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KBS 사장 해임 사태라는 과정을 피해자의 시각과 기록에 의존했다. 전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조감하려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기록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다 해도 이 일을 주관한 염치없는 정권 핵심부가 진실을 밝힐 염치까지 가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염치를 가진다 해도 나설 만한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자를 천직으로 여겼고 원칙에 충실한 저자 정연주의 성향대로 기록과 기억이 객관적이어서 사태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배경과 등장인물을 보면 정권으로서는 상대를 잘못 골라 만났다 싶다. 그래서 이 기록은 21세기가 시작해 한참 지난 오늘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대표 방송사의 사장을 몰아내고 형사 사건의 피고인으로 만든 현대사의 중요 장면을 기록한 정사에 해당한다.
저자의 경험과 기록, 기억을 보면 정권은 다각적, 다층적으로 목을 조여 왔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공개적인 행보를 보였다. 당시 보도 속에 드러난 방송통신위원회, 교육과학기술부, 동의대학교, KBS 이사회, 국세청, 뉴라이트 전국연합 등 보수 단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지 작업을 했다. 전직 KBS 직원은 업무상 배임으로 사장을 고발하는 수고를 맡았다. 저자가 모은 당시 보수 언론의 보도와 논설을 보면 누군가의 박자를 맞춰 움직이면서, 틈과 핑계만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이 필자의 목에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댔다. 그렇게 파악해 보면 짐작이 가는 바, 권부 어딘가에 작전 본부와 본부장이 존재했다. 모든 당사자들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즈음해 작전을 마친다는 일정표와 시간표에 따라 움직였다.
| ▲ <정연주의 증언 : 나는 왜 KBS에서 해임되었나>(정연주 지음, 오마이북 펴냄). ⓒ오마이북 |
감사원은 KBS 기록을 뒤지고 직원은 물론 외주 제작사를 못살게 했으며, 목표했던 대로 기록이 나오지 않으면 마구잡이로 파고들었다. 법적 요건을 형식적으로 갖추기 위해 감사위원회를 열어 밀어 붙인 뒤 그 기록을 비공개로 분류해 정보 공개 청구를 거부했다. 천신만고 끝에 접한 회의의 일부 기록은 국가 기관의 회의라기에는 저질스럽고 부끄러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요한 기록이 될 것이다. 검찰은 여러 번에 걸쳐 보여줬듯이 이 사건에서도 비법률적으로 등장해, 과연 생명과 자유를 맡을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
이른바 국가의 중추 기관이라는 감사원과 검찰은 정연주 제거 작전에 동원된 졸병처럼 열심히 성심껏 일했다. 이 기관의 소속원들은 자신의 임무에 관해 최소한의 기준을 지키거나 사고하지 않으려 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의 초라한 부속품으로 기꺼이 전락했다. 이들에게 법은 구색이고 기관의 독립성은 장식이었다. 민주화는 이런 공적 기관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반당하고 유린당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아마도 공적인 중추 기관에 대한 절망을 목격하고, 동시에 앞으로 해내야 할 개혁의 방향과 정도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보수 언론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는 한편 법조 기자들에게도 일침을 가했다. 법조 기자들이 재판 과정에서 보여주는 무성의한 취재 행태와 결과만 비쭉 보도하고 손 터는 편집 방침에 대해서는 현역 기자와 데스크들이 부끄럽게 생각할 대목이다.
저자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아주 무서운 진실, 곧 민주화 이후 시대에 정권이 맘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현실을 본다. 제일 큰 방송사이자 신뢰 받는 언론사의 사장이 파렴치한 경영인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를 뒤집어쓰고 쫓겨나 3년째 피고인과 피고로 싸우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민주화라는 분명한 사회적 자산이 현실에서는 이렇게 망가지고 구성원들이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 모습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또 다른 무서운 현실은 철저하게 정권에 조응하는 KBS 내부의 모습이다. 이사회, 보수 노조, 친여 직원들이 변질하고 적대적으로 바뀌는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하루아침에 말을 바꾸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이비 보수 체질의 임직원들이 상당히 존재하며, 그들의 본색이 드러나 있다. 만약 KBS 내부가 철저하게 민주화되고 언론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다면 정권이 사장 축출 작전에 돌입하고 실행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어려울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는 중대한 증언에 해당한다.
책의 뒷부분은 사장으로서 겪은 KBS의 모습 일부와 정권에 장악된 뒤 KBS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인사 민원을 한 노조 위원장이나 한밤중 자택을 방문해 사퇴를 종용한 권부의 KBS 전 직원을 비롯해 이상 행태를 보인 사람을 대부분 실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명화는 저자의 집필 방침으로 보이는데, 그다운 결정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최근 KBS 내부에 있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 사색하고 저항하는 이들의 움직임을 설명해준다. 다만 요즘 이런 움직임에 활동성이 엿보이지 않아 유감스럽다.
책의 마지막에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언론 경험과 단상을 전하고 있다. 저자가 <동아일보> 해직 기자로서 직접 겪은 1970년대 언론의 저항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현실을 조망하고 있다. 또 KBS와 <문화방송>(MBC) 방송사의 후배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그들을 걱정하고 격려하고 있다. 에필로그로 붙인 '언론과 권력'에서는 현실 언론에 대한 비판에 덧붙여, 조중동을 보지 않는 젊은 세대에 대한 기대를 실었다. 이런 기록을 내놓는 진짜 목적은 젊은이와 미래에 대한 기대에 있는지도 모른다.
기록을 철저하게 챙기는 기자 정연주는 이 책을 통해 다음 책에 대한 약속을 하고 있다. 먼저 직접 겪은 해임 공판과 재판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 책으로 미뤘다. 대법원 판결까지 기다린 뒤 공판과 재판에서 일어난 일들을 쓸 것으로 보이며, 후배 법조 기자들에게 기대한 일이 이뤄지지 않아 본인이 직접 기록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보인 행태와 함께, 증인으로 등장하는 많은 기관 소속원들이 보여주는 기막힌 말과 행동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저자의 왕성한 집필 의욕과 기록 의무감에 경의를 보낸다.
저자에게 다른 임무가 하나 더 있다면 공영 방송 KBS의 진짜 모습이다. KBS는 수많은 채널, 방대한 조직과 직원, 막대한 예산을 쓰는 공영 방송이지만 사실 그 내부의 모습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거대 조직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에 대해 관찰하고 경험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의무가 누군가에게 있다. 저자는 그것을 기록할 많지 않은 적임자 중 하나다. 기대해 본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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