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들어서서 많이 바빠진 사람들이 아마 정치평론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대통령의 언행은 항상 분분한 '진의(眞意)' 해석과 '진정성' 논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여러 수준의 '해명'을 거듭한 끝에 용두사미되는 일이 많았다.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고 한 언급에서부터 연정론, 부동산 대책과 금산법 처리과정, 그리고 최근의 조세개혁 논란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수시로 정권의 명운이나 임기단축 등 정치적 인화력이 높은 발언까지 결부되면서 정쟁을 확대시키는 극적 효과가 일어났다.
이를 두고 노무현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관성 결여'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작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정치적 리더십의 '일관성 결여'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지난해 노무현 정부 출범 2년을 맞아 열린 평가토론의 자리에서 나는 '노무현 정부의 개혁 후퇴를 변절로 보느냐 좌절로 보느냐'는 질의에 "정치에서 주관적 의지와 객관적 조건의 문제는 결과적으로 동전의 양면"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개혁은 개혁으로부터 손해를 보는 사람들의 필연적 저항을 제압할 수 있는 힘과 수단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이 나라의 개혁대상은 지금까지 한번도 손해를 보거나 져본 적이 없는 세력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의 성패는 결국 막강한 개혁대상에 대해 '맞짱'을 뜰 수 있는 개혁주체를 형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집약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 3년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누구에게 얼마만큼 '열려'있으며 어떻게 '참여'시켰는가이다.
***'386의 주류화'로 막혀버린 '개혁주체 형성'**
노무현 정부는 수십 년간 계속된 냉전반공 정치체제를 무너뜨린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 민주화의 밑거름 위에서 정치개혁의 제도화와 실질적 민주화를 염원하는 대중적 열망의 지원을 받아 탄생했다. 많은 서민들이 '비주류 노무현의 개혁'에 표를 몰아주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서민에게 문을 닫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넉 달이었다. 노대통령은 2003년 6월 '성장과 분배의 조화'라는 공약을 버리고 삼성재벌 2기의 경영이념인 '2만 달러 달성'을 국정목표로 발표하면서 발 빠르게 기득권 세력과의 화해에 나섰다. 이와 동시에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내세웠던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에 맞는 노동기본권의 보장, 사회통합적 노동정책,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의 정책을 포기하고 화물연대와 철도노조의 파업을 무력 진압했다.
그 결과 노무현 정부는 보수언론이 붙여준 '친노동'의 딱지를 떼고 재벌과 화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를 전후해 시작된 노무현 정부와 서민 사이의 불화는 갈수록 깊어졌다. 3년 내내 서민을 괴롭혀온 부동산 문제에서도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투기세력과 정면으로 맞서 토지주택 공개념의 도입과 같은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해 서민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내기보다 개발정책으로 기득권세력과 타협했고, 선거공약이었던 분양원가 공개조차 포기하면서 서민과 멀어져갔다.
개혁을 하겠다면서 개혁의 알맹이인 서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한 '정치와 경제의 충돌', 먹고사는 문제를 통해 개혁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광범한 개혁주체 형성을 통해 기득권세력의 저항을 꺾을 수 있는 힘과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전략의 부재'…. 결국 노무현 정부의 정치주체는 수십 년간 주인노릇을 해온 기득권세력에 '빛바랜 386세력'이 덧붙여진 것이 돼버렸다. 그리고 386세력은 기득권세력이 열어놓은 좁은 틈새를 통해 주류화했다. 그 결과는 서민과의 불화였고, 서민을 거세한 정치였으며, 결국 정권의 탄생신화와도 같던 개혁을 배반하는 정치를 예고하기에 이르렀다.
***'정치구도 흔들기'로 전락한 정치개혁**
김대중 정부가 남북관계에 올인했다면 노무현 정부는 정치개혁에 승부를 걸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무현 정부가 성과로 내세우는 돈정치 개선, 탈권위, 분권정치 등에서 일정한 진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따지고 보면 돈정치 개선은 꼭지를 딴 측면이 크고 탈권위, 분권정치는 문제제기 수준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정치개혁에 대한 역사적 소임은 지역주의 정치 극복이고 선거제도 개혁이다. 참여정부 스스로도 민주당과의 분당과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통해 지역주의 청산을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지역주의 정치제제를 타파할 유일한 수단인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과 같은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서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부도 여당도 과제만 많이 늘어놨을 뿐 경중완급을 가려 밀고나갈 정교한 계획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여당은 탄핵사태로 과반수를 넘긴 뒤에도 국회 정치개혁특위를 가동하거나 제도를 개혁할 의지 자체를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보궐선거 때마다 지역주의를 활용했다. 지방선거제도에서도 4인 투표구를 도입해 놓고도 지방권력을 장악한 한나라당이 2인 투표구로 되돌리는 것을 방관하거나 공모하면서 오히려 정치개혁을 후퇴시켰다.
