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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만세'가 평양 건축의 전부?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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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일성 만세'가 평양 건축의 전부? 글쎄!

[프레시안 books] <이제는 평양 건축>

제목이 불편한 책이다. '이제는 평양 건축' 이라니? 제목의 숨은 뜻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평양 건축이 시대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주목할 보편적 이슈를 획득한 것도 아닌데, 왜 '이제는' 이란 어휘를 채택한 것일까? 지금이라도 늦었으니 평양 건축을 주목하자는 뜻인지, 시간적 시급성을 강조한 뜻인지 방점이 잘 읽히지 않았다.

책의 내용보다는 저자들의 서술자적 관점이 궁금했고, 그 시점을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북의 체제를 어떻게 보고 있고, 건축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고 있을까하는 문제였다. 이 책은 관점이 서로 다른 글들이 모아놓은 옴니버스 느낌이다. 서로 다른 관점이 한 책 속에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 거북했다. 아니 불친절해 보인다. 이 책을 읽어내려 가는 동안 내내, 비포장 도로 위에서 트럭 뒤에 올라타고 여행하는 듯했다. 원고 내용들에는 각각 내공이 숨겨져 있고 연구방법론도 특성이 갖추었지만, 각기 다른 인식 방법이 책 읽기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고마운 가뭄 끝의 단비 같은 소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는 견해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읽어 보기로 했다. 통일된 나라, 독일의 건축가가 안내하는 이 책이 우리 속에 있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편해지는 것일까 하는 문제와 직면하고 싶어서였다.

평양 건축,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까지 분단체제 내에서의 북한건축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이기보다는 다른 한쪽과의 체제 경쟁적 틀에서 이해되었고 회자되었다. 북한건축에 대한 체제 경쟁적이고 냉전적인 이해방식으로서의 관점은 무관심과 고립을 초래했다. 1990년대 이후 북한건축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여러 통로를 통해 소개되었지만, 여전히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남아있다.

▲ <이제는 평양 건축>(필립 뭬제아 엮음, 윤정원 옮김, 담디 펴냄). ⓒ담디
국내의 북한연구방법론에 대한 논의조차도 구미의 비교공산주의 연구방법론의 복사와 무비판적 편승에서 벗어난 것이 1980년대 후반이라고 한다. 최완규 교수는 이때부터 실증적인 북한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연구시각과 자료 및 이론 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북한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연구시각)를 두고 인식방법과 북한체제의 특수성과 보편성 논쟁이 전개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제는 평양 건축>(필립 뭬제아 엮음, 윤정원 옮김, 담디 펴냄)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독일인 저자가 평양의 건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하는 행간을 쫒아갔다. 1990년 10월 통일된 독일, 21년 전 통일조국을 맞이했던 독일건축가가 왜 분단의 한쪽인 북한의 평양 건축을 '호기심의 방'으로 엿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평양 건축을 연구하여 통일 후의 평양을 대비해야 한다는 준엄한 소명의식으로 우리를 깨우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내가 너무 섣부른 기대를 한 것이다. 저자가 첫 장에 쓴 '금지된 안내서'로서의 역할에 만족하여야 한다. 이 책엔 곳곳에 북한체제를 이해하려는, 아니 이해시키려는 장치를 삽입해 놓았다. 체제 비판적 접근이 건축비평에 선글라스가 되는 것처럼, 보다 객관적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히려 안창모와 크리스천 포스토펜의 글을 첨가해서 관점을 넓히려는 시도가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계획가가 계획한 이 도시의 평가에는 인색하다. 안창모의 글 '평양의 도시와 건축'은 독일인들의 시각을 교정해 주는 중심 추 역할을 하고 있지만, 크리스천 포스토펜의 자유분방함이 또 글 읽기를 방해하고 있다.

