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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누명 쓴 재벌 딸, 15만 년 냉동에서 깨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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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누명 쓴 재벌 딸, 15만 년 냉동에서 깨보니…

[2011 가을, 정재승의 선택] 배명훈의 <신의 궤도>

'프레시안 books' K 기자로부터 '근래에 읽은 가장 흥미로운 소설'을 추천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었으면 하는 책'을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배명훈의 <신의 궤도>(문학동네 펴냄)가 떠올랐다. 그래서 어젯밤을 꼴딱 새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 지금 이 글을 쓴다. '이 책 같이 읽자!'고 사람들에게 청하려고.

근래에 읽은 가장 감동적인 과학 소설(SF)이라면 단연 존 스칼지의 <유령여단>과 오슨 스콧 카드의 <엔더의 그림자> 그리고 로버트 소여의 <플래쉬 포워드>였다. '재미'적 요소에 무게를 좀 더 둔다면, 츠츠이 야스타카의 <최악의 외계인>이나 마크 해던의 <쾅! 지구에서 7만 광년> 같은 재기발랄한 소설을 권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작가 배명훈의 작품을 권하는 이유는 2009년 그의 연작 소설집 <타워> 때문이다. "한국에도 이런 SF 소설가가 드디어 나왔구나!" 무릎을 치게 만들었던 '독특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던 바로 그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이기 때문이다. (대개 우리나라 소설가들의 작품은 그들의 젊은 시절 경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 우주적 스케일의 상상력'을 가진 그는 더없이 소중하다.) 게다가 문체도 유머러스하고, 흡입력 있게 읽히며, 무엇보다 철학적 사유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문장 속에 잘 스며있다. (후속작 <안녕! 인공 존재>도 마찬가지다.)

SF 단편 소설을 우리말뿐 아니라 영문으로도 번역해 세계인에게 우리 SF 작가를 알리려는 취지에서 기획된 웹진 <크로스로드>(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에서 만든 과학 웹진)의 인기 섹션 'SF'에서도 외국 독자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가 중 하나다. (젊은 SF 지망생에게 제대로 원고료를 챙겨줘 넉넉지 않은 한국 SF 작가들을 지원하려는 의도로 '과학 소설 연재'라는 기획 아이디어를 냈으나, 오히려 <크로스로드>가 배명훈 같은 작가 덕을 보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신의 궤도>(배명훈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그래서 그의 첫 장편 소설 <신의 궤도>를 기쁜 마음으로 추천한다. 인공 위성 사업을 하는 거대 기업주의 서자인 은경은 적자인 언니 경라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비행기 조종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은경에게 삶의 유일한 탈출구는 비행. 러시아에서 궤도 비행을 배운 그는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품으며 힘겹게 살아간다. 은경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코스모마피아 바클라바에게 조금씩 끌리고, 그 또한 은경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존재가 돼 준다.

이를 눈치 챈 언니 경라는 은경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은경은 결국 바클라바를 잃고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는 누명까지 쓴다. 겨우 사형만 면한 채 냉동되어 먼 미래에서 보내어진 은경, 15만 년 후, 아버지가 창조한 휴양 행성 '나니예'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지난 몇 달간 나니예에선 거대한 전쟁이 벌어졌고, 수천 대의 전투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거대한 두 세력의 충돌이 나니예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버지의 행성이자 이 역겨운 낙원 나니예에서 과연 그는 탈출할 수 있을까?

과학 소설을 쓰려면 '우주를 창조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행성과 별을 만들고 그 안에 새로운 세상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그것이 모순이나 빈 구멍 없이 완벽한 자기 완결성을 갖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이 책을 쓰면서 얼마나 흥분과 고심으로 불면의 밤을 보냈을지 짐작해 본다. (과학 소설을 쓰는 동안, 작가는 지구인과 우주인 사이를 오가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지구인의 상상력을 벗어나려는 온갖 노력을 다 하면서도 한쪽 발은 지구의 대지 위에 붙이고 있어야 하기에 쉽지 않다.) 솔직히 상상력이나 이야기 틀 자체는 <타워>만큼 탄탄하지는 못하지만 (너무 방대한 우주 스토리에 다소 짓눌린 느낌도 있지만) 전쟁에 대한 묘사나 비행기와 전투에 대한 설명은 탁월하다.

SF란 다른 시간대의 먼 행성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지구에 대한 통찰을 담은 우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는 지구의 전쟁사가 곳곳에 배어 있고, 지구인의 우주 탐사 역사가 쓸쓸히 스며 있다. 작가의 말에서도 고백했듯, 이 소설의 모티프가 된 우주 탐사선 실패 프로젝트들이나 세계 대전 전쟁사, 전투기들의 공중전 등은 이 책을 읽는 쏠쏠한 재미를 준다.

워낙 거대한 이야기를 끌어안으려 하다 보니 사건의 개연성이 촘촘하지 못하고, 인물 캐릭터도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면도 있지만, 거창한 제목답게 신과 우주의 존재를 설명해보려는 작가의 야심찬 도전은 더없이 매력적이다.

바쁜 일상에서도 시간을 쪼개 우리가 과학 소설을 읽어야 하는 건 일상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다른 어떤 소설도 줄 수 없는) '우주의 경이로움(sense of wonder)'을 만끽하기 위한 '전 우주적 발악'을 멈춰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배명훈의 소설을 읽고 지구의 궤도에서 벗어나 우주에 내 몸을 던지고, 신의 존재와 인간의 운명에 대해 절대고독 속에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처음 SF를 읽는 독자들에겐 연대기 표를 직접 작성하고, 인물 간의 관계도를 만들어보는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줄거리 파악이 쉽지 않은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국 SF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울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으로 창조해낸 세상의 모습을 맛보는 즐거움을 이 책은 독자들에게 온전히 선사한다. 별들이 선명한 가을 밤, 과학 소설로 날마다 우주의 경이로움을 체험하시길 바란다. 육체는 이 땅에서 있어도 당신의 영혼은 신의 궤도에 머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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