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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로 '월스트리트' 점령? 꿈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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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로 '월스트리트' 점령? 꿈 깨!

[프레시안 books] <점령하라>

얼마 전 거의 동시에 같은 제목을 가진 두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점령하라>가 그 책들의 제목이다. 각각의 책은 비록 부제는 다르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해 엇비슷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지난해 가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가 그것이다. 책의 표지 전면과 후면에는 '1퍼센트'나 '99퍼센트' 같은 숫자들이 적혀있고 두 책 모두 여러 명의 저자를 둔 공동 저작이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물리적·지리적·문화적 범주이다.

북돋움에서 번역 출간한 <점령하라 : 99퍼센트 대 1퍼센트 월스트리트 점령 인사이드 스토리>(임명주 옮김, <인사이드 스토리>)는 저자가 '시위자'이다. 주코티 공원에서 두 달여의 시간동안 지속된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서 활동한 '교육 활동 그룹'의 주체들이 이 책의 기획자다. 그들은 지난해 미국 잡지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Protester)'를 꼽았듯 저자 스스로를 '시위자'라고 명명하고 있다.

▲ <점령하라>(시위대 지음, 임명주 옮김, 북돋움 펴냄). ⓒ북돋움
<인사이드 스토리>는 '점령 운동'에 참여한 다수의 시위자와의 인터뷰와 공통 편집 회의 과정을 통해 철저하게 월스트리트에서의 상황과 진행 과정,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월스트리트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의 '점령하라' 시위 상황이나 논평들은 배제되어 있다. 또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의 주요 공간인 주코티 공원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당파적 입장은 어느 정도 배제되어 있다.

운동의 직접적인 가담자들이 자신의 운동이 지니고 있던 직접 민주주의, (투표나 다수결이 아닌) '합의를 통한 결정'이라는 집단적 성격을 책의 기획과 출간 과정에서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이런 특징은 이 책이 사실 관계들에 대한 면밀하고도 세부적인 진술들을 통해 구성되어있으면서도 어떤 비평적 입장이나 당파적 견해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한계들을 통해 드러난다.

반면 알에이치코리아(RHK)에서 번역·출간한 <점령하라 : 세계를 뒤흔드는 용기의 외침>(유영훈 옮김, )는 뉴욕에 기반을 둔 정치·문학·문화 비평지 (www.nplusonemag.com)에 의해 기획된 더 심층적인 분석이다. 인종주의, 민주주의, 시위 방식에서의 폭력-비폭력 논쟁, 공원을 함께 점거하고 있는 노숙인에 대한 반감 등 점령 기간 중 시위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지형을 형성했던 담론들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편집진의 당파적 견해가 어느 정도 기입되어 있다. 또 월스트리트에서의 시위뿐만 아니라 보스턴, 오클랜드, 애틀랜타, 필라델피아 등 미국 전역으로 퍼진 '점령' 투쟁의 상황과 각기 다른 조건들에 대한 일정 동일한 입장을 지닌 '사려 깊은'(이들이 지닌 진지하고도 격정적인 보고를 읽다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위자들의 보고도 실려 있으며 (저자 대부분은 대학 강사이거나 대학원생, 활동가들이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주디스 버틀러 같은 이론가들이 주코티 공원에 방문했을 때 시위자들에게 했던 연설문도 포함되어 있다.

하기에 의 저자 표기가 "슬라보예 지젝 외"라고 되어있는 점은 어느 정도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화제가 되었던 슬라보예 지젝의 연설문은 인터넷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책의 단 한 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젝'의 인기를 적극 활용하기 위한 출판사의 마케팅 목적이 동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사회의 이면을 드러낸 운동 과정


▲ <점령하라 : 세계를 뒤흔드는 용기의 외침>(유영훈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알에이치코리아
지난해 9월 17일 월스트리트의 주코티 공원에서 시작된 '점령하라' 시위는 급기야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금융화된 자본주의 체제의 현재적 위기를 표면화시켰다.

