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시안 books'는 창간 3주년을 맞아 '번역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열두 명의 번역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억에 남는 자신의 번역서 한 권을 골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편집자> |
나는 마흔이 넘어 1996년에서야 직업번역가로 데뷔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도 몇 년이 흐른 다음이었다. 그 전에 프리드리히 실러 작품 몇 권을 번역했지만 개인적으로 학술작업의 일환으로만 여겼었다.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독일 작가의 희곡작품에 대해 학위논문을 썼는데, 원작이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논문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느꼈다. 정직한 학자라면 자기가 전공한 작가의 작품도 함께 국내 독자에게 알리는 것이 의무라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어쨌든 그래서 직업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이 실러의 몇몇 작품을 번역하고 출판했던 것이다.
학위를 마친 다음 나의 전공 영역과 국내의 지적인 풍토 사이의 엄청난 괴리가 눈에 들어왔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지적으로 고립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그 괴리를 메우는 작업을 해야 할 판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대학의 강사라는 직업이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고 또 생계를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라서 뒤늦게 본격적으로 직업번역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소개하면서 이 일을 시작했고, 처음부터 곧바로 비교적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토요일에 나오는 주요 일간지의 신간안내가 그럭저럭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였다.
| ▲ <히틀러 평전>(요아힘 페스트 지음, 안인희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
나로서는 전혀 생각도 못하던 분야의 책이었다. 문학 전공인 나는 히틀러에 대해 당시 다른 한국 사람들만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히틀러라는 이름과 유대인 학살 등 몇 가지만 빼고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내게 이런 엄청난 분량의 책을 번역하라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다만 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1년 동안 다달이 월급처럼 번역료를 지급하고 게다가 적지만 약간의 인세까지 붙이는 조건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책들로 가혹한 한국 출판계의 현실을 경험한 내게는 정말 은혜롭게 여겨지는 조건이었다. 덕분에 지금도 나는 김학원 사장을 좋아한다.
1년 동안 대학 강의 빼고는 거의 번역 작업에 매달렸다. 책이 커서 작업이 고단했다. 작업 중간 중간에, 그리고 전체 번역이 한 번 끝나고 나면 전체 내용을 다시 검토해야 하는데 책이 크고 어려우면 뒷부분을 읽을 때 앞부분의 내용이 가물가물해진다. 책의 앞뒤 내용을 철저히 검토하고 용어 등을 통일하는 것은 번역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책이 커질수록 이 작업이 만만치가 않다.
그럭저럭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출판사에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독일의 저작권 출판사와의 계약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이전시에서 거의 1년 가까이 여러 모로 연락을 시도했는데 그쪽에서 전혀 답이 없다고 했다. 내가 직접 그쪽과 연락해볼 수 없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느 출판사가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버는 일인데 저작권 파는 일을 소홀히 하겠는가? 독일 출판사에 여러 번이나 전화를 한 끝에 마침내 담당자라는 사람의 이름과 팩스 번호를 알아냈다.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곧 처리하겠다는 답변까지 받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그쪽에서는 원서 한 권만 달랑 보내왔을 뿐 다른 아무 조치도 없었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일주일이면 모든 일이 처리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우리가 예정한 출판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쪽 담당자가 글로벌 마인드가 없지 싶었다. 유럽에서야 모든 일이 천천히 진행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빨리빨리 진행된다. 이런 상식조차 없는 사람이 다른 일에 덧붙여 국제계약까지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시 통화를 시도하는 중에 보니 담당자는 파트타임 근무이고 팩스는 여러 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출판사에서 자료를 넘겨받아 그동안 에이전시의 접근 노력들, 나의 노력과 그쪽의 답변 등을 날짜별로 정리해서 누가 읽어도 알 수 있도록 간략한 보고서를 만들고 우리 측 출판 날짜에 맞출 수 있도록 긴급히 처리해달라는 간결한 편지를 썼다. 계약 담당자를 수신자로 하여 팩스를 보냈지만 제발 이 팩스가 누군가 상급자의 손에 들어가기를 빌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즉시 독일 출판사에서 내게 팩스와 함께 전화가 걸려왔다. 그 사이 담당자는 교체되었고 긴급히 처리할 예정인데 누구와 이야기하면 좋을지 묻는 전화였다. 우리 측 출판사와 에이전시 연락처를 알려주자 며칠 만에 저작권 계약이 완료되었다. 1998년 6월에 드디어 책이 출판되었다.
