니지?"라는 만생의 물음에 태화는 "그러니까 무조건 조심해. (…) 그래야 네 신상에 별일 안 생긴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실수로 단속반에 걸리는 사건이 벌어지자 만생은 문을 닫아 건 가게 안에서 정신을 잃게 되고, 이와 더불어 단속반이 가게 문을 흔들어대는 급박한 상황은 더 이상 서술되지 않고 중간에 툭 끊긴다. 만생이 병원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정리된 다음일 뿐 아니라, 만생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그런 일을 어떻게 모면하게 됐는지에 대해 한 마디도 더는 언급되지 않는다. 소설의 스토리 전개에서 매우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이 사건은, 이런 식으로 하나의 에피소드나 해프닝처럼 그냥 스쳐지나가게 된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사건은 "강릉 앞바다"에서 "검은 여행용 가방 안"에 담긴 "시체 두 구"가 발견된 사건일 것이다.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만생은 곧바로 충격에 휩싸인다. 시체가 들어 있었다는 검은 여행용 가방은 만생의 부모가 가져간 커다란 가방을 떠올리게 하고, 미국으로 떠난 부모에게서는 일주일째 아무 연락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짐을 챙기기 전 엄마와 아버지가 커다란 가방 속에 함께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장면, 그 장면을 찍은 휴대 전화 사진에 불길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던 모습 등은 모두 이 최악의 사건을 암시하는 장치일 수 있다. "저 큰 가방 안에 내 전부가 들어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눈을 번뜩이"던 택시 기사의 표정에서 "섬뜩한 기분"을 느꼈던 일이나, 만생의 휴대 전화로 강릉 지역번호인 "033으로 시작하는" "정체불명의 전화"가 걸려왔던 일도 예사로이 넘길 수 없다.

그래서 만생은 이 사건이 자신의 부모와 무관한 일임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강릉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고속버스 안에서 그는 슬며시 마음을 돌리고 만다. "아버지와 엄마가 미국행 대신 강릉행을 선택했을 까닭이 없"으며 "그깟 뉴스 한 줄에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건 "자기 폄하, 애정 결핍, 피해 의식, 과대망상 등등"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만생은 바다로 가는 대신 '미미 형님'(이태원에서 만났던 미모의 트랜스젠더 가수)이 출연하는 강릉 '카리스마 나이트클럽'으로 발길을 옮긴다. 다소 허탈하고 당황스럽게도, 여기서 소설은 이대로 끝나버린다.

이태원에서 만생이 '월수입 이백 이상'의 유능한 '가짜 명품 삐끼'로 자리 잡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만생의 부모 또한 "여기보다 살기 좋은 곳" 아메리카에는 영영 도착할 수 없을지 모른다. 만생은 그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생이 '죽을 만큼 아프지 않은' 이유는 다만, 자기가 직면한 문제를 이렇듯 부정하거나 회피하기 때문은 아닐는지? 이런 태도가 인물의 두려운 심리와 심약한 캐릭터를 말해주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인물의 층위에만 머무르지 않고 소설 전체와 작가의 태도로까지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스토리상의 주요 사건들(이태원에서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다 어느 날 갑자기 '판 찡'을 따라 떠난 오선의 경우를 포함하여)이 충분히 전개되고 그 의미를 만들어가기도 전에 서둘러 흐지부지 마무리되는 것은 이 소설의 두드러진 서사적 약점이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자신이 던져놓은 사건들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그것들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작가의 힘과 용기가 부족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태원'과 '아메리카'로 상징된 현실의 문제들을 얼마나 집요하게 파고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의 층위와도 맞물려 있다. '글로벌' 시대의 화려한 외양과 그 냉혹한 실상 사이에 벌어져 있는 수상하고 음험한 간극 앞에서, 작가는 담대하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보다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신인 작가의 첫 장편 소설에다 너무 많은 걸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에는 그런 욕심을 갖게 만드는 여러 요소들이 이미 가능성으로 잠재돼 있다. 다른 한편 나는 "미안해. 널 이렇게 외로운 아이로 만들어서. (…) 좀 더 따뜻한 아이로 만들어줄게"(수상 작가 인터뷰)라고 속삭이는 이 다정한 작가에게, 그 아이를 더 외롭고 더 아프게 만들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래도 그건 너무 냉정하고 잔인한 일이 아닐까? 역시 그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이와 작가 자신, 그리고 독자인 우리가 모두 만생의 외로움과 고통을 더 똑똑히 직시한다면, 그렇게 할수록 이 소설의 따뜻하고 "슬픈 농담"들은 분명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죽을 만큼' 아프다 해도.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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