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향료 전쟁>(가일스 밀턴 지음, 손원재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이란 책을 통해 이슬람 상인과 유럽인들을 사로잡았던, 그래서 전후에도 네덜란드가 그토록 내놓기 싫어했던 향료 섬(Spice Islands)의 역사와 매력에 현재는 푹 빠져있는 중이다. 심심하면 구글어스(google earth)를 통해 위성사진도 보고 줌을 당겨 화산과 옛 도시의 흔적들도 구경하고 전 세계 네티즌들이 모아 준 사진을 통해 그곳의 경관과 삶의 형태를 상상해 보곤 한다.
나름 지리학도의 관심에 따라 동서로 넓게 훑고 있는데, 여전히 낯선 곳이 있다. 바로 인도네시아 영토의 가장 동쪽에 자리한 파푸아 섬(앞으로 칭하게 될 뉴기니 섬과 같은 곳이다)이 그렇다. 조만간 현지 조사를 통해 7월 중순 이 섬에 발을 딛게 될 기회를 얻었지만 여전히 미지의 땅이다. 아세안의 대국으로 부상 중인 인도네시아 영토의 일부이니 그 섬의 반쪽은 통상 아시아로 구분되지만, 인종적인 측면에서도 말레이 아시안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외양을 지닌 원주민 부족의 땅이다. 조만간 이 곳을 갈 예정이라 하니, 그나마 지역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 중엔 식인 풍습과 '꼬데까(고깔모양의 남성용 성기 가리개)'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전형화 된 이미지가 보여주듯, 이 섬에는 근대 국가들이 그어놓은 국경 체계와는 관계없이 전통 사회의 원형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부족 사회가 상당수 남아있는 '어제의 공간'이다.
뉴기니 섬(혹은 파푸아 섬)은 그린란드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아시아와 호주 대륙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가 그러하듯, 자를 대고 그어놓은 듯 매끈한 세로 방향의 국경선이 섬을 동서로 나눠 각각의 나라로 구분한다. 섬의 서편은 오랫동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분리 독립을 원했으나, 1969년 이래로 인도네시아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현재는 서파푸아(West Papua)로 불린다. 동편으로 뻗어나가는 광활한 영토와 태평양에 점점이 흩뿌려진 부속 섬들은 파푸아 뉴기니라는 또 다른 국가이다. 이 나라도 한 때 남북으로 절반씩 잘려서 독일과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통치를 받았고, 1975년에야 영토와 국민과 주권을 지닌 하나의 독립 국가로 세계사에 등장하였다.
| ▲ <어제까지의 세계>(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김영사 펴냄). ⓒ김영사 |
26살에 뉴기니 섬에 첫 발을 디뎠던 다이아몬드 교수는 지난 50년 동안 이 섬에서 그가 직접 만났던 여러 부족들과 북미 부족집단들 그리고 다른 인류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소개된 세계 각지의 부족 사회를 '어제까지 인간 세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주는 창문'이라 말하면서, 이 책을 통해 전통 속에서 현대 사회의 여러 결함과 문제들을 치료 혹은 보완할 대안과 해답들을 배워보자고 청하고 있다.
이 책이 주목하는 !쿵 족이 사는 칼리하리 사막, 피그미족이 살아가는 아프리카 적도 열대우림,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남겨진 아마존강 유역의 오지, 뉴기니 사람들에게 남겨진 뉴기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14세기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이래로 점차 성립되어 온 근대 국가의 눈으로 봤을 때, 우선 접근하기도 어렵거니와 독충이나 맹수들의 서식처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투자할 만한 '천연 자원'도 마땅치 않아 근대인들이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지역들'이었다.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소위 농경사회 이전 혹은 그 과도기 어디쯤의 인류의 원형적 삶의 형태가 오늘날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으리라.
굳이 이런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제안하는 이 노교수가, 고립된 부족 사회에 매혹당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짚어야겠다. 섣부른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이 책이 포괄하는 지역의 너비만큼 시간 스케일도 인류의 역사를 좇아 과거로 연장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이 주목하는 부족 사회 구성원들의 삶은 기원전 9000년 경, 그러니까 인류사에 농경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석기 시대를 살아가는 수렵채집 사회가 우세했던 시대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참 많다. 외부와의 접촉 이후 변화를 인정하더라도, 이들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눈요기가 되어줄 만큼 -예컨대 <정글의 법칙>의 촬영 배경으로 할 만한– 확실히 딴 세상(exotic place) 같다.