책이 출판되고 난 다음에도 나는 <히틀러 평전>이 내게 갖는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번역이란 어차피 가장 정교한 책읽기의 한 형식이다. 단순히 읽을 뿐만이 아니라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니 이보다 더 확실한 책읽기는 없다. 히틀러의 생애만이 아니라 19세기와 20세기 독일과 유럽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거대한 책을 나는 1년 이상에 걸쳐 무려 네댓 번이나 정독했던 것이고(수정 및 교정 과정 포함), 그 방대한 내용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면에서 천천히 계속 소화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독일과 유럽의 역사를 바라보는 나의 눈길이 바뀌었다.
그에 따라 무엇보다 대학에서의 강의 내용이 바뀌었다. 번역 작업 도중에 이미 시작된 변화였다. 당시 서유럽 관련 교양 과목에서 독일 편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나는 독일의 역사를 강의의 주축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 책을 번역하면서 독일의 역사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새로워졌다. 20세기의 히틀러 현상으로부터 독일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당연히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올바른 답도 찾아내는 게 인간이다. 과학과 경제 말고도 철학과 문학과 음악 등 문화 부문에서 엄청난 업적을 쌓아올린 독일의 국민이 어떻게 히틀러 같은 지도자를 투표로 뽑았단 말인가? 끔찍한 전쟁광에 그토록 편집증적으로 유대인을 죽이다니, 철학이란 게 대체 현실에서 무슨 소용인가? 질문은 꼬리를 이었고, 강의 첫 시간에 이런 질문들을 학생들에게 던졌다. 그 답을 찾아가는 것이 강의 내용이 될 것이라는 예고도 함께. 상당수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진지한 태도로 수강했다. 나의 질문이 그들의 질문이 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 ▲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안인희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그리고 강의에서의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나의 질문을 전공 분야에 적용하여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민음사 펴냄)라는 책을 썼다. 이어서 이 책의 내용 중에서 '게르만 신화' 부분을 확대하여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2,3>(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을 썼다.
<히틀러 평전>이 나온 뒤로도 나는 히틀러 관련 서적들을 여러 권 더 번역했다. 마치 이 분야가 나의 전공이기라도 한 것처럼, 히틀러를 다룬 좋은 책들을 번역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함께 작용했다. 지금 나는 대학을 떠나 성인(成人)을 위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유럽의 문화'라는 강의인데 유럽의 역사를 배경으로 그 문화를 바라보는 방대한 내용을 다룬다. 역사를 큰 틀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길렀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강의가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이런 관점을 기르기 시작한 맨 앞에 <히틀러 평전>을 번역하며 정독한 과정이 놓여있다. 과연 내 삶을 바꾼 책이라 불러 마땅하지 않겠는가?
책을 번역하는 도중에 두 번 기억에 남는 꿈을 꾸었다. 한 번은 작업하는 컴퓨터 자판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불이 환하게 타오르는 방 안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살아서 나를 사랑하신 우리 할머니가 무심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말로 자판 꿈 이야기를 했더니 김학원 주간이 농담 삼아 꿈을 팔라고 했다. 물론 나는 이 소중한 꿈을 그에게 팔지 않았다. 그야 물론 재미있는 일화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지금도 나는 이 운명의 책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 역자 서문 여기 번역된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의 <히틀러 평전>은 1973년에 간행된 이후로 독일에서 가장 정평 있는 히틀러 전기로 꼽히는 책이다. 엄청난 주(註)의 분량이 말해주듯이 고증이 철저하고, 시각이 균형잡혀 있으며, 야사(野史)가 아닌 정사(正史)를 다루고 있다. 대단히 학술적인 작업이면서도 일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문체와 서술법을 보인다. 