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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종'의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프레시안 books]<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이세진 옮김, 사월의책 펴냄)의 저자 브뤼노 라투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하이브리드적인 인물이다. 우선 그는 과학사회학자이자, 과학인류학자이며 과학철학자이다. 현재 프랑스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인 시앙스포의 교수이면서 연구부 총장이기도 한 그는 그 곳에서 정치예술학교(School of Political Arts)를 설립하고 학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라투르는 또 2002년과 2005년에 각각 <충돌하는 이미지 : 과학, 종교 그리고 예술에서의 이미지 전쟁을 넘어서(Iconoclash : Beyond the Image Wars in Science, Religion and Art)>와 <사물을 공적으로 만들기 : 민주주의의 분위기(Making Things Public : The Atmospheres of Democracy>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공동 기획하고 같은 제목으로 책을 펴내기도 했다. 철학에서 인류학까지, 과학에서 예술까지, 학자에서 전시기획자까지 그의 삶과 경력만 보아도 "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에 관한 가장 도발적인 생각"을 가질 만한 인물로 손색이 없다.

라투르는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이라고 불리는 학문 분과에서 이미 잘 알려진 학자이고 최근에는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지리학 등의 분야에까지 그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아마도 과학기술에 관심이 있는 인문사회학자라면 그의 논문이나 책 중 한두 편 혹은 국내 과학기술학자들이 쓴 개론서를 통해서 그의 이론과 사상을 접해봤을 것이고, 과학기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나 연구자라면 그의 주요 저서들을 대부분 섭렵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를 과학기술학 분야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관련 분야의 학생이나 학자가 아니라면 라투르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 '과학기술학' 자체가 서구 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신생 학문인데다 국내에서는 그 인지도가 더욱 낮기 때문이다. (심지어 라투르조차 책에서 "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분야를 가르치고 있(19쪽)"다고 말한다.) 즉, 이 책은 당신이 이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에 따라서 아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음성은 끄고' 화면만 계속 틀어주는 것과 비슷하다(18쪽)." 이는 이 책이 라투르의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지루하고 도통 남는 게 없는 책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브뤼노 라투르 지음,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사월의책 펴냄). ⓒ사월의책

이 책은 저자인 라투르가 과학기술에 대한 극단적인 두 비전, "종말론과 눈부신 미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한 독일인 여학생에게 보내는 여섯 통의 이메일이라는 형식을 띤다. 이 이메일들은 저자가 가르치는 "과학인문학" 강의의 요약본이다. 저자는 '과학기술학'이나 '과학학(science studies)' 대신 '과학인문학'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인식론(epistemology)'에 입각한 전자의 명칭들이 과학과 사회의 분리를 바람직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문학'이라는 명칭을 선택한 것은 저자의 16세기에 대한 애정 탓이 크다. '괴물'이 넘쳐났던 16세기와 '하이브리드'가 도처에 널려 있는 21세기가 정말 닮아 있긴 하다. 저자의 상상력은 단지 400년의 시간만을 넘나드는 것이 아니다. 그가 책 전반에 걸쳐서 들고 있는 예들은 고대와 현대, 과학과 기술, 생물학과 물리학 등을 모두 아우른다. 아르키메데스와 갈릴레오, 데카르트, 다윈, 아인슈타인 등 과학사에서 낯익은 인물 그리고 경구피임약과 컬럼비아호 폭발 사고 등과 같이 잘 알려진 기술들도 등장하지만 최근 프랑스 신문에서 발췌한 기사, 교내 와이파이 문제로 컴퓨터를 쓸 수 없었던 자신의 경험, 자신이 주도하는 과학기술논쟁 지도 작성 웹사이트 등과 같이 현장감이 물씬 풍기는 사례들도 제시된다.

라투르의 기존 저작들에 익숙한 독자라면 책의 곳곳에서 그의 논문이나 책에서 본 적이 있는 개념과 논의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즉, 이 책은 분명 과학인문학(과학기술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인문학 개론서처럼 보이지만 '쉽게' 이해가 될 만한 글은 아니다. 물론 그 폭과 깊이가 넓고 깊기 때문에 상상하는 만큼 더욱 감탄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저자가 인용하는 다른 학자나 과학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미리 혹은 나중에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 역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책의 말미에 참고 문헌들을 포함시켜 둔 것이리라.

이 책이 담고 있는 여섯 통의 이메일 중에서 첫 번째에서 세 번째까지의 이메일은 주로 과학인문학의 주요 개념들을 설명하는 데에 할애된다. 아마도 과학기술학 전공자이거나 연구자라면 가장 유용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첫 번째 개념은 "번역"과 "구성"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일화가 보여주듯이 과학의 '자율성'은 "뒤늦은 임의적 분할(44쪽)"일 뿐이다. 과학은 '번역'되고 '우회'됨으로써 정치와 함께 '구성'된다. 우리가 '종말론'과 '눈부신 미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성급한 이유는 아직 아무도 '과학'이 무엇인지 분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개념은 "시험"과 "고장"이다. '번역'과 '구성'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시험'이고 그 중 가장 간단한 시험이 '고장'이다. 고장을 통해서, 기술은 단순한 것에서 다중적인 것, 기술적인 것에서 사회기술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개코원숭이와 인간의 차이가 '기술'의 존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문학에서 과학기술은 제외된다. 과학기술 없는 인문학은 개코원숭이의 인문학이라니!