오늘이란 동 시간에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숨 쉬고 있지만, 이들이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전통 부족의 삶이란 현생인류가 침팬지로부터의 진화적 분화가 시작된 이래로 거의 600만 년 간 지속된 삶의 방식에 더 가깝다. 변화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 전통 사회는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공통적으로 발현되는 인간 사회의 구성 원리 및 구성 방법을 둘러싼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는 실험 속에서 서서히 변화하고 적응해 온 공간이라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은 600만 년 동안 전통 사회가 인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 상태에서 고안한 방법들을 현대 사회가 봉착한 갖은 위기 –지속되는 분쟁, 양육의 문제, 소외된 채 늙어가는 점점 많아지고 있는 노인의 문제, 각종 현대병의 문제 등– 와 바로 그 위기의 시대 종교의 존재 이유와 빠른 속도로 소멸해 가는 언어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거울로 보자는 것이다.
어떤 평론가는 이 책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다이아몬드 교수의 입장을 '실용주의'로 평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 책의 어조는 과거와 전통을 낭만화하기 보다는 조금은 건조한 학적 언어로, 그렇지만 설득력 있게 자신이 인상 깊게 여겼던 전통 사회의 문제 해결법을 '선별적'으로 우리의 현재에 대입해 보자고 제안한다. 두꺼운 본문 속에서 다이아몬드 교수가 제일 먼저 추천하는 한 사례를 통해 전통 사회의 문제 해결 과정을 살펴보자.
파푸아 뉴기니에서 말로라는 한 젊은 운전수가 빌리라는 어린 학생을 차로 치어 숨지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사고 후 운전수 말로는 차에서 내려 사고를 수습하는 대신 그길로 경찰서로 자동차를 몰고 가 자수를 했고, 경찰은 말로가 죽은 아이들의 친척과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안전하게 마을까지 데려다 주었으며, 그 후 말로는 서너 달 동안 마을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원인은 사고 낸 운전수와 죽은 학생의 종족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말로가 그 자리에 머물렀다면 운전자 뿐 아니라 동승자까지도 죽은 아이의 종족에게 그 자리에서 맞아 죽을 가능성이 컸다고 한다. 그들의 전통적 사고방식 속에선 한 부족의 구성원이 다른 부족의 구성원에게 죽음을 당하면, 같은 방식으로 보복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죽은 이의 혼령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고, 만약 복수가 없다면 그 혼령은 떠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협상에 먼저 나선 사람은 운전수 말로가 다니는 회사의 관리자와 빌리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실제 협상은 단순한 물질적 보상을 넘어 일종의 공동체적 의례를 주문했다. 회사는 관리자 외에 또 다른 연장자로 하여금 빌리 가족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원로들과의 또 다른 협상을 해야만 했다. 협상 결과 회사는 의식과 장례 음식을 준비하고 빌리 가족을 위한 보상금을 준비해야 했으며, 장례식은 양쪽 공동체의 조사를 포함한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사고의 원인이 자동차이고, 운전수는 경제활동을 하는 회사의 구성원이고, 더군다나 경찰까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 국가 혹은 지방정부 수준의 행정력도 있고 법률 체계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국가법에 따른 재판은 사건 발생 후 2년 반이 지나서야 진행되었으며, 오히려 실질의 문제 해결은 전통 부족 사회의 관습법의 방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과정은 분쟁의 평화롭고 신속한 해결(단 5일 만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자리에서 서로를 용서하고 음식을 나눠먹었다.)뿐 아니라 양쪽의 감정까지 화해시켜 관계를 회복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대부분의 현대 국가의 사법체제가 사인 간의 분쟁 발생 시 시비를 가리거나 피해를 다루는데 집중한 나머지, 분쟁 당사자 간의 악감정의 해소와 화해는 부차적 문제 혹은 소송의 쟁점과는 무관한 문제로 여긴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결함으로 지목되곤 한다. 분쟁 당사자들이 재판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인구 규모가 작은 비국가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는 치명적이다. 이들은 분쟁 이후에도 계속 면 대 면 관계를 유지하거나 근거리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사회적 관계망이 계속 유지되도록 감정까지 회복하는 것이 분쟁 해결의 과정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가진 미덕은 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상당히 다수의 지역에서 직접 겪은 현지조사와 방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여러 사례들을 짜임새 있게 배열하여 의미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이 노학자의 또 다른 미덕은 치우침이 없이 사례들이 스스로 말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는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의 사례에 뒤이어 그는 전통 사회에서 분쟁이 해결되지 않은 채 인구 비율 상 현대전만큼이나 소모적이고 반복적인 복수의 연쇄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소개한다. 소규모 사회의 분쟁 해결 방법은 양날의 칼처럼 한 편에선 동경할 만한 평화적인 협상이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폭력과 전쟁으로 폭주하는 경향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종족 간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과 전쟁을 지도하거나 휴전이나 종전의 결정을 내릴만한 권위가 지도자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현대전에 비해 사상자의 비중의 측면에서 더 참혹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후자의 분쟁의 경우를 생각할 때, 국가라는 기구가 지닌 통치성이 지닌 내재적 강점은 익명성을 특성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서 안정을 유지하는 유용한 장치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근대적 국가는 평화를 유지하는 수월성에서 비국가 사회보다 더 나은 점도 있다는 것이다.