이런 특성 때문에 원서의 총분량이 양장본으로 빽빽하게 12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면서도 독일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 히틀러(1889~1945)는 보잘것없는 출신배경을 지닌 인물이다. 오스트리아 변방 출신으로 할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서 그의 성(姓)도 불확실하다. 실업 중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화가나 건축가가 되려고 했으나 학력과 실력이 부족하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이 거절되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열여덟 살에 어머니까지 죽고 나자 고아 신세가 되었다. 그 뒤로는 집도 없는 떠돌이 신세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것을 빼고는 정치에 들어가기 전 내세울 만한 아무런 이력도 없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이전에 이미 부유한 산업국가였다. 정치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벌써 수많은 선진적인 사회제도들을 갖추고 있었다. 철학, 음악, 문학, 역사학, 법학, 의학, 자연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인물들을 배출한 것을 생각해보면 정신적·학문적으로도 기반이 든든한 나라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 성립된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은 이론적으로 가장 민주적인 바이마르 헌법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였다. 히틀러는 1933년 1월에 대통령제와 내각제가 혼합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1934년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대통령직까지 승계하면서 바라던 대로 1인 독재국가 체제를 완성하였다. 히틀러의 전기는 한 개인의 삶의 역사로 쓰일 수는 없다. 그것은 20세기 전반부 유럽사, 부분적으로는 세계사의 가장 큰 사건들을 포함한다. 히틀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출현하기 이전 유럽의 전반적인 정치적·사상적·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유럽의 사정 어딘가에서 그가 출현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전제조건들이 점차 무르익어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래서 대단히 광범위하고 독자에 따라서는 지루하게 여겨질 도입부분을 가진다. 그러나 유럽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의 사상 사조들이 탐구되어 있다. 히틀러의 초기 삶의 과정은 완전히 밝혀져 있지 않다. 히틀러 자신이 권력을 잡은 다음 집요하게 자신의 초기 행적들을 지워나갔기 때문이다. 저자는 얼마 안 되는 히틀러의 성장기 자료들을 한 사람의 개인사가 아닌 유럽사적인 배경설명으로 보충하고 있는 셈이다. 히틀러의 56년 생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30년 동안 뚜렷한 삶의 목적 없이 방황하던 시기와(이 책의 제 1부), 그 이후 정계에 들어가서 감전된 듯이 격렬하게 활동한 시기로 나뉜다. 앞의 30년 동안의 행적은 그의 형성기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간이다. 그에 반해서 그가 정치활동을 펼치는 후반 약 26년은 공식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이 시기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처음 약 10년 동안(1919~1929) 그는 배경도 돈도 이름도 없이 출발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국가사회당을 자기 자신의 정당으로 만든다. 정치 초년생으로서 정치적 비전을 만들고 정치를 배우면서 정치적 도약을 위하여 준비하던 시기였다(2부와 3부). 다음에 이어지는 약 10년(1929~1939)은 히틀러의 권력 장악 기간이며 전쟁준비 기간이다. 권력 장악 과정은 두 번의 도약을 거친다. 먼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수상에 취임하는 과정(제 4부), 두 번째로는 서두르는 부하들을 달래면서 '합법적으로' 대통령을 승계하는 과정이다(제 5부). 절대권력을 장악하자마자 히틀러는 독일 경제를 재건하고 곧바로 전쟁준비에 들어간다(제 6부). 마지막 6년은 전쟁의 기간으로 화려한 승리를 거둔 초기국면을 거쳐(제 7부) 몰락을 향하여 미친 듯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과정(제 8부)이다. 그때까지 신중하던 정치가로서의 판단력과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고 세계제국의 야욕을 드러낸 채 세상과 점점 격리되어 정신병자와 같은 면모를 드러내고 비참한 파멸을 겪는 것이다. 2.