세 번째 개념은 "논쟁"과 "기입"이다. 저자는 '담론'에서 출발하라고 말한다. "대중을 위한 신문 기사로부터 그 기사를 쓴 기자가 참조했던 좀 더 난해한 학술 문건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거슬러 올라가(99쪽)"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대화가 증명이 되고, 수사학은 진정한 과학이 된다. 여기에서 종이 위의 글자였던 과학이 공간과 물질이 되는데 그것이 '실험실'과 '도구'들이다. 도구가 생산하는 기입물-표와 그래프-은 "논증에 대한 의혹이 들 때에는 항상 눈으로 검토할 수 있(103쪽)"기에 과학의 구성에 있어 핵심이 된다.

사실 이상의 개념들보다 눈에 더 뜨이는 것은, 첫 번째 이메일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일지쓰기'라는 독특한 과학인문학 훈련 방식이다. 신문을 보다가 과학과 정치가 뒤섞여 있는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을 해두고 위의 개념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생각을 기록해 두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해볼 수도 있겠지만 과학기술학을 가르칠 기회가 있는 독자라면 시도해 볼 만하다.

네 번째 이메일은 '과학혁명'에 대한 이야기이자 '실험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학생들이 과학혁명의 거창한 이야기에 곧바로 빠져들지 않고 실험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이끌고 싶(137쪽)"다고 말한다. 실험실에서 '사물'들이 하는 말, 혹은 그것들에 대해서 '도구'들이 하는 '증언'은 표와 그래프라는 "독창적인 시각화 형식(138쪽)"으로 바뀌는데 이것이야 말로 가장 놀라운 발명이다. 이 장에서는 또한 자연을 '연장된 실체'에 가두어버린 데카르트를 향한 신랄한 비판이 이루어지는데 데카르트 이분법에 대한 기존 비판과는 사뭇 달라서 흥미롭다.

다섯 번째 이메일은 과학인문학으로 '그래서 뭘 하자는 거야(so what)?'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물질주의자(materialist) 라투르답게 그가 지향하는 기술민주주의에는 새로운 '도구'가 동원된다. 과학이 '다른 방식의 정치'인 것처럼 그의 정치는 '다른 방식의 과학'인 것이다. 여기서 그가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 유럽연합 차원의 프로젝트 '정치를 위한 과학기술의 논쟁 지도 작성(MACOPOL : mapping controversies in science and technology for politics)'이 새로운 플랫폼의 사례로 나와 눈길을 끈다. 유럽 곳곳에서 과학기술의 논쟁 지도를 작성하는 수업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기술민주주의 시민을 양성하는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끝으로 마지막 이메일에서 저자는 다시 한 번 "과학인문학이 그리는 하이브리드 세계"가 '유니버스(universe)'가 아닌 '멀티버스(multiverse)'임을 주장한다. 사실 여섯 번째 이메일은 '반과학주의자'로서의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저자의 노력으로도 보이는데, 이것은 한국에서 라투르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라투르가 '백남준 국제예술상'을 받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자리에서 한 한국 학자가 그를 과학 친화적이라고 평가하자 놀라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라투르는 "과학자들이 기계론자, 유물론자, 자연주의자가 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과학자들이 마침내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232쪽)"라고 말하며 과학자들이 "지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강조한다. 자연에 기댄 정치가 아니라 이제 정치에 기댄 자연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과학의 타락처럼 들린다면 그것은 과학과 정치가 분리된 것인 양 떠드는 근대화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너무 자주 들은 탓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가서는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되기를 포기한 학생들에게 과학인문학 강의를 해서 그들의 "실증적 앎이 어울릴 법한 소명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싶(233쪽)"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의 고백은 이 책을 이공계 학생이나 과학자, 엔지니어에게 권하고 싶은 욕구를 더욱 부추긴다.

이 방대하고도 심오한 책의 내용을 모두 뒤로 하고,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전사'의 자세를 버리라는 조언에 있지 않나 싶다. 종말론과 눈부신 미래에 대한 꿈이 공존하는 시대, 극단적인 반과학주의와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충돌하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이 주는 답은 다음과 같다.

"너무 성급하게 어느 편에 서지 않으면서 이 모순, 이 이중의 담론을 검토 대상으로 삼읍시다. 느긋하게. 진득하게." (25쪽)

라투르는 또 이렇게도 표현한다. "'합리성'과 '비합리성' 전투에서 태어난 옛 전사 커플은 논쟁과 분노에 너무 찌들었기에 우리에게 이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들을 지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학인문학은 그 길들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117쪽)"라고. 이 책은 '하이브리드'를 위한 책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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