노무현 정부가 정치개혁에서 둔 가장 큰 패착은 지역주의 타파를 '제도개혁'이 아니라 '정계개편을 통한 정치구도 흔들기'로 접근한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앞장선 연정론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개혁을 추진할 힘인 주체세력을 만들지 못하고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정확한 방향도 상실했으니, 지역주의에 똬리를 튼 기득권 세력과 담합해서 정치구도를 바꿔보자는 것으로밖에는 달리 이해할 길이 없는 게 연정론 아닌가.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부는 개헌을 거론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과연 헌법 때문에 못한 개혁이 무엇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정치주체에서 서민을 배제하고 기득권 세력과 담합하려는 정치개혁, 정치개혁을 정계개편이나 정치구도를 흔들기 위한 이합집산의 들러리 정도로 삼는 연장선에서의 개헌은 위험한 것이고, 다수 서민이 배제된 정치구조에서의 개헌은 오히려 개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기득권과 '상생', 개혁 포기한 담합**
개혁주체세력도 만들지 못하고 개혁의 방향타도 잃어버리고 나서 남는 것은 기득권 세력과 담합하거나 장수 혼자 혈혈단신으로 나가 싸우다 주저앉는 것밖에 없다. 예고된 실패의 길을 걷고 있는 4대 개혁입법의 현주소는 노무현 정부가 기득권세력과 어떻게 담합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치개혁을 위한 제도개선의 상징이 돼온 4대 개혁입법 과제 중 과거사법은 '누더기', 언론기본법은 '껍데기'가 됐고, 국가보안법 폐지 약속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으며, 그나마 밀어붙였다는 사립학교법 개정은 '도루묵'이 될 처지가 됐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수구야당과 보수언론의 엄청난 저항에 맞서 힘겹게 해온 걸 왜 평가해주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상황논리로야 이해 못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이미 예고된 상수이지 갑작스런 변수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책임을 돌릴 일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개혁에 손을 잡거나 보수언론이 용비어천가를 부를 것으로 생각했던 게 아니라면 말이다.
개혁입법 처리는 상생과 타협의 정신을 실현한 과정이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타협은 마땅히 양보해야 할 사람이 양보할 의사가 있을 때 성립하는 것이다. 계속 양보만 해온 사람에게 또 다시 양보를 강요하는 것은 강요된 굴복이다. 또 상생과 포용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진심으로 반성할 때 가능한 것이다. 반성과 책임이 전제되지 않은 상생은 야합이다. 참여정부는 4대개혁 입법을 반칙이 없고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기 위해 추진한 것인 만큼, 반칙과 폭력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을 결집하여 개혁의 주체로 삼았어야 했다. 개혁대상과의 타협과 상생은 그 자체로서 개혁의 거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남은 2년, 서민과 화해해야**
"그래도 정부여당 안에서 대통령이 제일 개혁적이다." 종합부동산세를 제정하고 개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다. 대통령이 아무리 올바른 정책방향을 잡고 앞서 가도 수구관료 집단이 뒤따라 가기는커녕 밑에서 흔들어버리는 게 현실이니, 공감이 안 가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조직화되고 시스템화된 지도력으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대통령의 리더십, 오직 대통령의 결단과 의지에 의존해서만 추진할 수 있는 개혁이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제 집권 후반기 대통령의 화두는 "역사적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으로 정리돼가고 있다. 하지만 개혁은 대통령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대통령의 희망과 달리 남은 임기 2년 동안 개혁에서 성공을 거둬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기는 여의치 않아 보인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은 2년 동안 '역사적 대통령이 되는 꿈'보다 할 수 있는 만큼 '서민과의 화해'를 통해 임기를 마무리하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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