이 책은 이전의 중요한 히틀러 전기들과 두 가지 측면에서 다른 관점을 보인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시대의 추세로 보이던 민주주의 제도를 독일에서 폐기처분하고 전체주의 국가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예외적 존재였다고 해석되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더욱 심층적인 분석을 통하여, 히틀러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시대의 요청을 파악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뒷받침되고 있어서 오늘날 독일에서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한 가지는 히틀러가 권력만을 추구한 기회주의자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격이다. 저자에 따르면 히틀러는 조잡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정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반유대주의와 생존공간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생존공간 정책이란 쉽게 표현하면 게르만족을 위한 세계제국 건설이라는 말로 바꾸어볼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정치이념의 생성배경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히틀러 개인의 창안이 아니라 그의 형성기에 유럽을 휩쓸면서 유행하던 사상이었고, 히틀러는 스펀지 같은 기억력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히틀러라는 역사적 현상과 그 형성배경을 밝힐 뿐 아니라, 역사적 반성과 평가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들을 포함한다. 저자가 전기서술 사이에 삽입한 관찰들이다. 여기서 '히틀러란 과연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었는가? 히틀러는 독일 정신의 계승인가, 단절인가? 그가 독일 역사에 남긴 의미는 무엇인가?' 등이 관찰되고 있다. 이 책에 전개되는 전망과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저자의 폭 넓고 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력을 엿보게 한다. 이 관찰들은 단순한 전기서술자가 아니라 역사관찰자로서의 전망을 가지고 독일 현대사의 가장 진지한 질문들에 답변하려는 저자의 시도이다. 3. 히틀러는 어떤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던가? 그는 위대한 연설가였고, 탁월한 연출가였다. 가장 먼저 선전효과를 인식한 정치가로서 그는 연출의 재능을 이용하여 '예술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였다. 제3제국의 거대한 제례의식들은 그의 탁월한 연출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다. 권력장악 과정에서 적과 자기편의 도전을 단단한 배짱과 정확한 상황판단으로 극복하고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상승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시대의 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표면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심층부에 잠재되어 있는 울분과 갈망을 그는 극히 예민하게 감지하였다. 뛰어난 연설의 재능을 이용하여 이러한 울분과 갈망을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말로 표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것을 다시 정치적 힘으로 조직화하였다. 히틀러 개인과 그 시대의 정신이 이렇게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를 역사적인 위대성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부분이라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마도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인이겠지만 행운이 그의 편이었다.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던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시대의 사건과 상황들이 이상할 정도로 그가 의도하는 바를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엉뚱한 망상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망상은 물론 그의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4. 이 책은 방대한 스케일과 긴 호흡을 가지고 있다. 단숨에 읽히는 책이 아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독일의 사정은 우리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수많은 실제인물들은 이름을 외우기도 벅차다. 게다가 독일의 역사는 곧 유럽의 역사와 연결된다. 유럽 대륙 한복판에 자리 잡은 독일은 오늘날에도 9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독일의 움직임이 곧장 외교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와는 지정학적·역사적 ·문화적·사상적인 전제조건이 달라서 그들의 행태를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난관들을 뛰어넘고 보면 야사도 소설책도 아닌 이 정사적 전기서는 엄청난 지식과 역사적 성찰의 전망을 제공한다. <삼국지>가 우리에게 삶의 전략을 가르쳐준다고 했던가.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중국대륙 안에서 통일하거나 3국을 정립(鼎立)하려는 자족적인 세계관만으로는 충분치가 못하다. 개인이나 국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국제적인 문제들에 부딪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외교와 국내정치를 같은 선상에서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히틀러의 비전과 전략은, 그것이 비록 부정적인 측면을 가진 것이라 하더라도 세계무대를 향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정치가 여전히 보이고 있는 자폐적인 진흙뻘 싸움을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게 만든다. 책의 두 번째 부분을 이루는 4부와 5부의 권력장악 과정과, 6부의 전쟁 준비 기간은 히틀러의 승리의 세월이었다. 이 부분을 읽고 있으면 히틀러가 얼마나 놀라운 천재였던가 거듭 경탄하게 된다. 히틀러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히틀러를 무조건 숭배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 부분을 읽으면 무릎을 치며 좋아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경고의 목소리는 오히려 첫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에 들어있다. 