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나무가 베어진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때야 그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은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한 인디언 예언자가 인간의 욕심과 환경에 대한 무지를 일갈한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녹록치 않은 세상을 살고 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은 전보다 강해졌고, 지구의 생채기는 훨씬 심해졌다. 예상치도 않았던 곳까지 오염되고, 사람들은 새로운 질병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환경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회의 편익을 절대 소수가 독점함과 동시에 사회의 피해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사회 부정의(Social Injustice)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런 현상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2:8'은 옛말이고 '1:99'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세상은 진보한다.", "진보는 필연이다."는 말로 마냥 자위할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바꿔왔고,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반문해봐야 할 시기가 아닐까?
첫 번째는 기존의 환경운동이 사회 진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해왔냐는 것이다.
사회생태론 주창자인 머레이 북친은 환경문제가 생기는 원인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는 구조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 지배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에서 비롯되었고, 이런 위계질서를 바꾸지 않으면 환경문제는 끊임없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환경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고,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환경문제에 천착하기보다는 사회 시스템과 사회 자체를 바꾸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서구식의 근대화나 산업화가 환경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 이 시점에 머레이 북친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인구 증가나 이로 인한 자원의 남용만으로 지금의 환경문제를 설명하기에는 현대 환경문제는 너무 복잡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문제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 문제가 생겨났고,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방법들이 노동이나 문화 등 다른 분야와 불협화음을 내는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자연환경은 모든 것의 근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회의 다른 부문을 지배하는 구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따라서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통합적인 시각에서 사회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녹색주의는 '환경'이라는 단일 분야에 매몰된 경향을 보여 왔다. 물론 녹색주의 자체가 진보의 한 축을 담당해왔고, 사회적으로도 많은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통합적 시각이라기보다는 현안에 따라 국지적으로 조력하는 수준이었다. 환경문제의 발생 원인이 사회문제의 발생원인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환경운동은 사회운동으로 진보될 필요가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연대'와 '참여'
또 하나의 고민은 세상이 급변하는데 반해 녹색주의는 처음 문제의식이 발생한 20세기 초반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 세계경제포럼은 "변화하는 힘의 균형 The Shifting Power Equation"을 주제로 삼았다. 향후 미래를 움직일 지구촌 화두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고, 이에 따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논의됐다. 우리는 그들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우리 공동의 미래를 위해 해결 방법을 찾으려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로서는 기득권 유지를 위해 미래를 잡아내고 변화에 맞춰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같은 기간 열린 세계사회포럼의 주제는 '빈곤'과 '반전'이었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이고 포럼 역시 성공적이었다지만, 도출된 방법은 여전히 '저항'뿐이었다. 아프리카의 빈곤은 선진국과 정치인들의 책임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 세계경제포럼은 아프리카 빈곤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를 어떻게 활용한 것인지를 논의했다.
시대가 읽혀지지 않는 저항은 저항다운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저항만으로도 의미는 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저항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소수의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세상을 잠식하고 있는데 매양 똑같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자라고 주장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녹색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시민사회'라는 틀 속에 갇혀 스스로의 정당성만 되뇌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건 '환경단체'가 아닌 '환경'이고, '시민사회'가 아닌 '시민'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연대'와 '참여'다.
그런 고민의 결과, 이제 나는 진보신당 지지를 말한다.
진보신당은 내가 고민해왔던 사회 자체의 변화, 모두가 함께 하는 공동의 미래를 기치로 내걸었다. '평등, 생태, 평화, 연대'라는 진보신당의 모토는 이를 잘 대변해준다.
'평등'은 인간 간 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일의 가치이다. 특히 "생산의 성과를 공유"하겠다는 진보신당의 평등 개념은 환경문제의 근본 원인이었던 '지배구조'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녹색주의에 꼭 필요한 관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생태'는 기존 좌파 세력이 가진 맹점이었던 '생산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기제다. 특히, 생태문제를 자신들의 주요 정체성으로 제시한 정당은 사실상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진보신당을 지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평화'는 '생태'와 더불어 현 사회구조를 극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특히 우리나라는 통일문제라는 당면 문제가 있고, '평화'는 지속가능한 사회의 근간이 된다는 점에서 주요한 가치이다.
평등하고, 생태적이며 평화로운 사회는 꿈꾸는 사람들의 '연대'로 가능하다. 진보신당은 이러한 사회 구축과 "우리 공동의 미래"를 위해서는 모두가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정치권에서도 간간이 이런 모토를 내걸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필요에 의한 차용이었지 그런 정체성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문제의식에 관한 노력이 지속적이지 못했고, 근본적으로는 사회와 함께 가겠다는 것이 아닌 이끌고 가겠다는 지배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녹색주의는 그런 움직임이 탐탁치 않았지만 필요악 수준으로 규정하고 그 길에 동참했다. 그 결과 사회는 정체되었고, 진보는 쇠락했다.
진보신당은 이런 사회적 문제들이 자신들에게도 있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과거와 결별을 선언했고,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지금 수준으로는 갈 길이 너무 멀고, 가는 방법도 미숙하긴 하지만 진보신당이 내건 기치는 우리 사회가 가야하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
고통이 노정되어 있긴 하지만 이제는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이 길에 동참하기로 한다. '적록연대'라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 같은 건 난 모른다. 중요한 건 우리가 보고 있는 가치를 위해 손을 맞잡아야하는 시점이고, 그걸 담아내겠다고 나선 것이 진보신당이라는 점이다.
어떤 친구들은 그건 나의 정치적 성향에 불과하다고, 또한 제도권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다고 푸념할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사실이다. 전진을 장담할 수 없는 준비되지 못한 상황들이 그런 부정적인 인식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진보신당은 이제 싹을 틔운 작은 움직임에 불과하고, 우리의 기대치를 만족시킬만한 역량도 부족하다. 금번 총선에 녹색 비례대표를 내지 못한 것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보신당의 수준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내가 걱정하는 건 준비되지 못한 상황은 그런 부정적인 인식에 기인한 것이고, 결국은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악순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보신당이 연대를 요청하고 환경진영에 추천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보를 내지 못한 건 진보신당의 수준이라기보다는 분명 우리의 수준이었다. .
이젠 내가 다른 녹색 친구들에게 손을 내민다.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같이 지켜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에게 '진보'를 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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