동시에 1퍼센트 대 99퍼센트라는 수치화된, 그러나 명백하게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는 계급적 대립을 표면화시킴으로써 이것이 어떤 욕망을 내재하고 있는지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모두가 그렇게 여겼던 것처럼 이 운동은 이제까지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종류의 운동이었고, 또한 동시에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던 운동 담론의 논쟁도 갖고 있었다.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 하나는 미국 사회에서 인종주의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에 수록된 머니서 매해러왈(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생)의 에세이를 통해 잘 드러난다.

월가 점령 시위가 다른 여느 시위들처럼 역시나 백인 남성 위주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시위 초반에 가담하지 않았던 그녀는 시위가 점차 확장되기 시작하자 호기심을 갖고 주코티 공원에 가기 시작했다. '정의로운 남아시아 사람들' 모임 사람과 함께 현장의 공개 총회('점령하라' 시위의 정치적 결정은 바로 이 총회에서의 논쟁을 통해 '전원 합의'에 따른 의사 결정 방식으로 이루어진다)에 참가한 그녀는 '월가 점령 선언문' 결의를 위한 안건 토의에서 한 문장이 수정되는 과정을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선언문 초안의 "인종, 계급, 성별의 구분은 끝났다"는 선언이 현실에서, 심지어 운동 과정에서도 여전히 발생하는 모든 차별들이 마치 모두 종결되어버린 것처럼 말함으로써 운동 스스로를 기만할 것이라고 느낀 그녀는 사회적 억압들이 지나간 과거의 일인 양 단정하는 이 문장이 왜 잘못된 것인지 끈질기게 사람들을 설득했다. 결국 총회는 그녀와 그 동조자들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것이 이루어지는 총회의 과정 자체에서 느낀 감동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물론 인종주의적 쟁점을 둘러싸고 이렇게 감동적인 사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월스트리트에서뿐만 아니라 오클랜드, 보스턴, 애틀랜타 등에서 인종주의적 갈등의 요소는 번번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런 갈등과 논쟁들은 미국의 역사적 사회 운동이 갖고 있던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과 논쟁의 층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인종주의뿐이 아니다. 한국의 사회 운동 현장에서도 항상 쟁점으로 남아있는 무정부주의-사회주의, 폭력-비폭력, 청년 활동가들의 생디칼리즘적 태도, 노동조합에 대한 거리두기 등 다양한 쟁점들을 둘러싸고 부지기수의 논쟁과 갈등이 드러났다. 특히 폭력-비폭력의 문제는 항상 점증하는 운동을 일순간에 가로막을 수도 있는 논쟁적 요소다.

다만 두 책에서 드러나는 주된 태도는 어느 정도는 일관적인 것들이었다. 요컨대 폭력 투쟁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옹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경찰이 매우 압도적이고도 폭압적으로 시위자들을 진압하고 폭력을 자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은 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비스 캠퍼스에서 경찰이 자행한 최루액 난사 영상이나 뉴욕의 다리 점거 시위 중 경찰이 자행한 700여 명 연행 사건, 오클랜드에서 지독하게 벌어진 폭력 진압 사건 등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유튜브 영상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소수의 폭력 투쟁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호자들 때문에 운동은 어떤 위협을 겪기도 한다. 중요한 건 '다양한 전술 구사'라는 명목으로 무조건적으로 자행되는 빌딩 유리창을 깨부수는 것 등의 폭력 시위들이 종종 경찰에게 폭력 진압에 대한 빌미를 주어 운동 전체를 위협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폭력이라는 쟁점에 있어서 저항하는 이들은 언제나 '대항-폭력'이라는 담론의 한계를 넘어 '반-폭력의 정치'를 전취할 필요가 있다.

한국적 변용은 가능한가?

