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서 알랜 릭맨과 시고니 위버 주연의 <스노우 케익>의 상영과 함께 지난 2월 9일 시작됐던 제56회 베를린영화제가 열하루 동안의 항해를 끝내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올해는 로버트 알트만, 시드니 루멧, 그리고 클로드 샤브롤을 비롯한 거장들의 영화 등 총 19편의 영화가 경쟁부문에 출품됐고 비경쟁부문과 특별섹션인 파노라마와 포럼 부문에서 수많은 영화들이 영화제 기간 동안 베를린 시민들과 세계에서 모여든 영화광들에게 보여졌다. 모든 영화제들은 각각의 고유한 색깔과 경향을 가지고 있고 베를린영화제 역시 다년 간의 경향에서 알 수 있듯이 칸영화제나 베니스영화제에 비해 정치적 성격을 전면에 내세운 국제영화제라는 독특한 경향을 보여 왔다. 그 건 베를린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제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베를린영화제의 정치성은 이제껏 선정한 작품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反세계화의 기치를 내세우다 올해 베를린영화제도 ▲정치참여와 ▲反세계화의 화두에 포함될 수 있는 영화들을 대거 포진시켰다.
집행위원장인 디터 코슬릭은 이렇게 말했다. "금년에 베를린에 참가한 영화들은 전체적으로 아주 정치적이며 또한 현실에 기반을 둔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인 면 보다는 대중의 문제에 초점을 둔 영화들이다". 코슬릭 위원장이 그 예로 꼽은 작품이 바로 영국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관타나모로 가는 길>. 픽션과 인터뷰 그리고 다큐멘터리적인 세 가지 형식을 혼합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쿠바의 미군해병기지에 수감된 세 명의 이슬람계 영국인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결국 올해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베를린은 결코 정치적 성향의 영화들을 위한 영화제만은 아니다. 베를린은 여타의 다른 세계영화제와 다르게 할리우드 영화를 경쟁부문에 많이 포함시켜 왔는데, 그 과정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을 대거 초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제의 상업적 성공을 한편으로 꾀한다는 얘긴데 그래서 때로는 친미적이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올해는 유독 정치성이 강한 영화들이 많이 출품되어서인지 예년에 비해 많은 스타들이 베를린을 찾아 독일과 세계 미디어의 시선을 영화제로 모으는 데에 성공했다. 반미적 성향이 강한 영화들과 할리우드 스타들, 두 가지의 서로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특징이었던 셈이다. 이 두 마리 토끼인 '정치성'과 '할리우드 스타 초청'이 잘 결합된 영화가 바로 비 경쟁부문에 초대된 <시리아나>로 조지 클루니와 맷 데이먼이 출연하고 스테판 가한이 감독한 영화다. 스테판 가한은 스티븐 소더버그의 영화 <트래픽>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시리아나>는 미국의 정치계와 석유산업 간의 은밀한 관계를 폭로하는 내용의 영화다. 이번 영화제의 기자간담회에서 베를린의 여성들과 영화제에 모인 모든 여성기자들로부터 최고의 관심을 모은 조지 클루니는 이번 영화제에 참여한 헐리우드 스타들인 시고니 위버, 메릴 스트립, 나탈리 포트만과 함께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거닐었다.
독일영화의 새로운 부흥 올해는 특히 프랑스영화와 독일영화의 위상이 뒤바뀐 해로 기억될 것이다. 독일 내에서 벌어지는 영화제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독일 영화보다 더 많은 수의 영화를 경쟁부문에 진출시켰던 프랑스 영화가 처음으로 단 한 편만 경쟁부문에 포함된 첫 해이기 때문이다.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힘의 도취>가 그것으로 프랑스 내 거대 석유자본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내용의 이야기다. 이에 비해 독일영화는 비록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영화의 황금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1970-80년대의 독일영화 부흥기를 연상시키는 듯한 활발함을 보이면서 총 4편의 영화를 경쟁부문에 포함시켰다. 매년 100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독일에 비해 2배 반이 넘는 영화 제작편수를 자랑하는 프랑스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해 프랑스 영화계에서는 우수한 프랑스 영화들이 베를린보다는 칸느로 방향을 선회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프랑스 언론들은 독일작품 중의 하나인 오스카 롤레 감독이 만든 <소립자>의 원작이 프랑스 소설가 미쉘 우엘벡의 작품이라는 것 정도로 위안을 삼고 있는 분위기. 결국 올해의 베를린영화제는 한참을 앞서 달려가는 칸영화제를 따라잡기도 힘들고 한편으로는 베니스영화제와 차별성을 유지해야 하는 방법으로 정치성이 강한 영화와 할리우드 스타의 대거 초청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흐름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기존의 독일 영화계가 프랑스 영화계에 대해 느끼던 열등감을 극복한 첫 번째 해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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