그를 키워낸 정신적·문화적 풍토가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곰곰 되새기고, 그의 안에 잠재되어 있던 악마가 마침내 밖으로 터져 나왔을 때 그것이 가진 파괴적 에너지가 어떤 것이었던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이란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평화민족이라고 자처하는 우리의 내면에 팽창의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다른 민족, 다른 국민의 내면에도 팽창의지가 들어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두 개의 팽창의지가 만나면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히틀러 현상을 냉정하게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재와 민주주의 현상에 대해서도 냉철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독재자가 유능할 경우 독재는 초기에 효율성이 높다. 그러나 뒷날 반드시 후유증이 따른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대다수가 충분히 민주의식을 갖추지 못했을 때 다음번 독재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5. 이 책을 읽으면서 악(惡)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느낌을 가졌다. 허구적인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사람이면서도 히틀러는 악의 상징으로 어느 정도 신화화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이 신화들을 벗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설명하기 어렵게 보이는 일이라도 차근차근 기원을 따져 올라가면서 개인적·사회적 주변 환경과 분위기에서 사상의 형성배경을 찾아보는 것이다. 신화를 벗겨내는 일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성공하고 있지만 그런 다음 드러나는 히틀러의 모습이 오히려 더욱 섬뜩하다.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 공허한 그의 내면 풍경, 철저한 양식화를 통해서 인간적인 약점과 풍모를 지워나간 조각상 같은 모습, 목표를 따라 정확하게 앞으로 나갔던 광적인 집중력 등을 읽으며 이런 지도자를 가진다면 얼마나 불운한 국민인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유능하기 때문에 그의 편집증이 더욱 두려운 것이다. 예리한 지성, 딜레탕티슴, 삶과의 거리감, 죽음의 예찬, 밤에 이루어진 대규모 의식들, 예술에 대한 숭배 등, 독일 낭만주의의 특성들이 유머 감각만 빠진 채 여기 어느 정도 실현되어 있다. 이 잔혹한 역사의 현실은 스케일이 커진 만화나 동화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꿈같은 그의 상승의 이야기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인 증오와 잔혹성, 그토록 높이 올라갔다가 한 순간에 추락해버리는 결말 등이 역사적 사건에 낭만적인 동화의 인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많은 동화들이 잔인하지 않던가. 이 낭만적인 동화에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사람들의 삶은 비극적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 속에 다시 한 세기가 흘렀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런 삶과 죽음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한 인간, 혹은 한 시대의 망상에 의해 죽음의 제단에 희생의 제물로 바쳐졌다. 발달된 기술로 전례 없는 대량학살의 기록을 세운 세기가 끝나가고 있다. 몇 날 남아있지 않은 이 세기말, 천 년 말에 우울한 상념에서 얻은 우울한 눈길을 다음 세기로 던져본다. 거기 낙관해도 좋은 전망이 있을 것인가. 악이 과학기술을 이용했다면 같은 기술이 악에 대항하는 세력에게도 힘이 되어줄 시간이 다가올 것인가. 6.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겪었던 고민과 배움, 괴로움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다. 저자인 페스트는 언론인으로서 독일의 학자들이 보이는 것과는 다른 문체상의 어려움과 부분적인 일탈현상을 보였다. 그 뿐만은 아니다. 다루고 있는 주제나 내용이 워낙 광범위하고, 유럽에는 잘 알려진 것이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개념들을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말로 바꾸는 데 상당히 고생하였다. 우리말 쪽에도 수많은 난관이 존재하였다. 우리말에서 대부분의 개념어는 거의 한자어로 되어 있다. 한자어로 옮기면 문장이 간편해지는 이점이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이미 어려운 내용이 더욱 어려워진다. 대개 학술서의 경우 옮긴이가 편한 대로 한자어를 써버리면 독자는 접근할 길이 막힌다. 이 번역 책에도 상당히 많은 한자어들이 섞여 있다. 한자어를 안 쓰는 것은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능력이 미치는 한 한자어를 피하고 읽기 쉬운 우리말을 써보려 노력하였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새발의 피라는 생각이 든다. 번역과 우리말 표현 문제에 대해서,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에 계신 언어학자 황종인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지적 자극과 가르침을 받았다. 이 기회를 빌려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가 지금 하고 계신 작업이 얼른 열매를 맺고 책으로 출간되어 나와, 그의 언어학적인 생각들과 독창적인 사상이 널리 읽히는 날이 오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이 책의 번역작업 초기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신 하이디 강(Heidi Kang) 선생님과, 지금은 경북대학교에 계시면서 아무 때나 전화걸어 질문하면 언제나 친절하게 대답해주신 미하엘 스코브론(Dr. Michael Skowron)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안인희의 주요 저서 및 역서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민음사 펴냄)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히틀러 평전>(요아힘 페스트 지음, 푸른숲 펴냄)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바오 펴냄)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시공사 펴냄) <위로하는 정신>(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유유 펴냄) <미학 편지>(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휴먼아트 펴냄) <데미안>(헤르만 헤세 지음, 문학동네 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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