그러나 '점령하라 시위' 과정에 있어서 발생한 담론들의 지도를 한국적 상황에 비견해 그리는 것은 다분히 독자의 몫이다. 우리는 당장 지난해 10월 17일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에 대한 연대 시위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날 서울에서도 연대 시위가 벌어졌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날 시위가 아주 맥 빠지는 수준에서 끝났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 모사의 수준도 매우 조야한 수준에서 그쳤을 뿐이었다. 높은 단의 무대가 있었고, 이곳에 한동안 자유 발언대가 허락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정해진 각본에 의해 제한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어떤 각본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남으로써 시위의 참가자들이 자신이 그 시위의 주인이 아니라 '객'에 불과하다고 느끼게 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전면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시행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은 <점령하라>의 저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머니서 매해러왈의 사례는 충분히 감동적이었고, 또 우리가 흔히 점령 시위의 의사 결정 구조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은 그것이 완전히 직접 민주주의를 지향했다는 것이지만, 사실 이런 점들은 일정 사실이 아님을 두 책은 고백하고 있다.

점령 시위에는 실무 역할을 주도하는 무수한 '작업 그룹들'뿐만 아니라 소수의 주도자 그룹이 존재했고, 이 그룹들에서 필연적으로 비공개로 할 수밖에 없는 결정들이 이루어졌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층위에서 공개하기 어려운 전술적인 차원의 결정들이 이루어질 때, 그리고 점령 시위에서 몇몇 작업 그룹들처럼 실무적인 차원에서의 효율성을 담보하기 위해 '폐쇄적 구조'는 병행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런 그룹들은 저 나름의 당파성을 갖기도 했다. 한국에서 흔히 이런 것들이 굉장히 구좌파적인 폐쇄성으로 취급받기도 하지만, 어느 조직이나 당파성이 없는 조직은 없다. 다만 규모가 커질수록 그 집단의 성격을 아우르는 당파성이 약해질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운동에서 이런 불가피한 조건을 갖더라도, 동시에 건강하고 열려있는 의사 결정의 구조가 긴장감 있게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필사적으로 지켜내는 것이다. 점령 시위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 사회 운동에 조가비 연맹이라든지 퀘이커교 계열의 친우교파 등을 통해 '합의의 신학'이라는 전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1960~70년대 미국을 휩쓴 반전 운동에서의 역사적 경험도 남아있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에는 그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어떤 구조에 대한 경험의 역사가 살아남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에는 '모든 구조는 악'이라는 식의 몽매주의에 빠진 속류 아나키즘적 신화가 있거나 다른 한편에는 다수파 조직의 패권주의가 횡행할 뿐이다.

어쨌든 우리는 다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의 조건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에서의 첫 번째 시위에서는 애당초 기획됐던 텐트 시위 등의 계획들은 모두 취소되었고 흔한 행진도 없었다. 시위를 가장 주도적으로 준비한 주체들의 성격도 월스트리트와는 너무나 달랐고, 독특한 피켓이나 퍼포먼스들이 있긴 했지만 확실히 그것은 단순한 요식에 지나지 않았다.

'점령하라' 시위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얻어낼 수 있었던 정세적 호조건을 매우 초보적인 오판과 무능력으로 인해 실패하고만 것이다. 이후에 몇 차례의 모사-점령하라 시위가 있었지만 유의미한 숫자의 시위로 확장되지 못했다. 가장 호조건을 형성했을 때 벌어진 최초의 시위가 'OCCUPY'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어떤 신비감을 일소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베껴 모사하려는 시도보다 한국의 정세적 저항들에서 어떻게 기입해 연대하고 동참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월스트리트라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공간에서의 저항이 차지하는 서사적 맥락은 대단히 위력적이며 신선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마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영도조선소의 85호 크레인에 올라 3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싸웠을 때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식의 서사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점령하라' 시위의 내러티브는 개별화된 저항들에 그치는 미국의 상황에 지쳐있던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 저항을 지속하기 위한 형식적 시도들이 참가자들을 열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대안 이념 실종된 한국의 사회 운동

운동의 이런 점에 있어서 두 책은 모두 동일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한국에 가져와 실천적 '번역'을 감행하는 것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것을 번역한다는 것은 가능한 조건 속에서 한국적 상황에 맞게 실현하는 것일 테다. 일단 가장 중요한 '합의의 신학'이 수호될 수 있도록 조직 운동에 의한 패권주의가 없어야 하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공통된 합의의 정치가 있어야 한다.

