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관계가 마치 냉.온탕을 번갈아 드나드는 형국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 이후 조용히 정국상황을 관망하던 한나라당이 느닷없이 신건 국정원장과 신승남 검찰총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시한까지 정해두고 자진사퇴를 하지 않으면 국회에서 탄핵안을 내겠다고 했다. 불과 얼마 전 한나라당의 협조적 모습과는 판이하다.
그러면서도 이회창 총재는 이재오총무를 불러 "너무 강공으로 나가는 인상을 주지는 말라"고 주문했다. 이총재 스스로도 21일 러시아로 출국하기 앞서 “정국을 풀고, 국정운영의 가닥을 잡기 위해 필요하다면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을 가질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비록 하루 만에 ‘국정쇄신 조치가 있은 후에 만나겠다는 뜻’이라고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국정원장 · 검찰총장 사퇴 압박이라는 대여공세 국면과는 어울리지 않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적당한 시점에서 다시 입장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사표시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김대중 대통령에게 약속이행을 하라는 압력이다. 내년 대선에서 엄정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다. 말 그대로 정치에서는 손을 떼고 국정에만 전념해 달라는 주문이요, 딴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다. 그 같은 입장을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힘으로 시위를 하는 것이다.
***한나라당, 대통령의 엄정중립 약속 이행 압박**
사실 여권 핵심과 한나라당은 10.25 재보선 이후 대화채널을 강화하고 많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화내용이 단편적으로 흘러나오면서 이른바 ‘밀약설’로 포장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결과 여당으로선 한나라당의 도움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국이 됐기 때문이다.
그 대화의 결과, 이회창 총재는 수에 의한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여당의 국정운영에 협조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때부터 한나라당이 여권 핵심에 대해 집요하게 요구한 게 있다.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의 엄정중립 요구다. 그를 위해 당적을 이탈해 달라는 주문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김대통령 스스로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선택이 될 것임을 소상히 설명했다는 후문이다.
때마침 민주당 내분사태가 터지면서 김대통령은 그 같은 요구의 일정부분을 수용했다. 총재직 사퇴가 그것이다.
그러면서 여권 핵심인사들은 김대통령의 최근 심정을 한나라당 측에 설명해 주었다는 것이다. 요약컨데 김대통령은 탈당이란 절차를 밟지만 않았을 뿐 실제로 정치에서 손을 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김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노벨 평화상 수상 같은 것들이 제대로 평가받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이 그걸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가는 것에 상당한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 민주당의 내분사태에 대해 특히 실망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김대통령은 자신의 업적을 지키고 대통령선거 이후 후탈을 없애기 위해 엄정중립의 자세를 견지키로 결심했다. 그것이 총재직 사퇴의 참 의미다."
이 같은 얘기를 전해들은 한나라당은 상당히 고무됐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 같은 추세로 내년 대선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고 결국 이회창 총재의 집권이 가까워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대통령선거에 개입하지 않겠다니 야당으로선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조용히 정국상황을 지켜봤다.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김대통령은 국정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수차례에 걸쳐 밝혔다. 야당과의 정책협의를 강화토록 지시하는가 하면 민주당 경선에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까지 밝혔다. 겉으로 보기엔 진짜로 정치문제에서 손을 떼는 것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권의 이총재 공격 불러올까 대여공세 자제**
물론 한나라당이 그동안 여당에 대한 공격을 자제한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항간에 떠돌던 연말 이회창 총재와 관련된 여권의 집중 폭로전 소문 때문이다.
소문으로는 연말쯤 정계개편의 와중에서 이총재의 문제들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한나라당 내부의 문제제기를 도모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병역문제를 제기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한나라당으로선 어떡하든 그것을 막아야 하는 입장에 처했던 게 사실이다. 본격적인 선거전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 공격이 온다면 그것대로 대처하면 되지만 정계개편의 와중에서 문제가 제기되면 한나라당 비주류에 명분을 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당에 협조적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여당이 이총재를 공격할 명분을 주지 않으려 했다. 한나라당내 영남권 의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총재가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도 실은 그 이유가 컸다. 지난 청와대 영수회담에 이총재가 응한 것도 그런 것들이 배경이 됐다.
