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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세탁'밖에 몰랐다고? 미술계는 '동물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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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세탁'밖에 몰랐다고? 미술계는 '동물의 왕국'!

[프레시안 books] 스티브 마틴의 <레이시 이야기>

어쨌거나 현대 미술계가 폐쇄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가시적 현실의 재현이라는 숙제를 끝마친 미술은 모더니즘의 깃발 아래에서 그 자유를 만끽하며 왕성하게 번식했다. 그리고 그 번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손기술이나 영험한 예술적 자아라기보다는 시지각을 이용한 두뇌 놀이인 셈이었다. 그러므로 꽤 복잡한 배경 지식과 논리를 필요로 한다. 현재 한국의 일반적인 고등 교육을 떠올려 보면,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방법은 정규 교육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혹자는 여기에 '예술'은 감상자가 느끼는 대로 정의가 가능하다고 반문할지도 모르고, 실제로 교육과 경험으로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현대 미술이 축척해 온 가시적 세계의 비가시적 논리는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대 미술계를 폐쇄적으로 만드는 좀 더 본질적이고 간단한 이유는 바로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가격의 재화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백 억 원에 달하는 전설 속의 명작들 뿐 아니라, 우리가 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미술 작품은 한국 가정의 평균 월수입을 가뿐하게 뛰어 넘는다. 오로지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혹은 시세 차익을 노리기 위해 그 정도의 돈을 투자할 수 있는 계층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사회에서 '선택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 돈과 지식이 결부되어 있다 보니 현대 미술은 어느새 저 멀리에 혼자 존재하는 어떤 것이 되었다.

위에 언급한 조건이 계급적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예민한 것이다 보니, 현대 미술에 대한 사람들의 '이상한 불만'도 생겨나는 듯하다. 직관적인 이해가 불가한 작품 앞에서 관객은 자신이 가진 배경 지식을 총동원해 작품을 이해해보려고 하다가 이내, '취미 판단은 미감적'이라는 칸트의 아포리즘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자위하곤 한다. 그리고 그 작품의 가격을 알게 됨과 동시에 마음속 셔터를 내리고,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의 어떤 부분으로 현대 미술을 단정 짓곤 한다. 그러다 낸시 랭 등의 요상한 '예술'이 모니터 앞에 나타나면 댓글로 심술을 부리기도 하고, 실제로 예산을 집행하는 정부 기관의 공무원들은 "지역 사회 발전"이나 "대중과의 호흡"을 핑계 삼아 현대 미술가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에 비해 서구의 대도시에서 현대 미술에 대한 관용도는 조금 더 높은 것 같다. 예술가 앞에 쳐진 시펀 커튼의 종류가 다르다고 할까. 굳이 마르셀 뒤샹의 혁명적인 작품이나 앤디 워홀의 묘하고 가벼운 태도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현대 미술 전시에 노출된 생활을 당연하게 살아가는 대도시의 사람들에게 그 방법론이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큰 미술관을 빌려놓고 아르바이트를 고용해서 관객에게 말을 건다거나, 전시장 안에 그야말로 평범한 돌덩이를 갖다놓는다고 해도 "현대 미술이란 원래 이런 거야. (싱겁고 덧없지…)"라는 맥락으로 수용되는 듯하다. 물론 돈과 지식이라는 조건과 얽힌 여러 설왕설래는 늘 함께 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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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시 이야기>(스티브 마틴 지음, 이재경 옮김, 홍시 펴냄). ⓒ홍시
<레이시 이야기>(스티브 마틴 지음, 이재경 옮김, 홍시 펴냄)는 바로 이런 폐쇄적이고 쉽게 형체가 드러나지 않는 서구의 미술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는 레이시의 가장 친한 이성친구이자 빛바랜 성적 긴장으로 그녀와 별다른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은 '고자화'된 남성 내레이터를 배치한다. 이러한 방식은 <위대한 개츠비>(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민음사 펴냄)를 비롯한 수많은 서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기존의 굳건한 질서 속에 잠입하여 그 속에서 원하는 것을 거머쥐기 위해 갈등하는 주인공을 관찰하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그럼으로써 독자는 주인공과 적당한 거리감을 얻을 수 있고, 서사 속에 묘사된 실재 세계의 한 부분은 가상의 인물들이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토양으로 쉽게 테라포밍(Terraforming)된다.