이는 북한체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하는 문제가 평양 건축을 어떻게 읽느냐는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일 터이다. 평양이라는 시공간에 구축된 건축이라는 사실과 가치는 디테일하게 구별하기 힘들지만, 보는 이의 인식방법에 따라 가치는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비교사회주의적 관점이 곳곳에 배어난다. 그러면서도 '우상화'와 '수령제'에 대한 북한 체제내적인 특수성에 포커스를 맞추려하나, 체제비판에 가까운 시각에 머물러 버린다. 혹시 나와 다른 인식체계와 가치관을 가진 서구인의 시각이 불편함으로 다가왔다면, 좀 더 진지하게 다시 책을 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은 평양 건축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건축연구방법론으로 치환해서 이야기하자면, 북한건축 아니 '혁명수도의 평양'의 건축은 연구시각과 인식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의 관점으로 읽혀진다. 또한 북한건축에 대한 연구의 발전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상황에서 평양 건축을 읽어내는 것이 많은 오해가 있기도 하다. 연구의 성과도 걸음마 수준이다. 이는 국내에서의 북한의 건축 관련 연구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북한의 도시 및 건축 관련 연구는 세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다. 북한 건축 관련 연구는 양적인 측면과 범위의 다양성 측면에서 아직도 미흡한 분야이지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국토 및 도시에 관한 연구이다. 사회주의권의 도시계획체계와 비교 접근함으로서 북한의 도시구성체계를 연구한 김현수의 '북한의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4), 김원의 <사회주의 도시계획>(보성각 펴냄)이 있다. 그리고 통일 이후의 한반도의 종합적 토지이용을 위한 정책연구 <북한의 국토개발 편람>(국토개발연구원 펴냄) 등 다수가 있다.

둘째는 북한의 도시 및 건축물에 관한 연구이다. 북한의 건축물을 본격적으로 대상화하기 시작한 이왕기의 <북한 건축 또 하나의 우리 모습>(서울포럼 펴냄)이 있으며, 북한의 도시와 건축을 다룬 연구로는 안창모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북한의 도시 건축'이 <북한의 방송언론과 예술>(북한연구학회 엮음, 경인문화사 펴냄)에 실려 있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 임동우의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효형출판)가 출간되었다.

셋째는 북한 건축사에 관한 연구이다. 이 분야에는 북한건축연구자 리화선이 쓴 건축교재인 <조선건축사 1, 2>(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펴냄)를 우리 맞춤법으로 바꾸고 내용을 재구성하여 출판한 <조선건축사>(발언 펴냄), 북한에서 진행된 건축역사의 연구 성과에 대한 연구인 <북한에서의 건축사 연구>(이왕기 지음, 발언 펴냄) 등이 있다.

위에서 보듯, 아직도 국내의 북한건축 관련 연구는 양적으로도 많이 부족하며 분야별로도 세분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건축물의 설계도면은 접근조차 어렵고 사진자료들도 북한 당국이 제공하는 선전용 책자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런 연유로 연구는 더 이상 심화되지 못하고 겨우 인상비평적 차원에 머물러 있으며, 후학들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연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간간이 제공되는 자료들로 코끼리 다리 만지듯이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건축가가 내놓은 평양 건축 안내서 <이제는 평양 건축>은 일단 고마운 책읽기임에 틀림없다.

평양 건축,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제는 평양 건축>은 크게 1, 2장으로 구성된다. 1장은 저자들의 책을 쓰게 된 경위와 이론적 배경, 평양 읽기의 단서들을 제공하고, 2장은 평양의 도시계획과 건축물들을 담은 사진과 짧은 설명을 곁들인 가이드북이다.

필립 뭬제아가 책머리에 쓴 '금지된 안내서'는 이 책의 출판 배경과 구성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본인이 평양 거리로 독자들을 안내하게 된 배경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남한의 관점에서 평양의 건축역사를 요약한 안창모교수의 글을 싣게 된 배경을 적고 있다. 여기서 "이상주의적 도시모델을 만드는데, 이는 평양이 한국전쟁에서 완전히 파괴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도시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인용하고 있다.

1장 후반부에 실린 독일 건축비평가 크리스천 포스토펜(Christion Posthofen)의 글에 대해선, 평양의 광장과 거리가 무대인 세팅된 수도의 역할을 철학과 이론적 차원에서 관찰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김정일 저작집 <건축예술론> 요약을 덧붙여서 1장을 구성하고 있다.

이 책의 첫 장에는 평양의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일상속의 아이들과 행진하는 아이들의 사진이 실렸다. 평양이라는 공간 속에서 북한의 미래를 예견하고 싶어서일까? 뭬제아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광경이었을까?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논점을 피해가고 있다. 그가 우려하고 있는 것처럼, 안내서 형태로의 접근이 순식간에 '북한사람들을 절하시키는 제국주의적 선전'의 목록으로 분류되게 만들 것이므로 정치 체계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뭬제아의 글이 행간 너머로 감추어두고 싶어했던 부분은, 요소요소에 배치된 행사 사진과 포스토펜의 글에 이르러 오히려 도드라져 보인다. 그래서 과연 북한의 정치 체제를 정의하지 않고 인식틀을 밝히지 않은 채 카메라 프레임을 맞추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필자로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일정 부분 북한의 체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 건축가로서, 필자로서의 책임 있는 서술방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건축적 호기심의 방'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그의 관점이 쉽게 노출된다. 뭬제아는 북한사회를 강요된 집단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전체주의 국가로 보고 있다.

