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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민주노동당, 희희낙락하는 어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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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민주노동당, 희희낙락하는 어부는?

[프레시안 books] 정영태의 <파벌>

'의리'를 요구하는 책, <파벌>

'민주노동당 정파 갈등의 기원과 종말'이라는 부제를 동원한 정치학자 정영태의 <파벌>(이매진 펴냄)은 나에겐 읽기 힘든 책이었다.

2000년 나는 민주노동당의 등장에, 외곽에서 '드디어 나타난 태권V'보다 더 설레는 마음으로 환호했고, 2004년 원내 진출 후 당내 갈등의 응축점이었던 권영길 의원실 보좌관으로 4년간 생활을 했다. (굳이 책대로 분류하자면 '親전진 평등파'에 속했던 나는 사실 이 책을 읽고서야 그 많던 '파벌'들의 실체를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본문 91쪽 참고.)

2008년 2월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원회 혁신안 부결을 현장에서 바라보고 나서, 2011년 나는 진보신당 임시 당대회에서 통합안 찬반 투표에 대의원으로 참가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읽는 내내 내가 가진 여러 기억의 파편들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합되는, 스스로를 한없이 무기력하도록 만들었다. 깊어가는 이 가을에.

▲ <파벌>(정영태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책 속에 열거된 수많은 파벌과 그들 간 갈등의 시간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은 너무도 초라했다. 파벌 중 하나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지도 않았지만, 그 파벌 중 어떤 것도 내 분파적 대표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정치적 순박함과 무지때문인 듯하다. 더욱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이 책의 내용은 파벌에 익숙지 않은 나의 정치 경험을 한편으로는 비참하게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하게 만든다.

논리와 연대보다는 강한 의리로 뭉친 각 파벌에 끼지 못한 나는 정치에는 능력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늦깎이 의리파가 되어 보려 했는데, 나처럼 걸음이 느리고 귀가 잘 안 들리는 자는 변화무쌍한 '의리파'들의 속도전과 팀워크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정영태의 <파벌>은 구술 조사를 포함한 좋은 사료가 될 것이다. 또 그의 연구는 한국 진보 운동에 관한 하나의 중요한 연구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진보 운동도 희로애락의 감정과 욕망을 자제하기 힘들어 하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의, 여러 인간 군상의 집합 활동임을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팔을 걷어야 주사를 맞듯, 이제 정당이든 시민 단체든 이른바 진보 세력도 스스로를 넓은 세계에 명확히 드러내지 않으면 고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

장님들의 코끼리 : 어느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파벌>을 읽으면서 세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옛날 한 왕이 신하에게 나라의 장님들을 모두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신하는 곧 나라의 모든 눈먼 자들을 불러왔다. 그러자 왕은 신하에게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손으로 더듬도록 하고 그들이 코끼리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말해보게 하라"고 명령했다. 코끼리를 만져본 장님들은 각각 저마다 코끼리에 대해 왕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은 코끼리 머리를 만진 후 코끼리가 항아리와 같다했고, 다른 사람은 귀를 만진 후 부채 같다 말했다. 어떤 장님은 어금니를 만진 후 코끼리를 쟁기처럼 생겼다 했다. 또 코 만진 장님은 뱀과 같다하고, 다리 만진 장님은 절구와 같다고 했다. 편견에 싸인 채 양보 없이 타인들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논쟁만 일삼는 자들에 대한 불가의 가르침으로 익히 알려진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이다.

각각의 장님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머릿속에 연상된 항아리, 부채, 쟁기, 뱀, 절구와 같은 코끼리에 대한 상을 토대로 코끼리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과 태도를 근거로 미처 코끼리를 만져보지 못한 다른 장님들 혹은 아직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자들 중 코끼리를 보지 못한 자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설득할 것이다. 적어도 자기의 주장이 참임을 대중동원력을 통해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놓치기 쉬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코끼리를 만진 장님들의 설명은 틀린 답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각자 경험한 코끼리의 한 부분을 말했다. 단지 일반화의 한계를 드러냈을 뿐, 각각 코끼리 상은 여전히 전체 코끼리 상의 한 부분인 것임은 틀림없다. 따라서 장님들이 각각 자신의 감각 경험과 연상 작용을 통해 그린 코끼리 상을 '코끼리 전체'라고 주장한다면 '일반화'의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코끼리의 한 부분일 뿐임을 인정하면 우화의 교훈은 사뭇 달라진다. 즉 모든 장님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부분들을 조합하여 코끼리 전체 상을 맞추려고 노력한다면.

