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사가 신임 인사차 전경련을 방문하는 일이야 의례적인 것이지만 미 8군 사령관이 신임 인사를 오겠다는 통보를 해온 것은 의외였다. 1982년 6월이었다. 일단 우리는 의전상 대사급 대우를 준비하고 그를 기다렸다. 신임 인사라 그에 대한 간단한 이력사항 외에 특별히 면담 자료를 준비한다거나 정회장을 위하여 특별히 다른 준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미8군사령관의 방문**
신임 8군 사령관에 임명된 4성 장군 세네월드. 그의 부임 시점 한국에서는 반미구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해 3월 18, 그의 부임 약 석달 전 일부 학생들에 의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고, 5·18에 있어서의 미국의 책임을 묻는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전경련과 같은 경제단체를 방문한 목적이 이런 정치적인 부분에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니 우리는 말 그대로 단순한 신임 인사로 받아들였다. 당시 한미관계 관심사였던 미 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진행상황과 대처방안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의 화제는 이윽고 중국으로 옮겨갔다.
중국 문제는 평소 정회장이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분야였다. 사회주의국가 중국의 개혁 개방에 대해 전 세계가 주목을 했던 것은 당연한 일. 특히 10억이 넘은 인구의 중국의 향방은 미국. 유럽. 일본 등의 대국은 물론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한국에게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중국의 개방 논의**
그러나 중국은 그때까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어떻게 조화해 나갈 것인가, 그리고 어떤 형태로 개방정책을 추진할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불확실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정회장이 세네월드와 함께 중국을 주제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령관께서는 중국의 개방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국 말씀입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시장도 개방하고 세계 시장에도 진출을 하겠지요."
"아직 드러난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그 엄청난 인구와 싼 노동력을 생각해보면 잠재적으로는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야 주로 미국하고만 거래를 하고 있지만 중국을 노리는 나라들도 많고 중국도 이를 이용하려고 하겠지요."
"아, 그래요…."
물론 정회장이 몰라서 들어주고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적어도 미8군 사령관의 지위에서 바라보는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다시 세네월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뛰어들게 되면 대부분의 분야에서 한국과 시장이 겹칠 것 같은데, 회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큰 타격이 있지 않을까요?"
"저도 사령관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 진출한다면 아마 우리와 경합되는 분야가 많겠지요. 일종의 위기가 오긴 올 겁니다. 하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경공업이라지만 공장을 가동하려면 기계도 있어야 하고 기술도 있어야 하고…. 당장 그것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우린 중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만한 기술과 시장 경험도 있구요. 저는 걱정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중국이 시장에 참여할 기회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정말 듣던 대로 도전정신이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중국 시장 개방은 그런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닙니다. 중국이 공산화된지 3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 나라가 갑자기 서방과 물꼬를 트고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면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점 때문에 중국의 앞날이 매우 불안합니다."
"저는 그 말씀에는 동의하기가 힘드는군요. 중국과 우리는 수천 년의 역사를 함께 공유했습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보다는 우리가 중국을 조금 더 잘 알죠. 그들의 피 속에는 타고난 장사꾼 기질이 흐르고 있습니다. 미국에도 차이나타운이 있죠? 세계 어디를 가도 자기들만의 영역을 확보하는 사람들이 바로 중국인들입니다. 또 유태인 뺨칠 정도로 이재에 밝고 장사를 잘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죠. 시장이 개방되면 잠시 혼란은 있겠지만 곧 정리될 겁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 어디서 이익이 더 남느냐 하는 것을 따지거든요."
***너무 많이 나간 중국 이야기**
지금 돌이켜보면 정회장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끊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일단 한 번 말문이 트인 정회장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르고 흘러갔다. 중국인의 특성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윽고 한반도 5천년과 중국의 역사, 중국의 왕조, 진시황, 양귀비 등 중국 문화에까지 중국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을 풀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어떤 일이건 과하면 모자람만 못한 법.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흥이 돋은 정회장은 그만 하지 말아야 될 이야기까지 하고 말았다.
"사령관님께 앞으로 한.중 관계에 있을 한 가지 장담을 하겠습니다. 곧 중국의 최고 실력자가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가를 한 사람 초청할 것입니다. 아마 세계가 깜짝 놀랄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묻지 않아도 뻔한 이야기가 아닌가. 중국의 최고 실력자라면 등소평일 것이고,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란 정주영 회장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냉전 체제가 채 가시지 않은 때, 중국의 변화에 따른 경제. 정치. 군사 문제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미.일.중.소 등 강대국은 특히 한국과 중국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시기였고 사방 첨예한 정보 단말을 작동시키고 있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도 이들 국가들의 눈치를 살피며 민간 경제계에도 조심스런 접근을 강조하며 쉬쉬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처지였다. 정회장의 중국 방문은 말 그대로 세계가 깜짝 놀랄 대 사건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세계 대국의 4성 장군 사령관 세네월드, 그는 정회장의 발언이 그 시기에 얼마나 민감한 정보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즉각 간파했을 것이다.
***면담기록 삭제 요청**
우리의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세네월드가 돌아가고 몇 시간 뒤, 주한미군 사령관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오늘 저희 사령관께서 전경련을 방문하신 것과 관련해서 몇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니요. 뭡니까"
"예, 다름이 아니라 사령관님과 정주영 회장님의 면담에서 나온 이야기 중에서 중국 관련 부분을 기록에서 좀 빼주셨으면 합니다. 면담록이든 대화록이든 어떤 기록도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언론에 나가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주한미군사령부의 공식 요청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기록에서 빼달라는 얘기를 공문으로 부탁하는 바보 짓을 할 사람들이 아니니, 그가 말하는 대로 '공식 요청'임에 틀림이 없는 이야기였다. 나 역시 그날 정회장의 발언이 큰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문제는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나타났다. 전경련이 아니라 주한미군 사령부 혹은 어떤 다른 곳에서 그날 정주영 회장의 발언이 새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정회장의 발언이었지만 적어도 그가 최고의 정보를 다루는 주한미군사령관이기 때문에 안도했던 것도 사실이다.
***없었던 일로 된 중국 방문**
결과적으로 말해 정주영 회장의 극비 중국방문 계획은 그날 중국에 대한 지나친 열의를 보였던 정주영 회장의 한마디 솔직한 실토로 인하여 그만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날 정주영 회장의 이야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 결국 북한에까지 알려지고, 북한은 또 중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했다고 한다.
북한의 항의를 받은 중국 정부는 애초 비밀리에 추진되던 일인만큼 '그런 일 없다'고 하고, 실제 '없던 일'로 만든 것이다. 한국과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훨씬 앞당긴 계기가 될 수 있었던 정회장의 중국방문 계획은 이렇게 무산됐다.
이 시점에서 돌이켜 생각해본다. 주한 미8군 사령관인 그가 그러한 정보를 어떻게 본국 정부에 보고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 시점에서 한국과 중국 관계가 경제교류를 계기로 급속도로 발전돼 가는 것이 과연 미국의 한반도에서의 이해관계에 바람직했던 것이었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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