이 독일 건축가의 건축적 호기심은 철저히 고립된 채로 "지구화에 굴복하지 않고 거부하"는 지구상에 보기 힘든 "냉전의 마지막 보루"인 동아시아 작은 나라의 도시 평양을 '사회주의적 실험의 장'으로 확대하고 있다.

뭬제아는 평양을 사회주의적 근대도시로 보고 있다. 근대도시 계획기법의 형식적인 측면에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도시에서 쉽게 길을 찾기, 공공건축물의 명확한 표현, 광장으로 트인 교차로와 전망을 위해 세심하게 조성된 비율 등을 예로 들면서 계획가의 노력에는 '만점'을 주고 싶어하지만 근대적 디테일과 미적 건조함 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지적은 뒤에 크리스천 포스토펜이 소개하는 김정일의 <건축예술론>과의 연관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루트비히 힐버자이머나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디자인에 대한 과대 망상적 환상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건축을 주거부분과 공공건물 부분으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그는 북한의 기념탑과 공공건축물 주목하고 있다.

물론 이방인의 눈에 비춘 이상한 현상에 대한 이해의 한계도 노출한다. 예를 들면 개선문이 1945년 해방 직후 지어진 것이 아니기에 이상하게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기념비 건축의 목적은 체제와 권력의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음을 이해한다면 의문이 쉽게 풀릴 것이다. 김일성은 항일투쟁이라는 치적을 통해 지도자가 되었고, 김정일은 그 치적을 정당화하고 신비화하면서 후계를 보장받았다. 그 과정 속에서 탄생된 것들이 대기념비적 조형물과 건축물이다.

새로운 사실도 밝혀진다. 제13회 세계평양축전을 위한 재개발 비용이 45억 US 달러라는 것, 만경대소년학생궁전이 1조 US 달러가 들었다는 점, 그리고 이 액수는 전체 노동인구의 총 월급을 넘는다는 점, 평양지하철에서 운행 중인 객차 168대가 1998년 독일에서 들여왔다는 정보 등은 통계의 개념이 잘 잡히지 않는 남한에선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그러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또한 전문가로서의 분석도 흥미롭다. 330미터의 류경호텔이 철골구조였다면 북한의 건축산업의 특성상 콘크리트구조보다 세 배 이상의 비용이 들었을 것이라는 지적, 구소련의 조립식 주택처럼 평양의 조립식 아파트의 발코니는 단열을 위해 온실기능으로 개조되었다는 점 등이 눈에 띤다.

▲ 이집트 통신 및 건설업체인 오라스콤 그룹이 착수한 이후 류경 호텔의 완성된 모습. ⓒ담디

안창모의 글 '평양의 도시와 건축'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건축적 형상에 대해 분단체제 이후부터의 맥락을 잡아주고 있다.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국가의 도시계획의 이행과정과 북한에로의 이식과정을 정리하고 있으며, 북한의 도시 및 건축정책을 시기적으로 나뉘어 특성을 서술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북한의 도시와 건축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온 연구자로서 균형 잡힌 비판적 글쓰기가 이 책의 골격을 잡아주고 있다.

안창모의 글은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의 건축과 북한의 건축, 일제강점기에서 현대까지의 북한 건축 역사와의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역사적 맥락을 놓치지 않고 잘 안내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 건축의 변천과정을 일목묘연하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수도는 조선시대의 수도였던 서울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조금 다른 이해가 있을 수 있다. 북의 평양을 '혁명의 전진기지'로 활용함으로써 한반도의 지속적 통일전선으로 형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다음은 퀼른에서 활동하는 크리스천 포스토펜의 글 '평양에서 배우기'다. '읽기 쉬운 공간 생산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글은, 평양의 건축을 공간 정치학적 이론으로 고찰한 다음 1991년 출판된 북한건축의 이론서인 김정일의 저작집 <건축예술론>을 요약하여 소개하고 있다.

