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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에서 철탑까지…'촛불 세대'는 이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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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에서 철탑까지…'촛불 세대'는 이해할까?

[프레시안 books] 이근원의 <아빠의 현대사>

'현대사'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글쎄, '당대사' 정도가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1980년 '광주'에서 20대의 젊은 삶을 시작하여 지금은 '철탑'을 바라보고 있는 50대의 한 중년 활동가가 기록한 자기 시대 역사의 기록, 그것이 <아빠의 현대사>(이근원 지음, 이은지 그림, 레디앙 펴냄)의 내용이다. 돌이켜 보면 이제 50대 막바지에 이른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세대의 모두가 거기(광주)에서 시작해서 여기(철탑 앞)에 서 있다.

박정희와 싸우고, 전두환·노태우·김영삼과 싸우고, 김대중과 싸우고, 노무현과 싸우고, 이명박과 싸우고, 그리고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진보정당들과도 싸우고, 드디어는 다시금 박근혜와 또 싸워야 하는 이 길고 지겨운 싸움의 끝자락에 서있는 세대, 그것이 우리다.

▲ <아빠의 현대사>(이근원 지음, 이은지 그림, 레디앙 펴냄). ⓒ레디앙
우리 세대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싸움의 그 어느 대목들마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싸우다 죽어 떠난 자들도 있고, 싸움에 지쳐 조용히 사라진 사람들도 있고, 혹은 맞서 싸우던 그쪽으로 투항하여 이 싸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그 모두의 시작은 '광주'였으나, 그 끝은 더 이상 '철탑'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빠의 현대사>는 이 세대에 대한 기록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촛불 세대'에게 말을 건네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내가 짐작하건데 '촛불 세대'는 이 이야기를 다 읽지 못할 것이다. 읽는다 해도 그들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기대해서도 안 될 것이다.

각 세대 집단(cohort group)은 서로 다른 경험과 그 경험에서 만들어진 세계관을 가지고 산다. 강물이 흐른다. 밖에서 보면 하나의 강물을 이루어 바다로 가지만, 강의 앞 물결과 뒤 물결은 서로 다르다. 자기가 흘러온 역사를 기억하는 앞 물결이 뒤 물결을 향해 말을 건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뒤 물결은 앞 물결이 흘러간 자리를 거쳐 흐르며 그것이 남긴 자취를 스스로 바라보고, 스스로 이해할 것이다. 다 흐르고 흘러 드디어 바다에서 만나면 비로소 거기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역사다.

이근원이 쓰고, 그의 딸 은지가 그림을 그렸다. 나는 이근원의 이야기를 거의 대부분 안다. 그가 직접 겪었던 만큼 세세히 알 수야 물론 없지만, 어느 대목은 그보다 내가 더 아는 것들이 있는 듯하고, 또 어느 대목들에서는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많이 다르기도 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물결을 이루어 서로 다른 위치에서 함께 흘러 왔음은 너무도 분명했다. 지금 서 있는 곳도 같다고 느끼고 있다.

지난 5월 1일 메이데이에 나는 부러 서울을 떠나 울산으로 갔다. 울산의 메이데이 행사는 전날 미리 치러져 지역 집회는 없었으나 그곳의 활동가들을 만나고 함께 '철탑'으로 갔다. 그래, 바람 불고 스산했던 그 자리에, 이근원이 그렇게 말하고 말하던 우리의 노동은 그렇게 높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내가 보고 또 보면서 이해하려 애썼던 것은 이근원의 그 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락마다 그의 딸 은지가 그림을 그려 넣고, 거기에 간단한 말을 붙였다. 처음에는 마치 암호와도 같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499쪽의 이 책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이 그림들을 '독해'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은지야, 너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야?

