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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폭력'과 한국의 우파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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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폭력'과 한국의 우파 민족주의

[기고]달라이 라마의 비폭력과 중화주의의 폭력

지난 27일 베이징 올림픽 서울성화 봉송 중 일어난 폭력 사태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이번 사건은 중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한국 사회가 보인 모습은 똑같은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도 던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달라이 라마의 방한은 정부의 비자 발급 거부로 번번히 무산됐었다. 그 이유는 한중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 이처럼 한국 정부는 중국에 대해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했었다. 이번 '성화 폭력' 사태도 성화 봉송을 막겠다는 시민단체들에 대해선 엄포를 놓았지만 중국 시위대에 대해선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또 '성화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이 또 다른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이어서도 곤란하다. 자존심으로 포장한 '애국주의적 선동'은 위험하다. 이번 사건은 '국가나 애국심'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돼야 한다. 이같은 내용을 담은 문학평론가 오창은 씨의 글을 싣는다. 이 글은 대안지식연구회에서 주 1회 내는 정치사회비평이다. 편집자.

달라이 라마의 웃음

"하루에 한 가지라도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합시다. 남을 위해 해줄 것이 없다면 웃읍시다. 내 마음 속에 있는 평온함을 상대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화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에너지를 교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웃음은 가장 좋은 표현입니다. 선한 의지를 전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감춰진 선한 의지를 일깨웁니다. 남을 볼 때 거울을 대하듯이 웃음으로 대하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번 성화 봉송 폭력 사태와 관련해 자료를 찾던 중 발견한 달라이 라마의 인터뷰 내용이다. 베푸는 마음을 소박한 언어로 표현한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거기다 웃음이라니. 달라이 라마는 웃음을 통해 선한 의지를 교감하자고 했다. 웃음은 육체적 반응을 통해 폭발적으로 발생한다. 그것은 부정적 현실에 대한 휘발시키는 긍정적 효과를 갖고 있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웃음에서 반억압적이고 해방적인 측면을 읽어내곤 했다. 달라이 라마의 웃음에 관한 담화는 낭만적이면서도 뭉클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티베트와 달라이 라마가 처해 있는 상황이 역설적 감응을 자극해, 뭉클하면서도 아린 연민을 자아내게 하기 때문이다.

라사, 1959년의 대학살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가쵸의 삶은 탄압과 망명, 수난으로 얼룩져 있었다.

1959년 3월,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수도 라사를 탈출해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해야 했다. 그것도 순탄한 망명이 아니었다. 티베트인들은 맨몸으로 중국군의 라사 사원 진입을 저지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희생자를 냈다. 자살 행위와 같은 저항으로 중국군의 진입을 저지하려 했던 티베트인의 모습을 상상할 때, 가슴을 여미게 하는 숭고함이 엄습해 온다. 그 상황에서 진정한 공포를 느꼈던 이들은 임박한 죽음을 감지했던 티베트인들이 아니라, 총칼을 들고 있었던 중국군이 아니었을까? 티베트인이 죽음으로 지켜내려 했던 것은 달라이 라마였고, 티베트인의 정신적 가치였을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때 희생된 티베트인이 12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야만의 시절이고, 끔찍한 학살이었다. 일본의 난징 대학살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는 중국이지만, 그 자신의 티베트에서 또 다른 '학살의 추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 무저항' 원칙을 고수하며, 중국에 대한 폭력적 저항은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는 티베트의 무장 게릴라 조직인 캄바를 설득해 해체하고, 평화주의 원칙을 고수해 나가기도 했다. 그가 1989년에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도 이러한 평화주의적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달라이 라마는 '분리주의자' '악의 화신'으로 취급받고 있다.

서울, 오성홍기의 폭력

티베트의 정신적 깊이와 숭고한 태도에 비춰 볼 때, 중국인들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중화주의적 애국심'에 갇혀 있다. 지난 4월 27일, 베이징 올림픽 서울성화 봉송 중 발생한 충돌도 중국인의 내면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지난 3월, 티베트에서 발생한 시위에 대한 중국의 과잉진압에 대해 세계 여론은 비판적이었다. 한국 시민사회 단체도 티베트 사태에 우려를 표명하며, 마침 성화 봉송 서울 행사와 겹치면서 서울이 들썩거리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티베트 사태로 시작된 사건의 불똥이 서울 한복판에서 활활 불을 지핀 형국이다.

