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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아, 당신의 자유가 풍전등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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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아, 당신의 자유가 풍전등화다!"

[나도 구속하라!] '희망 버스' 송경동 구속을 규탄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날치기되었습니다. 가관이었습니다. 나는 잠시 끓어오르는 분노와 화를 누르고서, 이 정부에서 일어난 일들을 복기해 봅니다.

촛불 집회, 노무현 김대중 두 대통령의 잇따른 죽음, 종합 편성 채널과 4대강 사업의 강행,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향해 쏟아대던 테이저 건, 한진중공업 사태로 309일 동안 크레인 위에 있어야 했던 김진숙 지도위원 등.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더 울화통이 터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 송경동 시인의 구속. 누구보다 언어의 세공에 공을 들여 단어 하나를 적는 데도 고심하는 시인이라지만, 지금 내게 생각나는 말은 이런 것뿐입니다. "이 염병할 것들!"

젊은 시인 기고 연재를 이야기하며 조금은 어눌한 듯한 목소리로 박진성 시인이 말했습니다. "남의 일이 아니잖아요." 이 말이 왜 그토록 오래 뇌리에 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서 전해지던 슬픔의 기운. 박진성 시인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그 말 속에는 '박진성'이라는 개인이 없었습니다. 송경동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개인이 아니었는데 / 개인이 되고 말았다는 서글픔"(송경동, '가리봉오거리 연가')과 이젠 '개인'을 버려야만 한다는 웅변이 있었습니다.

한 명 한 명의 개인을 '우리'로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송경동 시인은 '가두의 시'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길바닥의 시들이 사랑이다". 자진 출두를 한 송경동 시인에게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 등을 이유로 구속 영장을 발부한 이들은 송경동 시인이 도망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송경동 시인의 사랑이 두려워서 이따위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갖다 붙인 것일 테죠.

아, 물론 그치들에게도 사랑이란 감정이 있을 겁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요. 그치들의 이웃.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뻔히 알 것 같습니다. 그치들은 자기들만의 이웃만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송경동 시인은 그치들과 그 이웃의 정체가 "먹는 만큼도 싸지 못하는 불구의 기계들"(송경동, '똥통 같은 세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크 라캉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소유하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라고. 내가, 그리고 우리가 소유하지 않고 있던 그 어떤 것을 주는 방법. 그것을 고안한 이가 바로 송경동 시인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희망 버스'라 불리었습니다. 이 희망 버스는 자기의 생활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던 우리 개인들에게 새로운 이웃을 소개해주었습니다.

만난 적도 없고 이야기 나눈 적도 없는 이웃을 보기 위해 잠시 내 생활을 접고 먼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주었고, 그 이웃을 향해 두 손을 힘껏 흔들어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희망 버스에 몸을 싣기 전에 느꼈을 그 이웃의 고독과 힘겨움은 곧 우리 개개인이 지니고 가야 할 고독과 힘겨움이라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생활은 곧 실존입니다. 희망 버스가 이웃의 생활 속으로 달려갔던 것은 그것이 곧 우리의 실존이기 때문이고, 이웃의 실존이 곧 우리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웃이 늘어나고 그 이웃의 생활이 바로 내 실존이 되는 기적. 그것이 바로 희망 버스였습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송경동 시인을 가둬놓으면 더 이상 희망 버스가 달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아니면 그동안 골탕 먹였으니 어디 한 번 혼나보라는 심정인가 봅니다. 하지만 희망 버스의 배후는 송경동 시인이 아닙니다. 희망 버스와 송경동 시인은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있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습니다(송경동,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희망 버스를 멈추게 하고 싶다면 송경동 시인을 구속할 것이 아니라 푸른 들을 가득 메운 나무들과 꽃잎들, 교교히 흐르는 강물을 철창 안에 가둬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에게 '시인 송경동'은 보이지 않는가 봅니다. 아마 '시인 송경동'이라는 말이 '전문 시위꾼 송경동'으로만 보이나 봅니다. 그의 아름다운 시들이 폭력 시위를 선동하는 구호쯤으로만 읽히나 봅니다. 어느 평론가가 말했었죠. 시는 자신과 화해하는 방식이고, 소설은 타자와 화해하는 방식이라고. 시도, 문학도 모르는 치들이, 그 누구와도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화해해본 적이 없는 그치들이 어떻게 송경동 시인의 진짜 죄목을 알겠습니까.

진압 경찰들에게 맞아 세상을 떠난 한 노동자를, 구청이 고용한 용역깡패들에게 삶의 터전이었던 리어카와 붕어빵을 잃고 목을 맨 한 노인을, 세계무역기구(WTO)와 FTA라는 국제적인 돈놀이 판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던진 이들을, 망루 안에서 맞아서 불에 타서 죽은 이들을, 그리고 이들을 키워낸 이 땅의 들과 강물과 나무를 사랑한 죄, 그 사랑을 실천한 죄. 그리고 이 모든 사랑의 죄들은 송경동 시인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시인들의 죄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시인들은 그 죄에 동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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