또 여러 도시에서 시위자 간 갈등을 증폭시켰던 폭력이나 무정부주의라는 쟁점 앞에서 미국의 패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념적 단련이 되어있는 일군의 활동가들이 존재해야 한다. 셋째로 체제에 대한 인민주의적 환상을 불식시키는 변혁적 감수성이 '주'가 되는 운동의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 모르겠다. 솔직히 오늘날 민중 운동이 처한 조건을 떠올려본다면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큰 대중 조직 중 하나인 민주노총은 지난날 민주 노조 운동이 가졌단 급진적이며 민주적인 성격을 모조리 상실해가고 있다. 총선에 대한 조합원 전체의 지침을 결정하는 의사 결정 구조는 수천 명의 현장 활동가들이 반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당파성을 지닌 소수에 의해 전횡되고 있고, 차이들에 대한 논쟁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장 급진적 태도를 견지해야할 대중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의회주의나 주류 정치에 대한 기대에 머물러 자기 자신의 정치를 상실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 사회 운동의 다수파인 통합진보당은 사회적 논란이 되어 노동자 운동의 위상을 추락시켰던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무책임하게 처리한 정진후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을 비례 대표 후보로 올려놓아 논란을 사고 있다. 이는 '점령하라' 운동에서는 결단코 용납되기 어려운 모순적 태도이다. 더군다나 지금까지도 성폭력 피해자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음에도 잘못된 사실을 유포함으로써 사건을 호도하고 있기까지 하다. 더구나 의회나 주류 정치에 대한 기대를 넘어 완전히 그곳에 뛰어듦으로써 '대안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상실하고 있다. 무엇하나 '점령' 시위의 사상적 토대와 거리가 먼 것이다.

인종주의나 성적 소수자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두 말할 것 없이 한국적 토대는 낙제이다. 이주 노동자 운동에 대한 노동 운동 전면의 관심은 지독하리만치 소극적이다. 또한 여성주의적 시각이나 장애인 운동에 대한 태도 역시 그들을 주체로 긍정할 수 있기보다 종종 피해감만 가중시키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는 아무런 정치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운동의 지도력이 이렇게 아무것도 담보하지 못하니 대중들의 불신은 누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이제는 불만을 넘어 냉소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이 책을 한국에서 '번역'하려는 시도가 어느 정도 실패를 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회적 조건들은 둘째치더라도 일단 두 책을 출간한 두 출판사 모두 <나는 꼼수다>의 인기에 도움을 얻으려 했는지 각각 김용민과 김어준의 '추천사'를 전면에 배치한 점은 씁쓸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사이드 스토리>의 추천사를 쓴 김용민은 '점령하라' 시위가 "<나는 꼼수다>와 많은 부분 닮아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미국으로 따지자면 '민주당'인 민주통합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할 그가 과연 '점령하라' 시위의 이념과 공명하고 있는 점이 많은지 아니면 공명할 수 없는 지점이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쉽사리 긍정하기 어려워진다. (두 책의 저자들은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는 좌파적 입장을 갖고 있다.)

아마도 저 둘이 책의 표면을 장식한 이유는 <나는 꼼수다>가 한국 사회에서 일으킨 반향이 매우 컸기에 그것의 효과를 얻으려는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번역 출간된 두 책에서 가장 최악의 부분을 굳이 지적해 보라면 바로 그 추천의 말들 부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점령하라'의 가장 훌륭한 한국적 판본은 희망 버스 기획단이 아니었을까?