앞서 말한 폐쇄적인 미술계의 특성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들만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 미술 시장은 그 가치를 쉽게 매기기 힘든 '작품'을 만드는 미술가와 그 '작품'을 기꺼이 엄청난 가격에 구입해주는 콜렉터, 그리고 미술가와 콜렉터 간 모종의 거래에 지적 논리를 부여해주는 시장 친화적인 평론가와 매체가 세 꼭짓점을 이루는 삼각형과 닮았다. 그 안에서 가격과 의미, 즉, 돈과 지식이 생겨나는 봉이 김선달식 방식은, 외부의 세계를 열심히 참조하지만 참조점이 드러날수록 그 영업 비밀을 공개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감상자로서 그 연결 지점을 집어내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수많은 갱스터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외부에 그 행적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 내부자들끼리만 공유하는 질서, 외부의 경제 법칙과는 상이한 점 등으로 인해 미술계는 갱스터와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고전적인 유사 갱스터 서사가 성취해 왔던 음험한 비극의 광경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전반부에서 잔뜩 날이 선 묘사와 냉소적인 유머로 소더비와 업타운 갤러리 주변의 풍경을 자신 있게 파헤치던 필치는, 후반부에 이르며 면밀함을 잃는다. 마치 자신이 소설에서 창조해 낸 콜렉터나 현대 미술은 어떻게 팔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탄하던 딜러처럼, 작가 역시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고 단지 새롭기만 한 것에 대해 '새로워봤자 별 거 없을 것'이라는 안일한 태도를 유지한다.

대부분의 갱스터 영화는 두 가지 재미의 축을 갖고 있다. 한참 커리어를 쌓아가며 경쟁자를 축출하고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발랄한 속도감과 정상에 오른 이후 서서히 추락하며 새로운 세계의 질서에 의해 축출당하기까지의 안타깝고 아스라한 백일몽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대한 비극은 만화경 같은 배경이 홀로그램처럼 '짱짱하게' 묘사되지 않으면 쉽게 생명력을 잃는다. 이 소설에서라면 19세기 미국 회화를 모으던 촌뜨기 콜렉터와 업타운의 딜러들이 앤디 워홀과 힙스터 미술가를 거쳐 결국 중국 미술과 함께 파멸을 맞이하는 약 20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과정이 아스라하게 추적되어야 하는데, 그 환락과 거품의 현장이 묘사되는 방식은 그것이 아우르는 각 시대에 따라 밀도가 꽤 큰 폭으로 흔들린다.

