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 없이 땅주인의 이익만 고려하며 막무가내로 진행되던 재개발에 항의하다 다섯 명의 억울한 생명이 영하의 대지 위에서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휘둘리고 화염에 휩싸인 채 삶을 마감해야 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무려 1년여의 시간 동안 참사 현장을 비롯해 서울역과 청계광장 등 서울 시내 곳곳에서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고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집회 및 시위가 이어졌다.
하지만 용산은 그 비극의 규모 때문에 특별한 주목을 받은 곳일 뿐이다. 해고의 아픔에 고통 받는 노동자들이 쌍용 자동차와 한진 중공업에만 있는 것은 아니듯이, 폭력적 재개발의 과정에서 용역에게 짓밟히고 거리로 내쫒긴 사람들도 용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박원순 서울 시장 취임 이후 재개발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면서 서울에만 속칭 재개발, 즉 도시 정비(예정) 구역으로 지정된 곳이 1300여 곳에 이른다는 보도를 보고 놀랐던 사람이 아마 나만은 아니었으리라. 이 좁은 서울시에 정비가 필요하다고 지정된 지역이 그토록 많다는 것도 믿기지 않지만, 그건 소규모의 용산 참사가 이미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 1300여 곳이나 된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용산 문제의 해결이 단지 참사의 진상 규명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재개발 정책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느끼게 된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또 다른 용산, 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김성희 외 지음, 보리 펴냄)는 우리 이웃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폭력의 실상을 고발하고 언제라도 그 처지로 떨어질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재개발 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연대를 호소하는 만화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르포 만화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발로 뛰어 취재한 여섯 편의 만화 속에서 여섯 명의 만화가들은 우리의 무관심 뒤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용산의 비극을 보여준다. 서울시 용산구 신계동, 고양시 일산구 덕이동, 부천시 원미구 중3동,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 서울시 동작구 상도4동 등이 바로 그들이 답사한 현장이다. 아마 용산을 알고 용산의 아픔을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도 이들 지역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용산 참사가 단지 용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용산 참사는 아직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생생히 확인하도록 해 준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 ▲ <떠날 수 없는 사람들>(김성희·김수박·김홍모·심흥아·유승하·이경석 지음, 보리 펴냄). ⓒ보리 |
앞의 만화에서 인터뷰를 통해 전달되는 철거민들의 육성은 그만큼 생생하고 절절하지만, 등장인물들의 표정처럼 단조로운 톤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비록 단편이지만 독자들은 감정을 이완시킬 여유를 거의 갖지 못한 채 철거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도록 강요받게 된다. 반면 가슴의 통증을 모티브로 하여 짓밟힌 햄스터의 모습 속에서 철거민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유승하의 '니 편한 세상'과 성남시 단대동 철거민들의 경험을 여러 사람의 시각에서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김홍모의 '갈 곳이 없다'는 철거민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줌으로써 능동적인 공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누군가 반론을 할지도 모르겠다. 만화적 구성보다는 현실의 정확한 전달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그 폭력적 현실 앞에서 만화적 구성이란 사치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저 독자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만화를 택한다면 만화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독자의 접근성만을 염두에 두고 만화를 그리는 태도가 얼마나 안이한가는 1980년대 말 이후 제작되었던 여러 학습 만화들의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실적이 이미 보여준 바 있지 않은가. 만화에 굳이 유머의 요소가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만화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극의 요소가 필요하다. 그런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만화는 그저 사진의 보조 자료, 사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빈 칸을 그림으로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때로 드라마보다 더욱 드라마틱한 현실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아무리 드라마틱한 현실이라도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만으로 드라마가 되지는 않는다. <개그 콘서트>의 '생활의 발견' 코너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비극적 순간에도 우리는 비루한 일상의 삶을 이어나가야 하고 그것은 드라마의 긴장감과 통일성을 훼손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날 현실에 대한 일정한 생략과 과장 등, 막스 베버의 용어를 빌리자면 '전형을 만드는 작업'이 덧붙여져야 한다.
이 책의 여러 만화에서 아쉬운 것은 실제로는 극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극화를 배제한 것처럼 보이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의 만화에서 비루한 일상의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동시에 적절한 극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도 않다. 즉 극화는 불필요한 것을 배제하는 수동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을 뿐 작가의 의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능동적 차원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들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의 의도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보며 용산 참사,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같은 참사가 만화로 재구성되기에는 아직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통을 승화시켜 극으로 만들기에는 그 겨울의 거리에서 우리가 느꼈던 분노가 아직 지나치게 생생하다는 것이다. 또는 우리의 부채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도시의 바로 옆에서 일어났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미안함,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고통을 보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무기력함이 상상력의 발휘를 사치로 여기게끔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단지 시위 현장에 함께 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담으려는 생각을 했다면 그 만화 역시 시위 현장에서 분노를 공유하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1년여 넘게 용산의 현장을 지켜 나갈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이 집회의 비장함 뿐 아니라 매일 저녁의 미사가 마련해준 반성의 시간과 수시로 열렸던 문화제의 발랄함에서 축적되었듯이, 희망 버스의 행렬을 이끌어 냈던 것이 위태로운 크레인 꼭대기에서 309일을 버텨낸 김진숙의 강인함 뿐 아니라 트위터를 통해 발현된 여유이기도 하였듯이, 만화는 문화제의 발랄함과 트위터의 여유를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여러 재개발 지역 현장의 모습이 아무리 참혹하더라도 그 정도가 용산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렇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해 굳이 만화라는 매체를 택하였다면 그 매체의 속성을 충분히 이용할 때 만화를 택한 의의도 더 잘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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