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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다시 보니 '인간 탐구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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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다시 보니 '인간 탐구 생활'!

[프레시안 books] 고미숙의 <동의보감>

넘나들기의 외로움

학문이 공장의 분업 체계처럼 분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서로의 영역을 넘나든다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곤혹스러운 일일 수 있다.

넘나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유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넘나듦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넘어오는 것에 대해 일차적으로는 당혹감을 느낄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상대방의 전문성을 불신할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영역,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이권을 빼앗길까 두려울 것이다. 그러한 당혹감과 불신과 두려움은 그러한 넘나듦이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는 항변으로 표현된다. 기존의 분업 체계를 유지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의 반응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넘나듦의 어려움은 이러한 외적인 것보다도 넘나드는 본인의 내적 조건에 있다. 첫 번째로 넘나듦을 가로막는 것은 각 학문 영역의 전문성이다. 언어의 장벽은 물론 난해한 용어와 방대한 지식의 양, 다른 학문과의 방법론과 개념의 차이, 근본적으로는 세계관의 차이가 넘나듦을 힘들게 한다.

두 번째로 넘나듦을 가로막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로 상당 부분을 2차 자료에 의거하게 되고 이러한 한계가 넘나듦의 목적, 곧 새로운 해석을 통한 새로운 질서와 방법의 창조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넘나듦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 분야에서의 실천의 결여다. 예를 들어 의학에서 건축학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건축이라는 실천을 해보지 못하면 건축학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워 이러한 실천의 결여가 넘나듦의 가장 큰 장벽이 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기를 통해 이해한 것을 마치 자신이 개척해 놓은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는 점도 넘나듦을 어렵게 한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을 마치 자기가 차려놓은 것인 양 착각하여 독단적으로 되기 쉽다는 말이다. 이런 저런 학문 분야에서 얻게 되는 재해석된 결론을 서로 연관 짓는 과정에서 자칫 각 학문의 특성(인식론과 방법론)을 무시하고 자신의 관점에 따라 무리하게 재구성하기 쉽다. 이러한 독단은 학문에서의 지남성(指南性, orientation)을 흔든다. 더군다나 그 넘나듦이 스승의 적절한 지도와 스스로의 실천에 바탕을 두지 않은 독학에 의한 것일 때는 이런 문제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학문의 분업 체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넘나듦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선택이다. 넘나듦 자체의 장벽에 좌절하고 넘나듦을 당하는 당사자 혹은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시선에 좌절하고 자기 자신과의 독단과도 싸워야 한다. 그래서 넘나듦은 외로운 작업이다.

그러나 넘나듦의 목적이 예를 들어 의사가 건축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위의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넘나듦은 권장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관점과 방법이 말 그대로 통섭되고 융합되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넘나듦은 권장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건축은 의학의 생명을 얻게 되고 미학의 아름다움을 얻게 되고 역사의 흔적을 얻게 된다.

'다시 쓰기'의 외로움

다시 쓴다는 것(rewriting), 특히 고전을 다시 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지식의 집적이 아니라 당대의 사유와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고전을 다시 쓰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고전은 전문적인 내용도 내용이지만 대부분 오래 전의 것이어서 오늘과는 다른 사유 구조와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오늘의 대중이 이해하기에 어렵다. 그러므로 오늘의 사유 구조와 언어로 고전의 본질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쉽게 풀어내는 것이 다시 쓰기에 주어진 과제다.

둘째는, 고전이 제시한 내용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발전해갔고 그 분야 혹은 다른 분야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셋째는, 고전을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주어야 한다. 기존의 이러저러한 해설서들을 재조합하는 수준에서는 진정한 창조가 나올 수 없다.

쉽게 풀어쓰기도 어렵고 그 의미를 모두 아우르기도 어렵고 새로운 창조는 더욱 어렵다. 자칫 고전을 왜곡하여 섣부른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기 쉽다. 그리고 스스로와의 고독한 싸움이 지나면 대중의 냉정한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다시 쓰기는 외로운 작업이다.

문학과 한의학의 이중주


▲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고미숙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고미숙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그린비 펴냄)는 넘나들기와 다시 쓰기를 한꺼번에 시도하고 있는 책이다.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쉽게 읽힌다. 거기에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 고미숙의 장점이 도처에서 번득인다.

서평자 이전에 독자로서 감탄한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들이었다. 예를 들어 '의학은 리듬을 타고'에 나오는 '상한부'를 노래로 풀이한 것이 그것이다. 고미숙은 의학을 비롯한 고전의 전승에서 운율과 낭송이 차지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72~78쪽). 이러한 이해는 한의학의 담당자인 한의사들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교감단'이라는 처방의 이름에서 "나의 본질을 구현해 주는 것은 나를 제어하는 상극의 힘"(251쪽)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대목에 이르면 넘나들기를 부정하는 사람도 넘나들기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이다.

