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 선고를 받고 수술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퇴원 후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는 시간 또한 견디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나는 일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일만 알고 살았다. 그런 사람이 일시에 모든 것을 중지하고 생짜로 누워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견디는 것은 남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낯설고 불편했다.
회복 시간은 더디게 지나갔다.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 속으로 불안감이 파고들었다. 이렇게 반편이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사람 구실은 할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정체 모를 두려움이 수시로 몰려왔다. 건강한 몸으로도 나이 50이 되면 삶에 대해 자신이 없어지는데 환자의 몸으로 지천명(知天命)에 강제로 편입되었으니 하늘의 명을 제대로 알 리 만무했다. 나는 수시로 절망했다.
| ▲ <나를 세우는 옛 그림>(손태호 지음, 아트북스 펴냄). ⓒ아트북스 |
그런데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읽는 내내 지루한 줄을 몰랐다. 마치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오랜 친구가 찾아와 살아가는 얘기를 자분자분 들려주는 것 같았다. 그 친구의 얘기가 어찌나 다정하고 살가운 지 몇 시간동안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의 글은 따뜻하고 사려 깊었으며 타인의 감정을 예민하게 들여다볼 줄 알았다.
그의 글은 산전수전 다 겪고 공중전까지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상처투성이의 노병을 떠오르게 한다. 몇 시간동안 그가 들려준 얘기를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치밀한 고증 속에 현장감을 더한 그림 이야기
이 책은 조선 전기의 대작 <몽유도원도>에서 조선 말기의 <매천 황현 초상>까지 조선의 옛 그림 60여 점에 대한 의미와 작품 창작의 배경을 소개하고, 지은이가 발견한 옛 그림 속 가르침을 기록했다. 책은 모두 3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1부 '절망으로 피워낸 꽃'은 '힘든 시기에 저자에게 큰 용기를 주었던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다. 길을 가다 넘어져 주저앉아 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은이의 어깨를 다독여 준 그림들이다.
김명국의 <설경별리도>에서는 "떠나는 그리움이 남겨진 그리움에게" 전해주는 애틋함이 묻어 있다. 말을 지극히 사랑한 윤두서의 <유하백마도>에서는 개인적인 비극을 넘어서서 말처럼 당당하고 굳세게 살아간 선비의 자화상을 떠올린다. 이 밖에도 대나무 그림의 일인자 이정의 <풍죽도>, 정약용이 부인이 보낸 색 바랜 치마를 잘라 딸에게 그려 보낸 <매화쌍조도>, 절망 속에서도 고운 붓질로 되살려낸 심사정의 <딱따구리>,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다 복숭아꽃밭 속으로 사라진 안평대군의 사연이 담긴 안견의 <몽유도원도>등이 펼쳐진다.
2부 '그래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삶'에서는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줬던 그림들'을 소개했다. 우리가 옛 그림을 보고 화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 과정에서 현재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생명과 존재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김정희의 <수식득격>에서는 불필요한 욕망을 비우고 담백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청아함을 보여준다. 신윤복의 <주사거배>와 <사시장춘>에서는 서민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현장과 솔직한 인간의 감정을 살펴보았다. 허목의 <월야삼청>에서는 "부와 명예보다는 학문을 추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길"을 당당하게 걸어간 조선 선비의 눈부신 삶을 들여다보았다.
2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은 정선의 <계상정거도>와 김홍도의 <황묘농접도>에 대한 글이다. <계상정거도>에 관한 부분은 그림이 그려진 장소가 '도산서당'이 아니라 '계상서당'이라는 것을 밝혔기에 중요하다. 이것은 지은이가 그림이 그려진 실제 장소를 답사하면서 일일이 그림 속의 장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결론이라 그의 실증적인 학문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자세는 3부에서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소개할 때도 큰 힘을 발휘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선은 <인왕제색도>에서 인왕산의 '흰' 바위를 '검게' 칠해 주목을 받았다. 그 이유를 나는, 정선이 현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기 위해 대상을 왜곡시키고 과장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은 작가 정신으로 해석했었다. 바위가 가지는 무거운 성질을 그림에서 가벼운 흰색보다는 검은 색으로 칠했을 때 감상자가 더욱 효과적으로 중량감을 느끼기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은이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인왕산의 백색 봉우리가 사실은 검은빛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가 오면 바위색은 더욱 검은빛으로 색이 짙어진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의 친구이자 시인인 이병연이 세상을 떠난 여름에 큰 비가 오고 난 뒤 개인 인왕산을 그린 작품이다. 젖은 바위를 그렸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지은이가 인왕산에 직접 올라가서 바위를 살펴보고 난 후에 얻은 결론이다. 지은이의 부지런함과 현장을 중요시하는 학문 태도가 우리 미술사를 이야깃거리가 더욱 풍부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감상할 수 있는 세계로 열어 놓았다.