그랬는데 문제는 한나라당 내부에서 최근 제기되기 시작했다. 박근혜 부총재가 비록 원론적 수준이긴 하나 1인 정당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나섰고 김덕룡 의원도 신풍운동이니 하며 정치권의 개혁을 주장했다.
소문으로 떠돌던 정계개편의 조짐들이 한나라당 내부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한나라당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김대통령이 내년 대선에서의 엄정중립 입장을 표명하고서 다른 한편으론 정계개편을 내다보고 있다고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정계개편이 그럴듯하게 진행되면 거기에 힘을 싣고, 그것이 잘 안될 때 당초의 약속대로 중립적 자세를 취하려는 것으로 봤다. 그래서 총재직 사퇴를 일찍 한 것도 정계개편을 빨리 진행시켜 보라는 의미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검찰과 국정원 공격해 여권 자중지란 유도**
그러면서 한나라당은 기본 전략을 수정했다. 한나라당은 이쯤에서 정계개편 시도에 쐐기를 박아두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야당의 힘을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대여 공세를 재개하되, 여권이 전면전으로 느끼지 않을 수준의 공격을 감행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이총재가 이총무에게 적절한 수위를 주문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만약 전면전으로 들어가 역공을 야기한다면 한나라당으로서도 부담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른 것이 검찰과 국정원이다. 검찰과 국정원 모두 내부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활용하려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한나라당 지도부는 일반 의원들의 무차별적인 검찰과 국정원 공격을 자제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검찰도 소장검사들이 들썩거리고 있고 국정원은 내부 파워게임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가 정치권에 파다하게 돌고 있다.
여기서 적절하게 충격을 던져주면 한나라당이 별로 소리를 높이지 않더라도 자기들끼리 한판 사움을 벌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공격을 통해 한나라당은 여권 내부를 교란시키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검찰과 국정원이 복잡하게 돌아가면 자연 민주당도 복잡하게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노무현 상임고문은 검찰총장 퇴진을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정계개편이란게 집권당의 핵심세력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때 가능한 것인데 핵심세력에 내분이 일어나면 그만큼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와중에 다른 어떤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 예컨대 내부 폭로전 같은 것이 터지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다. 정성홍 국정원 전 경제과장이 김홍일 의원을 거론한 인터뷰 같은 것 말이다. 국정원 관련 제보와 투서가 언론사에 몰리고 있기도 하다.
***한나라당, 정계개편 잠잠해지면 공세 낮출 복안**
한나라당이 보다 적극적으로 정계개편을 저지하기로 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동안 정계개편의 당위성을 가장 많이 주장해 오고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김윤환 민국당 대표다. 그런데 최근 김대표의 입장에 약간의 변화가 느껴지고 있다. 최근 사석 등에서 자기가 그렇게 정계개편을 주장해도 여권이 지금처럼 미지근하게 임한다면 자기도 손을 털어버리겠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동안 한나라당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김윤환 대표를 설득해 왔고 그 효과를 보고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더군다나 김대통령이 김윤환 대표에 대해 다소 불만을 갖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 김대표가 너무 경솔하게 정계개편 얘기를 했다는 불만인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이 정계개편에 쐐기를 박을 적절한 시점이라 보고 공격을 재개한 것이다.
그러나 마냥 공격만 해댈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한나라당으로선 전선을 넓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 상황만 유지해도 가장 유리한 입장에서 선거에 임할 수 있는데 괜히 이쪽저쪽과 싸움판을 벌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정계개편의 움직임이 잠잠해지면 바로 공격의 수위를 낮추겠다는 생각인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최소한 국정원과 검찰 중 한쪽에 대해선 김대통령의 조치를 이끌어 내야겠다는 계산이다. 그것이 있어야 김대통령이 내년 대선에서 엄정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이 진심임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는 입장이다.
어차피 김대통령 입장에서도 연말에는 대대적인 개각을 할 예정이다. 총리도 바꾸고 정당 출신 장관들을 당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 중립내각의 출범을 사실상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정원장과 검찰총장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청와대의 응답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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