다른 어떤 투쟁보다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대중적 저항으로서의 '서사'를 갖고 있었으며, 지배 계급을 잠시나마 혼란에 빠뜨렸었다는 점, 조직이 없는 시민들과 노조, 좌파, 무정부주의자들을 결집시켰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음 '싸움'은 '승리'를 안겨줄까

지금 이 순간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50여 명의 해고노동자들과 10여 명의 '점령하라' 서울 청년들이 광장 위에 텐트촌을 형성하고 일상적 투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월 1일부터 이곳의 '점령'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투쟁은 매일매일 경찰의 방해 공작과 철저한 사회적 무관심에 시달리고 있다. 매일 아침 이곳에서 출근길에 오르는 시민들을 향해 조용히 피켓을 들고 선전전을 하려고 해도 경찰들이 그것 자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곳에 시청에 신고를 하고 합법적으로 천막을 치는 시도들조차 번번이 좌절되어 비닐을 덮고 자기도 했었다. 또 지난 15일 아침에는 "정리 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문구가 적힌 조끼를 걸치고 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깅을 하는 것마저 저지당했다. <점령하라>가 보고하는 미국 공권력의 탄압보다 더 몰상식한 탄압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월스트리트에서 가능했던 여러 행진 경로들이 한국에서는 원천적으로 거부당하기 일쑤다. 저 유명한 명박산성과 물대포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누구도, 설령 훌륭한 무술 단련자들이 이 잔혹한 체제에 맞선 정당한 투쟁들에 가담한다고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공권력을 무너뜨리기 어렵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감과 대중적인 지지 속에서 확보될 수 있는 힘이었다. 지배 권력 스스로 무너질 수 있도록 말이다. 따라서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물리력 그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서사'를 설정하고 또 그 저항의 과정 자체를 새로운 세계의 표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민중의 힘'이다. 전혀 다른 좌파적 상상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다.

다시 새로운 싸움을 예비하고 있다는 태평양 건너의 소식들이 들려온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의 주체였던 이들이 다시 '메이데이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개별 공장에서의 조직적 파업을 조직하기보다 자유분방한 이들의 개별적 실천을 기대하는 다소 황당무개하고도 낭만적인 전술에 기대는 측면이 강해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계기를 만들거나 아무런 파급력도 갖지 못하고 유야무야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다시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따금 집회 현장에서 '수원 촛불'이나 '강남 촛불' 같은 깃발을 보면 생경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의 정치적 한계를 둘째치더라도 그들은 지난 패배의 기억을 온전히 삶으로 가져와 일상적 연대의 기획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이 통과된 이후 벌어진 다양한 시위들 중에서 분당의 모처에서 벌어졌다는 동네 시위도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이는 최근 들어 몇 년에 한번 벌어지는 대중적 투쟁의 주체들인 '시민들'과 '청소년들'이 놓치지 말아야할 하나의 진실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점령하라' 시위에서도 주코티 공원의 시위자들은 '시위'가 모두에게 지루해지기 시작하던 즈음 자신들이 이제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 새로운 '점령'을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확실히 '월스트리트'라는 공간은 상징적인 거점 같은 공간이었지 일상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지역 운동'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이 시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2011년 10월 9일 슬라보예 지젝이 주코티 공원을 방문해 했던 연설에서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저 시위자들이 "아, 우리는 젊었고 그때는 좋았지"라고 기억하기보다 끊임없이 체제에 대한 '대안'을 상상한다면, 패배는 단순히 패배로 그치진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지난 패배의 경험을 주류 정치와 의회주의에 대한 기대로 전락시키기보다, '대안 정치'를 어떻게 다시 우리 스스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곱씹는 나날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번 싸움에서는 빽빽한 경찰 버스로 채워진 산성을 대수롭지 않게, 춤추며, 넘어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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