포스토펜에 의하면, '김일성화'와 '김정일화'의 공간적 배치가 건축적 상황의 관찰자들이 상징을 통해 특별한 존재의 형태로 경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한다. 건축이라는 용어는 개별적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맥락 속에서의 상황을 말하고 있으므로, 곧 도시 전체의 컨텍스트로 이해해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그리고 건축과 공간 계획은 지어진 객체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제하는데 사용하며, 조정 내지 비조정의 과정을 통해 공간적 상황의 사상적 분파를 나타내는 권력의 이해관계를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체제의 사상적 유포 내지는 공간의 시나리오에 의해 완벽히 세팅된 '원칙이 노골적으로 명확해'진, 또는 '도시 안에서 조작되는 프로세스는 신념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평양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바르트를 인용하여, "신화는 메시지고 정보시스템이다"라는 측면에서의 공간에 배치된 기호들을 찾아내고 있다. 이를 크라우스 하인리히의 '신화'를 빌어 평양사회의 계통을 해석하고자 하며, 미셀 푸코의 '비평적 태도'에 기대어 평양이라는 낯선 도시 읽기에 희망의 빛을 찾아내고 있다.

결국 평양의 건축적 상황은 현실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탑의 시선축과, 김일성화를 김정일화와 결부 지은 맥락으로 살펴볼 때에서야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뒤이어 초상화와 포스터를 중심으로 서술한 필립 뭬제아의 글 '도시 선전'과도 문맥이 닿아있다. 체제 선전용 벽화와 포스터 그리고 기념비 건축물은 첫눈에 평양의 도시 연출 기법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드러나는 것에 대한 낯설음이 그 도시의 전체 모습은 아니다. 북한이 사회주의국가라는 것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바이고, 이 주체사상의 틀에서 벗어나기 힘든 체제이므로 필연적으로 사상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북한건축의 특수성을 분석하고 다른 사회주의국가의 보편성과 비교해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북한체제와 북한건축은 지역적·태생적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또한 아무리 통제적 사회라고 하더라도, 건축가의 창작적 의지가 내재되어 있음을 함께 읽어줘야 한다. 특히 북한의 도시 계획가와 건축가의 입장에서 사상적 문제는 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 드러나는 상징은 이미 표피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비평가로서의 건축가에게는 내면적 본질도 함께 읽어 줘야할 책무가 있다. 드러난 것에 대한 사상적 상징을 걷어주고, 프로페셔널의 눈으로 소통하여야 한다.

▲ 김일성 광장과 그 주변부 정경. ⓒ담디

마지막 부분에 김정일의 <건축예술론>에 대한 요약이 곁들여져 있다. 이 저작의 특징은 포스토펜의 말처럼 "건축의 사상적 차원을 숨김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어떻게 통치 엘리트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건축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포스토펜은 통치 엘리트의 건축적 장악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자의적 주관을 개입시켜 본문 내용을 굴절시키고 있다. 이 저작집에는 통치 엘리트뿐만 아니라 인민대중 중심의 건축을 요구하는 부분이 함께 서술되어 있다. 건축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반면에 건축이 독립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도 복무한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건축예술론>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 북한의 도시와 평양의 건축을 이해하는 데에는 2장과 3장의 해석으로만 충분하다. 1장과 4장은 북한 사회 일반적 체계를 건축분야에 적용한 내용이다.

이 책의 단순 소개에서 벗어나서, 북한 건축가들이 디자인적 프로세스에 이 텍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적용하고 변주하였는가 하는 점을 살피는 게 더 유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다. 비록 이 저작집이 강요된 텍스트이긴 하지만 적용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환경에서 맞추어 어떻게 전이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뒤따라야 비평가로서의 바른 안내라고 할 것이다.

<이제는 평양 건축>의 2장에 배치된 사진들은 너무 경이롭다. 자료의 양적, 질적 수준뿐만 아니라, 건축가만이 잡아낼 수 있는 시점(view- point)이기 때문이다. 평양의 도시계획과 건축물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담아낼 수 없는 사진들이다. 여러 번의 평양 방문의 성과가 켜켜이 축적되어 파노라마 형식으로 눈앞에 성큼 다가온 광경들은 실로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많은 평양 방문자들이 소개하고 있는 도시 경관과, 독일 건축가의 눈으로 조망한 도시와 건축물은 여러 의미에서 격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의 증언이다.

사진들은 도시 계획상의 축의 역할을 읽기 쉽게 배치하고, 거리 중심의 도시경관 구축의 특성을 잘 잡아내고 있다. 1장에 실린, 주체사상탑의 시점에서 보여주고 있는 도시의 레이어들은 도시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2장에 소개된 거리의 경관과 중첩되며 평양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사진들은 살림집을 비롯해 문화시설, 교육 및 스포츠시설, 호텔 및 백화점, 그리고 교통시설에서 기념비 건축물까지 방대하고 상세하다. 단순히 평양의 도시와 건축물을 이해하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북한과 평양을 연구하는 북한학 계열의 연구자들에게도 소중한 자료로 제공될 수 있을 것이라는데 이 사진자료들의 의미가 배가된다고 생각한다. 생동감 있는 사진이 현장성과 희소성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담디
ⓒ담디