올림픽 성화라는 상징을 지키려 한 중국인의 열정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열망하는 중국인의 마음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싶어 했던 한국인의 마음과 다르다고 말할 수야 없지 않은가? 게다가 티베트 문제를 올림픽과 연결해 '올림픽 보이콧'에 관한 논의까지 나온 것에 대해 중국인들은 상당히 억울해 하는 분위기다. 중국인의 감정적 대응의 이면에는 다양한 심리적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인권'의 문제를 내세워 중국의 몰아세우는 미국과 서방에 대한 반발심리도 작용하고 있고, 최근 급성장한 중국의 위상에 대한 자부심도 한 켠에는 자리하고 있다. 또한, 한국 내에서 중국인이 온당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는 피해의식도 있었으리라. 어떤 부분에서는 한국 사회의 미숙한 국제 감각이 중국인에 대한 편견을 지속시켜 왔고, 그 와중에서 드러나지 않는 재한 중국인의 불만이 폭력 사태로까지 번졌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의 탈북자 강제 송환 문제를 곧바로 '성화 봉송 저지'로 연결시키려 한 일부 단체의 직접 행동이 문제를 키운 측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시위대의 폭력적 태도는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무저항'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반대되는 의견을 용납하지 않고,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응징하려는 태도에서 '중국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이 일 수 밖에 없다. 지금 중국의 상황은 '오직 한 곳에만 집중'하게 함으로써, 중화 민족주의의 기풍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패권적 중화주의의 부활을 예고하는 징후이다. 진정 공포스러운 것은 중국의 대내외정책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맹목적인 중화주의적 애국주의이다. 인간의 맹목적 열정은 통제 불가능한 '광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우파 민족주의는 안전한가

그렇다면, 한국사회가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보인 반응은 어떠한가? 중국인 시위대의 폭력만 비난 받아야 하고, 이에 대응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는 균형 잡힌 것이었는가?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달라이 라마의 한국 방문이 정부당국의 거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직후부터, 불교인을 중심으로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끊임없이 추진되었다. 2000년에는 방한 추진위원회가 결성되기도 했고, 2005년에는 '만해 대상 평화부문 수상자'로 결정되어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적극적으로 초청하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한국정부가 스스로 비자를 거부했고, 심지어는 외교부에서 초청자에게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한국정부의 태도 이면에는 중국의 강한 압력이 존재했다. 정부관계자는 항상 "한-중 관계 등 전반적 상황을 고려할 때 달라이라마의 입국을 허용하기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한국 정부는 정권의 변화와 상관없이 중국에 대해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 이러한 정부의 수세적 태도가 '성화 봉송 과정의 폭력 사태'를 방관한 측면이 있다. 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은 성화 봉송을 방해하는 시민단체 등의 행위를 엄벌하겠다는 것이었다. 중국 시위대에 대해서는 한중 관계 등을 내세워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중국 시위대 폭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한국이 중국에 대해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인 것이다.

더불어, 일부 언론이 중국 시위대에 보인 공격적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한다. 중국인의 중화주의적 애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활발히 전개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민족감정을 자극해 또 다른 애국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로 삼으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아니오'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예로 <조선일보>는 "한국 사람이 중국서 공안 때렸으면 죽었을 것"(4월 28일 인터넷판)이라며 한국인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선동을 했고, <동아일보>는 "폭력 저지른 중국인 전원 잡아들여야"(4월 28일자 인터넷판)라며 응징을 촉구하기도 했다. 오만한 중국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신문의 논조이다. 이러한 여론 몰이 속에서 '중국인 유학생 살생부'나 '추방설' 등이 나돌아 한국내 중국인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외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러한 '한국인 자존심론' 이면에는 '중국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태도'가 자리 잡고 있어 우려스럽다. 게다가 자존심으로 포장한 '애국주의적 선동'이라니, 주인답지 못한 아량 없는 태도이기도 하다. 분명한 원칙에 의해 냉정하게 처리해야 할 '폭력 사태'를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어 우려스러울 뿐이다.

강압은 저항을 부른다

한국 내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주인의 위치에서 포용력을 갖고 '원칙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민족감정과 애국주의 고취를 통해 과도한 대결 국면으로 치닫는 것은 퇴행적일 뿐이다. 세계 시민의 가능성을 역설했던 괴테가 "문화의 수준이 가장 낮을 때 민족주의적 감정이 가장 강하고 격렬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중국인의 중화주의적 애국주의는 세계시민의 일원으로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하는 과정에서 나온 진통일 수 있다. 특히 중국 젊은이들은 세계 속에서 중국의 역할을 고민해야 하는 유학생들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사회의 일원이기도 하다.

오히려 한국 시민사회는 이번 사건을 미래사회에서는 '국가나 애국심'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중국인 시위대의 애국적 태도가 한국 사회에서 심각한 폭력을 야기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국가간 갈등을 예견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제 한국 사회는 다양한 부분에서 중국인과 함께 생활해야 하고, 일본인과도 함께 생활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각 국가가 호명하는 '애국주의적 선동'에 맹목성을 보인다면, 그것은 끔찍한 세계화일 뿐이다. 그것도 외국에서 어느 정도 다른 민족, 다른 국가 사람들과 생활을 해 본 경험을 가진 이들이 국가의 애국주의적 호명에 맹목적이라면, 더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역사는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맹목적 애국주의가 어떤 피의 학살로 연결되었는가를….

그런 의미에서 달라이 라마가 이야기하는 '우정'에 대해 다시 되새겨 본다.

"지금 일부 티베트인은 중국인들을 경멸한다. 감옥에서조차 중국인들과 티베트인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무자비한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뢰 형성을 통해 해야 한다. 강압적인 수단은 더욱 거센 저항을 부를 뿐이다. 티베트의 진정한 자치야말로 신뢰 회복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우정이 있는 행복한 사회 건설이 내 목표다. 티베트인과 중국인 사이의 우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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