첫 그림에 붙인 은지의 말은 이렇다. "아빠와 촛불 집회를 처음 갔을 때, 많은 사람들과 많은 불꽃, 그 어떤 때보다 조용했던 순간이었다." 두 번째 그림말은 이렇다. "감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외로운 무덤을 생각했다. 얇은 잎사귀들이 가득 메워진…." 세 번째 그림말은 이렇다. "허리 수그린 채 숲에 갇힌 사람, 글에서는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모습과 어떤 강박증…." 이런 글말도 있다. "땅만 보고 걷는 개미핥기를 예전에 그렸던 적이 있다. 구부러진 허리와 애처로운 두 눈이 가엾다."

마지막 그림말은 좀 길다.

"우주 먼지가 되어버리고 싶다. 지구에는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나에게 죄책감을 주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오르내리며 구걸하는 사람들을 본다. 저 구석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심지어 신문지도 없다. 그 굼벵이와도 같은 모습이 나에게 어떤 큰 짐을 준다. 내가 아무런 구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외면했을 때 나 역시 동정심이 없는 걸까? 하는 물음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나는 때때로 그런 상황을 참을 수 없어서, 차라리 우주로 떠나 버리고 싶다."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다. 싸우고 싸워 온 우리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한 평생 후회 없이 싸우다 간다"는 비장한 심정으로 청춘을 모두 전장에 바친 늙은 투사들, 그런데 문득 그 싸움의 장이 로마의 원형경기장이 되고, 늙은 전사들은 그 속의 검투사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

세월이 흘러 경기장의 관중은 바뀌고 바뀌어 이제는 그 싸움에 더 이상 열광하지 않고, 역전노장의 늙은 검투사들을 불쌍하게 바라보며 경기장을 허물고 넓은 들판으로 그들을 해방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황. 돌고래는 재주를 부릴 것이 아니라 넓은 바다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황. 은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은지보다 몇 살 많은 내 딸 자은이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 얻으려 했던 것들이, 어느덧 우리 자식 세대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출발점이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고 싸웠는데, 그들은 이미 평등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고 있는지 모른다. 아직도 불평등하고, 더 불평등해지고 있다고 말하고 싸우고 있는데, 그들은 "그런데 왜 거기서 그렇게 싸우고 있어요?"라고 묻고 있는지 모른다. 일하는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달라고 소리치고 있는데, 그들은 "그런데 왜 거기서 그렇게 일하고 싶어해요?"라고 묻고 있는지 모른다.

'광주'가 우리의 출발점이었으나 이제 그것이 우리의 질곡이기도 한 상황, '철탑' 앞에 섰으나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족쇄이기도 한 상황, 평생을 전선에서 적과 마주하였으나 이제 '우리 안의 적'이 우리를 파열시키기에 이른 상황, 이 상황을 다시 '돌파'해야 한다고 몸을 추스르는 늙은 투사들과 "수고했어요. 이제 그곳을 떠나세요. 다르게 살 수 있는 더 넓고 새로운 세상이 있을 겁니다"라고 속삭이는 그들의 딸들.

세대마다 그들의 몫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 세대가 우리의 몫을 다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운명이다. 누구는 낙관으로 이 길을 가고, 누구는 비관하면서도 이 길을 간다. 이근원과 또 다른 많은 이근원과 같은 낙관주의자들은 실패와 좌절과 회의와 배신감을 떨쳐내며 그 길을 걷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광주에서 시작된 그의 발걸음이 철탑에 이르렀고, 그는 다시 철탑을 지나 더 나아갈 것이다. 그 고단한 행로의 다음은? 그건 다음 세대의 몫이다. 은지들이 그들이 살아야 할 세상을 어떻게 그려갈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방식이 답이 아닐지도 모름을 인정해야 할 듯하다. 그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우리보다 더 근본적(radical)인 방식으로, 새 그림을 그려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지만, 우리가 그 그림을 그려 줄 수는 없다. 우리가 남긴 그림자도 그들이 지울 수 있기를. 앞 물결이 흐린 강물을 뒤 물결이 씻어 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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