예를 들어 "당신은 이 동물의 왼쪽 아래를 만지고 절구와 같다하고, 나는 이 동물의 왼쪽 위를 만지고 뱀과 같다했소. 그런데 내가 뱀 같은 것을 만지기 전에 촉촉하고 긴 것을 잠시 더듬었는데 그것이 혀인 듯하오. 그러니 아마도 그 뱀과 같다는 것이 입 위에 있으니 코끼리의 코가 아닐까 싶소. 그렇다면 당신이 만진 부분은 앞다리가 아닐까요?"와 같이.

몇 가지 빠진 조각들로 인해 완전한 코끼리 상을 연상할 수는 없어도 두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하나는 말도 안 되는 주장과 소모적 싸움을 안 해도 되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만진 부분이 코끼리의 어느 쪽인지를 깨달으면서 스스로 서 있는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으로 앞이 안 보이는 장님들이지만 그들은 코끼리를 원하는 방향으로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미끼로 쓰이는 바나나를 코끼리의 엉덩이 쪽에 들이밀지는 않을 것이다.

달리트의 죽음 : 믿음을 넘어서지 못한 연대성

2005년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서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는 그 일대 엄청난 인명과 재산피해를 냈다. 인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피해 지역에서 속출했다. 그러나 인도 정부는 피해 지역 구조 및 구호를 위한 국제 사회의 손짓을 왠지 외면하는 듯 했으며, 그 피해 규모 보고도 현지의 사실과 달랐다.

그러나 인도의 피해 지역에서는 다른 나라와 달리 피해가 점점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됐고 수질오염도 상대적으로 점점 더 심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피해 지역의 사상자 대부분이 지역 어부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시 인도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를 이루는 제4계급에도 끼지 못하는 제5계급인 달리트(Dalit, 건드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불가촉천민')였기 때문이다.

카스트 중 바이샤나 크샤트리아에 속했던 대부분의 인도 구조대원은 쓰나미에 죽은 혹은 죽어가는 달리트에게 손조차 내밀 수 없었다. 썩어가는 시체들은 전염병과 수질오염의 원인이 되었고, 부상자들은 그 속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결국 이웃 나라의 도움으로 사태는 조금씩 해결되었지만, 그들이 정한 이념적 배타성은 결국 자신들에게 스스로의 정치적 대표성을 조건 없이 양도한 수십만의 달리트를 비참히 죽도록 방치했다. 달리트들의 시체가 썩어가는 동안 주변을 서성이던 그들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만 당신들을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믿음을 저버리는 순간 달리트 당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전염병으로 죽는 것이 우리가 믿음을 파해서 당신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보다 덜 비참할 거예요."

연대성은 믿음을 앞서지 못했던 것이다.

어부지리 : 어리석은 힘겨루기의 파국적 그리고 희극적 결말

강변에 나와 입을 벌린 채 햇볕을 쬐던 민물조개를 본 황새가 얼른 그 조갯살을 부리로 물었다. 하지만 깜짝 놀란 민물조개는 급히 입을 다물면서 황새의 부리를 물고 놓지 않았다.

황새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늘 내일 비만 안 오면 이 민물조개는 말라죽어버릴 것이다.' 민물조개도 같은 생각이었다. 조금만 힘내면 황새는 굶어죽을 것이라고. 죽는 방식은 달랐지만 둘의 판단은 적중했다. 지나가던 어부가 서로를 꿈쩍 못하게 하고 버티던 민물조개와 황새를 얼씨구나 자기 망태 속에 넣으면서 그 둘은 죽은 목숨이 되어버렸다.

판단 적중이라도 그 둘은 어리석음의 상징이다. 그 판단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힘에 기댄 어리석음으로 어부만 이득을 취했다.

칼 마르크스가 동양 고전을 접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는 '어부지리'를 정확히 이해한 듯 '보나파르티즘'이라는 정치 개념을 동원해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이후 노동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파국적 교착 국면에서 정치 무대 뒤편에서 단역에 불과했던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삼촌인 나폴레옹 1세의 명성을 등에 업고 혁명 후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 여세로 제2제정의 황제로 등극한 사실을 설명했다. 투표라는 민주주의는 단지 파국적 결말을 위한 롤러코스터의 궤도에 불과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이한 이해로 타자와의 소통을 원시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신념을 인민의 생명을 위한 연대 윤리보다 우선시하고 서로의 파국적 패배를 열망하며 힘겨루기를 했던 장님들의 모습을 <파벌>을 읽으면서 떠올린다면 독자들의 가을날 독서 재미는 한결 더할 것이다.

현재의 '어부'는 누굴까 하는 추리와 함께. 물론 정영태가 토해내는 이야기를 현재 진행형으로 느끼는 '변화무쌍한 의리의 장님들'에게 이 책은 거대한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 나에게도 이 가을은 여느 때보다 무겁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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