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주노동당의 분열을 둘러싸고 진보진영 내에서 말들이 많다. 언론에도 제법 많이 노출되고 있는 듯하다. 그 동안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왔던 한국사회의 대안적인 진보정당 건설 실험은 이제 끝난 것으로 보아야 할까. 한 편으론 끝났으되 다른 한 편으론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분단체제의 규정력과 냉전체제의 규정력이 해체된 상황,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장중심적 구조조정을 통해 변화된 한국사회의 양상들, 선진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들과 대다수 국민들이 지금 삶의 조건으로부터 원하는 것들을 모아서 생각해보면 그 답이 나온다고 본다.
민주노동당을 통한 진보정당 실험은 2004년 총선까지 성공했고, 그 이후로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최근의 대선 결과는 그 동안의 누적된 실패를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노동당 공약개발단 부단장으로 참여했고, 2004년 총선 당시 정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정책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아 총선정책을 총괄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2004년 총선시기까지의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공약 개발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으로서 그간의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노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 대선 당시 '부유세,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주된 슬로건으로 내걸었었고, 2004년 총선 때는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민주노동당이 얻은 정당 투표의 상당 부분은 이런 슬로건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과 성원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런데 2004년 총선 이후 실시된 민주노동당 당직 선거를 통해 그 시점까지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노선에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소위 자주파가 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민주노동당에는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자주파의 민주노동당 당권 장악은 2001년경 작성되었다는 그들의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이라는 문서에 의한 자주·민주·통일을 중심으로 한 자주민주정부 수립전략에 따른 시나리오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2004년 총선 때까지도 운동권 연합정당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운동권 내에서 다수파를 차지하였던 자주파가 장악한 사태는 미처 대중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한 유아기의 민주노동당에게는 피할 수 없었던 재난이었다.
전문가로서 어느 특정 정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정책 중심으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해왔던 나는 2004년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이 그간의 운동권 정당의 틀과 이미지를 벗고 대중정당으로 성장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해주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당시까지의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노선은 체계성을 갖춘 합리적 대안의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부족한 수준으로도 국민들의 과분한 지지를 받았기에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엄청난 헌신과 노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을 떠안고 있었다. 당시 국민들이 민주노동당에 보낸 기대는 사실 당장 대안을 보여 달라는 의미보다는 대략의 주장과 방향에 대해 동의를 해줄 것이니 앞으로 노력해서 제대로 한 번 해보라는 미래지향적 투자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중정당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한 당내의 추가적인 논의나 어떤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민주노동당은 자주파가 당권을 장악하면서부터 구태의연한 운동권 정당으로 퇴행해가기 시작했다. 그 동안 밖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등파 역시 자주파의 전횡에 대한 내부투쟁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실력을 연마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등 대중정당으로 도약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정치활동을 전개해나가야 했던 시기, 그래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며 표를 주고 지켜보던 국민들에게 진보정당의 노선과 목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성실함과 진지함으로 신뢰를 쌓아나가는 노력을 했어야 할 시기에 민주노동당은 퇴행적인 운동권 정당으로, 그것도 비현실적인 반미, 친북 노선을 추구하는 정파가 지휘하는 데모정당으로 변해갔다.
몇몇 스타 의원들의 개인플레이를 통해, 그리고 언론 노출을 통해 민주노동당의 존재 자체는 이어졌지만 민주노동당이 대중들에게 실제 행동으로 보여준 바는 이미 운동권 단체의 수준이었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진정성을 갖춘 신뢰할 수 있는 진보정당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 시기 민주노동당의 인적, 물적 자원은 자주파의 노선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었다. 수령론을 정점으로 한 주체사상에 대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면서 한국사회를 식민지반봉건 사회로 이해하는 자주파의 입장에서는 반미,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진리였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융화하고 공존하거나 또는 스스로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노선을 모색해보거나 할 의지가 없는 종교적 성격이 농후한 집단이었다.