그러므로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이 있었던 2008년까지 이르면, 전반부에서 그렇게 활달하게 온 맨해튼을 쑤시고 다녔던 '욕망 아가씨' 레이시는 주욱 달려온 관성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캐릭터가 되고 만다. 마치 유비, 관우, 장비가 모두 죽은 삼국지처럼, 혹은 지루한 바둑 대국의 끝내기처럼 소설로서의 남은 절차를 마무리하는 과정일 뿐으로 싱겁기 그지없다. 게다가 전형적 '비치(Bitch)'로서 갤러리스트 레이시가 갖는 태생적 매력의 한계도 존재한다. 그녀의 젊음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데엔 유리할지 몰라도, 갱스터 영화 주인공의 교활한 책략이나 하드보일드 탐정들의 직진성처럼 사건의 얼개와 포개진 자기장을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섹스에 임하는 레이시의 모습이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든가 콜렉터와 벌이는 '밀당'의 흔적이 싱겁다든가 하는 것은 그녀의 성품이 능동적인 주인공으로서 이 백일몽의 서사를 좌지우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좋은 서사라고 하기에는 몇 가지 단점을 떠안게 된다. 중간에 벌어지는 자그마한 미스터리는 차라리 생략했어도 좋을 정도로 싱겁다. 특히 비극적 아스라함을 자아내기 위해 마치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처럼 준비한 '할머니가 물려주신 미국 근대 회화'는 슬프기까지 하다. 시대적 배경에 대한 묘사가 무너져 버린 시점에 그 아스라한 느낌이 잘 살아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 그림이 맥거핀으로서 레이시의 야망을 함축적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아마도 뉴욕의 문화계에서 오랫동안 잔뼈가 굵었던 중년 백인 셀러브리티 작가 스티브 마틴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관점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뱅크시를 연상하게 하는 '파일럿 마우스'의 인디 락스타적 활동은 컨트리 음악으로 그래미를 받은 중년 백인 '보수 리버럴' 셀러브리티에게는 족보 없는 어떤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소설의 전반부 묘사들이 콜렉터로서의 자신의 미술적 지식을 은근히 드러내며 세심하게 구성된 것에 반해, 중반 이후부터 대표적인 힙스터 예술가로 등장하는 자의 이름이 고작 '파일럿 마우스'인 것은, 마치 회사 야유회에 반바지와 정장 양말을 동시에 입고 참석한 부장님을 보는 것 같은 '민망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 배우, 코미디언으로도 잘 알려진 <레이시 이야기>의 작가 스티브 마틴. ⓒen.wikipedia.org
그러나 순전히 작가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는 것은, 요즘의 미술계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세계 전쟁과 겹쳐진 모더니즘의 세상에서 미술가들은 세계 전쟁이 끝난 뒤의 포스트모던한 세상까지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며 기존의 미학을 흔들고 경매 가격을 경신해왔다. 그러나 더 이상 무엇이 있을까?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두 차례의 사건이 뉴욕을 휩쓸었다. 9.11 사태 이후에는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중국 미술을 끌어들여 한 몫 잡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함께 더 이상 미술계는 새로운 작가가 등장하여 새로운 미학적 성과를 누리거나 거액의 거래는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미술계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야망에 넘치는 젊은이가 자발적으로 사자우리에 들어가 먹이사슬의 위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서사는 미술계뿐만 아니라 어디든지 통용되는 스릴 넘치는 '동물의 왕국'형 서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이애미 아트페어의 파티 장면 등, 작가가 정확히 경험했던 것을 묘사할 때는 베테랑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의 재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미술계를 둘러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완벽한 캐릭터로 재현해 저녁 식사에 초대한 듯 묘사하는 대목은 마치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처럼 실없는 웃음을 터지게 한다. 돼지 같은 콜렉터와 이미 미라가 되었음직한 미술가, 미술 작품의 미학적 의미를 교조적으로 파헤치는 데 경도된 유사 평론가, 어떻게든 사람들 눈에 띄어 인맥을 넓히려는 시끄러운 신출내기 딜러 아가씨 등이 모인 자리는 작가가 오랫동안 미술계를 드나들며 꾸준히 관찰해 온 것을 풀어낸 부분이다.

게다가 미술 시장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걷어내기 위한 입문서적으로 이 소설은 꽤 괜찮은 성과를 갖고 있기도 하다. 특히 한국에서 미술 시장에 대한 관심이 신문의 문화면보다 사회면에 치중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미술계를 굴리는 돈은 모조리 뒤가 구린 검은 돈일 거라는 몹쓸 편견도 이해는 간다. 실제로 그동안 고가의 미술품을 돈세탁의 도구로 이용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하지만 미술계를 굴러가게끔 하는 동력이 그렇게 질 낮은 파렴치 범죄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계에 편견을 가진 독자라면 일단 마음을 좀 풀고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이 괴상한 세상의 한 구석을 좀 더 정확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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