나는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다른 분야의 전공자들과의 많은 교류와 다른 학문과의 넘나들기를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한의학은 몸과 병만을 고치는 학문이 아니라 몸을 중심으로 자연과 사회를 모두 포괄하는 인식(진단)과 실천(치료)을 제시하는 학문이기 때문이었다. 한의학을 공부하려면 동아시아의 철학, 그 중에서도 도교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며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천문과 역법을 이해해야 하며, 그 시대와 사회를 알기 위해 경제학과 역사학을 이해해야 했다. 다른 지역과 민족의 그것과 대비하기 위해서 의학사는 물론 인류학 또한 필수적으로 알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제 간 교류와, 독학 수준이었지만 다른 학문에 대한 넘나들기는 불가피했다.

그런 넘나들기 중 특히 국문학과의 교류를 갈망했다. 그것은 의학이 몸과 병을 매개로 삶과 자연의 총체를 다루는 학문이라면 그것을 글로 드러내는 문학이야말로 의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대로부터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의속(醫俗)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함께 정리되어야 할 부분이다. 나는 의속에 대한 문학과 한의학의 넘나들기를 통해 의학을, 궁극적으로는 삶을 보다 총체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몇 가지 문제들

이 책은 쉽게 읽힌다. 그러나 몇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다.

먼저 고미숙은 의학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학은 그가 즐겨 인용하는 푸코의 지적처럼 역사적인 시대와 사회를 통해 보편적이지 않았다. 생물학적 총체로서의 몸 자체도 진화해왔고 변화해왔다. 몸과 그 몸이 앓는 병을 보는 눈은 더욱 엄청나게 변화해왔다. 그런 변화를 반영하여 시대와 사회에 따라 의학은 보편적이지 않았다. 오늘날 근대 서양 의학과 한의학의 대립은 그러한 차이를 웅변하고 있다. 의학 역시 정치로부터,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의학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는 고미숙의 관점은 <동의보감>이 삼교회통을 실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게 만든다. <동의보감>이 편찬될 시기의 조선 사회에 삼교회통이라는 흐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사조로 형성되어 시대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삼교가 병존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를테면 16세기까지도 정치, 사회적으로는 유교가 지배했지만 장례는 아직도 완고하게 불교나 도교가 장악하고 있었던 사실은 삼교 병존의 실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동의보감>이 편찬되던 시기는 삼교가 병존하면서도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이, 한편으로는 도교를 배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와 싸우면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정통의 지위를 확립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런 시기에 <동의보감>은 도교를 전면에 내세운 매우 독특한 저작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는 삼교의 대립과 투쟁 속에서, 그리고 전쟁과 기근의 와중에서, 온갖 사화가 본격화되는 이 시기에 왜 <동의보감>이라는 의서가 왕권의 지원 아래 국책 사업으로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하나, 의학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는 고미숙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지만,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병과 약으로 파악하면서 그 병과 약을 구성하는 것은 운기라고 말한다. 나아가 몸도 운기라고 본다. 그는, 세상은 미세입자와 같은 것으로 구성된 것이고 운기는 바로 그러한 미세입자들의 변화무쌍한 운동이라고 말한다(353~354쪽).

이제 운기는 보편적 의학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원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고미숙의 연구 방향은 운기를 밝히는 것, 운기에 대한 '앎의 의지'를 작동시키는 데로 향하게 된다(431쪽). 이는 결국 그로 하여금 도를 닦는 것, '나를 넘어서 천지와 교감하는 절대적 탈영토화의 경지'(44쪽)를 추구하는 길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에피쿠로스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운기는 자연의 질서를 숫자와 도형으로 정식화한 것이다. 자연에 대한 관념적 재해석이다. 운기가 자연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운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운기는 자연에 대한 하나의 해석 체계일 뿐이며 그것도 특정한 관점에서 재해석된 체계일 뿐이다. 운기를 절대화하면 그것은 외인 결정론이 된다. 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이 배제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자신이 하나의 자연이며 자연에 의해 규정되면서도 그 자연에 작용하고 다시 그 작용에 의해 영향을 받는 존재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자신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또한 유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능동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배제하면 그것은 이미 의학, 나아가 인간적 학문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눈부신 문학적 상상력과 통찰로 가득 차 있다. 고미숙과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동의보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한의학을 전공하는 한의사들 중에 이만한 통찰에 도달한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일독을 권한다.

사족. 본문 중에 나오는 자잘한 문제는 덮어두더라도 얼마 전에 문제가 되었던 은형법(다행히도 고미숙은 이를 '투명 인간되는 법'이라고 하지 않고 '몸을 감추는 방법'이라고 했다)과 현귀방(見鬼方, 불행히도 고미숙은 이를 '귀신을 보는 방법'이라고 했다)에 대한 나의 글을 참조했으면 한다. (☞관련 기사 : 은형법에 대하여)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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