그런 자주파에게 2004년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의 대중적 진보정당으로의 도약을 위한 사회경제적 대안개발 프로그램을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였다. 대중들은 민주노동당이 외쳤던 구호를 이행하기 위한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했지만 민주노동당은 그런 기대를 배신하였다. 대중들은 당장 민주노동당에게 세상을 변화시켜달라는 요구를 한 것도 아니었고, 애정을 갖고 관대하게 봐주려고 애썼지만 민주노동당은 끝내 그런 대중의 애정을 거부한 채 실망스러운 운동권 정당의 행태를 지속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국민들이 민주노동당의 행동을 통해 평가한 이미지는 열린우리당의 이중대 역할을 하는 지향이 애매한 조직, 뭔가 북한하고 친한 애들이 모여 있는 조직, 이익단체로 전락해가는 민주노총과 어울리는 조직, 운동권 단체 수준으로 데모나 하는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 실력을 갖추고자 노력하는 정당, 키워주고 싶은 정당, 정직하고 신뢰 받는 정당 등과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는 창출되지 못하였다.
그렇게 해서 대선을 끝으로 민주노동당 실험은 끝났다. 진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오히려 이명박에게로 옮겨갔다. 분단체제, 냉전체제가 해체된 상황에서, 그리고 어느 나라보다도 가혹하게 작동하는 시장규율로 인해 대다수 국민들의 삶이 점점 불안해지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가는 상황에서 국민들은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이명박이라는 인물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명박이 포퓰리즘적 실용주의를 실천에 옮긴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의 삶의 조건을 변화시킬 만한 변화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정규직 및 과도한 임금격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노동시장구조, 고용 중심의 경제운영, 노동력의 수준을 높이는 공교육에 대한 과감한 투자, 취업 및 전직훈련에 대한 대규모 공공투자, 실업자에게 안정적인 삶을 제공하는 사회안전망, 안정적인 노후와 의료보장 시스템, 주거의 안정성 확보 등과 같은 노동시장과 사회복지를 둘러싼 과제들은 시장중심주의에 약간의 실용주의를 가미한 수준으로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민주노동당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국민들이 뭔가 대안적인 삶을 갈구하고 있는 지금 민주노동당내 자주파와 같은 비현실적 노선이나 화석화된 과거의 운동권 이념에 기초한 주관적인 노선들은 폐기되어야 한다. 운동권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삶의 선택의 문제이지만 정당은 국민의 삶의 대안을 추구하는 공적인 조직이 되어야 한다. 대다수 국민의 삶이 운동권 정파의 신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간단한 진실로부터 진보정당의 재구성을 위한 단초를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사회의 시스템적 전환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 강력한 의지를 갖춘 진보정당이 집권하여 추진하지 않고서는 매우 어렵다. 시장중심, 대기업중심의 보수적 정파는 물론이고 통합신당과 같은 자유주의적 정파 역시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추구할 가능성이 낮게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정파의 사회경제적 노선은 보수 정파의 그것과 크게 다른 범주라고 보아주기 어려운 수준이다. 선거시기의 일부 진보적 언술들마저 실천가능성이 없는 사탕발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지난 10년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들은 일관성이나 강한 의지 또는 진보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임의 기회주의적 정치집단에 머무르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진보당 이후 한국의 정당사에서 최초로 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 실험의 실패에 불구하고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의미이자 냉전 해체 이후 한국사회의 대중들이 보여준 가능성이었다. 게다가 객관적 현실이나 여론조사를 통해 보면 국민들은 사회경제적 대안을 갖춘 정당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모색이 요구되고 있다.
시장중심적인 성장담론에 맞서 개방경제체제하에서도 대다수 국민의 안정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대안적 사회경제시스템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진보정당을 국민들은 충분히 인내하면서 키워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대안적 진보정당을 찾기 위한 민주노동당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실험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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