| ▲ 인왕제색도(겸재 정선, 1751, 국보216호). ⓒ네이버미술검색 |
3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행복하기를'에서는 '슬픔을 승화한 그림들로 형제 같은 벗, 연인, 가족 등을 떠나보내는 한없는 슬픔과 그리움을 화폭에 승화한 그림들'을 이야기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이 극구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진리 즉 "희망뿐 아니라 슬픔도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그림들이다. 김홍도의 <춘작보희>, 정선의 <인왕제색도>, 신윤복의 <월하정인>, 김두량의 <긁는 개>, 작자 미상의 <감모여재도>, 채용신의 <매천 황현> 등의 작품에서 우리는 힘이 되는 슬픔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든든한 것은 한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의 생애와 주변 환경, 시대 배경과 작가의 예술가적인 고뇌까지 꼼꼼히 살펴 독자에게 전해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다른 보충 자료를 찾지 않아도 지은이가 소개한 작품을 충분히 넉넉하게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 초상화를 설명하면서 그 사람의 생애와 역사적 배경까지 상세히 알 수 있는 채용신의 <매천 황현> 편은 그 어떤 평전보다 매천의 일생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보충 자료로 덧붙인 관련 그림까지 안복을 누리다보면 어느 새 머릿속에 한 권의 조선 시대 회화사가 정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현재의 삶을 이야기하는 옛 그림
이 책은 옛 그림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단순히 옛 그림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 주기 위한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림을 통해 '감식안을 높이고 생활을 되돌아보는 반성의 과정'속에서 쓰인 책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지은이의 말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반갑다.
"김홍도의 <모구양자도>를 보면서 아들로서 저를 돌아보게 되었고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보면서 절친했던 친구가 힘겨워할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해 새삼 부끄러워졌습니다. 윤두서의 <자화상>과 <매천 황현>을 보면서 중년 선비의 삶과 자세를 깊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김정희의 <수식득격>을 보면서는 나태해진 제게 찬물을 확 끼얹는듯하여 마음이 서늘하기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손태호'라는 지은이의 삶 속에 뿌리 내린 옛 그림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 마치 옛 친구가 찾아와 살아가는 얘기를 자분자분 들려주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만큼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깊이 들여다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옛 그림을 소재로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만 아버지의 칠순 잔치에 장수를 기원하는 김홍도의 <황묘농접도>를 인쇄한 초청장을 돌린 얘기는 오직 이 책에서만 읽을 수 있다. 그의 삶이 곧 그림 같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과 자주 만나게 된다. 그것이 나에게는 수술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갑작스런 해고 통지를 받는 일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이혼장에 도장을 찍는 일일 수도 있고 뜻밖의 송사에 말려들어 난생 처음 법원에 들락거리는 일일 수도 있다. 명예퇴직으로 받은 돈을 사기당해 전부 날리는 일은 또 어떠한가.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병이 나에게 실제 상황이 되었듯이 불행은 언제나 우리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예상 밖의 불행을 만나 당황하고 있을 때 다정한 벗이 곁에 와서 위로의 말을 건네준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이 책은 어려울 때 손을 내미는 옛 친구 같은 책이다. 마지막으로 병상에 있을 때 곁에 와서 들려준 지은이의 얘기를 전해드리니 여러분도 직접 책 속에 담긴 그의 육성을 들어보시기 바란다.
"무엇보다도 제가 그림에 위로받았듯이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께 도움이 된다면 더없는 기쁨이겠습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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