다시, 평양 건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평양 건축을 읽는 방법은 건축사상적 차원과 도시건축의 디자인적 비평 차원으로 분리해서 접근하여야 한다. 두 가지 측면이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사상적 측면에서 곳곳에 배치된 상징성을 걷어내고 순수한 도시계획과 건축 차원의 평가와 비평이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건축학도들이라면 디자인적 접근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제는 평양 건축>을 비롯한 대부분의 북한건축에 관한 연구들이 체제 선전적 차원과 지도자의 사상이념적 차원에서 다루어져 있다. 특히 '혁명의 수도' 평양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거대 담론에 매몰되어 도시계획가나 건축가들이 의도한 물리적 환경에 대하여 소홀히 다룬 측면이 많다.

의도했든 아니든, 안창모교수의 글이 언론에 소개되는 것을 보고 환기되었다. 언론들은 그의 글 중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건축물들은 도시가 폭격을 당했을 때 건물이 밀집된 도시보다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사회주의 이념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쾌적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생각 이외에도 또다시 전쟁이 발생할 경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계획개념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라는 부분을 냉전적 사고로 과장해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인용구는 전체 글에서 비하여 극히 비중이 적고 가설에 지나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위한 배치기법'으로 왜곡되어 실린 것이다.

또한 북한건축에 대한 인상비평보다는 실체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북한인, 평양 시민이 아니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조형물과 선전문구, 색채와 스케일, 대형벽화 등이 첫인상으로 각인되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상 너머에 있는 건축적 진실의 실체, 건축가들의 설계 기법과 형성과정을 읽어 내야 한다.

특히 필립 뭬제아와 크리스천 포스토펜의 인상비평은 안내서라고 밝혔던 서문의 시선을 크게 벗어나고 있다. 통일거리의 살림집 개발을 보고 "루트비히 힐버자이머나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 디자인에 대한 과대망상적 환상을 벽돌과 회반죽으로 실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라는 비평에서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크리스천 포스토펜은 '김정일에 대한 폐쇄적 시스템'이라든가 '도시의 잠재력을 닫아'버렸다는 식의 비평을 쓰다가, '신화'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이후 비평의 여지를 닫아버리고 있다. 우리에겐 서구의 외부인들의 시선 끝에 놓여 있는 대상화된 평양이 아니라, 다양성을 전제하고 해석하는 가운데에서의 건축적 실체를 규명해내고자 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이 책의 내용적 면에서의 성과는 자료적 가치를 넘어 시각을 다양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서구적 시각으로 평양을 평가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분석 틀을 이용하여 설명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역설적으로 이런 점은 서구의 시선이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다.

우선 평양에서 지나간 근대 모더니즘적 도시의 전형을 발견해내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의 사회주의적 도시계획 이론과 건축적 시도의 흔적을 밝혀내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건축적 현상을 메타이론, 인식론, 철학을 동원해서 숙고하고 해석해내려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도식적인 결말을 잉태했지만, 나름의 해석학적 프리즘을 통과시켜 다각적인 스펙트럼으로 현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새롭다.

평양 건축을 롤랑 바르트와 크라우스 하인리히의 텍스트로 해석하고, 현상을 비평적 태도로 이해하려는 미셸 푸코적 시도는 적확성과 무관하게 비평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하는 학문적 태도와 더불어 인식의 틀의 다변화는 평양 건축을 새롭게 인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정된 정보의 독해능력의 배양이다. 북한 당국이 제공하는 공간(公刊) 문헌은 상투적이거나 진실의 실체에 접근하기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팩트'는 약하고 과장된 캡션이 따라붙기 다반사여서 연구자의 착시현상을 수반한다. 그나마도 직접 탐사도 어려워 정보의 접근성이 낮고 정보량도 극히 제한적이다.

뭬제아가 언급했듯 북한의 수도 평양 같은 경우 투르메니스탄의 아쉬가바트,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쿠바의 하바나, 에르트레아의 아스마라 등의 다른 유사국가들, 이른바 독재 독가들의 수도에 대한 출판에 비해 그 양이 크게 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출간이 무척 의미가 있다. 특히 건축가의 시선으로 채집된 자료들이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만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선행연구가 일천한 국내 전문가들은 그 행간을 읽어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정된 정보의 올바른 독해를 위해서는 포럼과 같은 장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해서 저자는 '이제는 평양 건축'이라고 선언한 게 아닐까?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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