다이이몬드 교수의 대표적 연구 지역인 뉴기니의 고원지대의 부족 사회는 1931년에야 처음으로 외부인들과의 '접촉'이 있었고, 그 세계에서도 어떤 변화는 물론 시작되었다. 그 세계의 일부는, 예컨대 책의 처음과 끝 장면에 등장하는 공항과 같은 곳은 거의 현대 사회의 질서와 생활양식이 통용되는 공간이 되어있다. 그러함에도 저자의 주장처럼 "어제의 세계가 지워지고 오늘의 새로운 세계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대부분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기에" 우리는 어제의 세계를 통해 오늘과 내일의 과제를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수 십 명에서 기껏해야 10~20만 명을 넘지 않은 부족 사회의 생활양식이 얼마만큼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저자가 준비한 대답도 있다. 그는 또 다른 사회과학자 조지프 헨리히 등을 인용하여 인간 심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야 말로 "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and democratic)"한 사회 구성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 도처에 남아 있는 전통 사회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 구조에 접근하려는 것이 훨씬 더 문화적 다양성의 기준에 부합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0대 중반 한참동안 대안 교육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 내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 중 하나가 '대안은 단수형인가 복수형인가'라는 문제였다. 마흔 고개 언저리의 지금에야 당연히 대안은 복수형이고, 진행형이고, 시행착오가 따르는 실험인 것이 당연하다 여기지만 그 때에는 이름값에 걸맞지 않게(?) 좁은 틈새에서 아웅다웅하는 대안 교육 판에서 내가 바란 대안을 찾기란 난망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꿈꾸었던 대안은 실현 가능하기도 하고 희망적이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까지 있기를 바라는 그런 수준의 구체적 추상이었을 듯하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전통 사회의 지혜와 대안 역시 그러할 것이다.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성이 차지 않겠으나, 오늘의 자리에서 묵묵한 다른 실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울림이 있을, 그런 대안들이 9가지 주제로 잘 정리되어 있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환경결정론적 시각은 좀 불편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러함에도 유럽이 확장되던 시기 근대를 곧 진보로 삼았던 이들이 종종 범했던 인종과 지적 능력과 생물학적 차이에서 발전의 여부를 따졌던 사회진화론적 시각과 비교하자면 훨씬 유연하고 설득력이 있다. 75세 할아버지의 글이라고 하기엔 꼿꼿하고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소개되는 수많은 사례들이 설득력 있게 잘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석학 다이아몬드 교수의 '문명 연구의 대 완결판'이라는 수사는 당장의 큰 비법을 전해 줄 듯 하지만, 이 책은 앞서 말했듯 전통의 교훈을 설득력 있게 제언하는 것에 더 큰 목적이 있는 듯하다.
고난도 독해력을 요하는 영어 원서를 읽기 쉬운 우리말로 잘 옮겨준 번역자 덕분일 수도 있겠다. 다이아몬드 교수가 보여주려 했던 지구상의 다양한 문화의 존재를 우리말로 잘 옮겨 준 번역자 강주헌 선생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며 미욱한 서평의 끝을 맺는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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