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책갈피 펴냄) ⓒ프레시안 |
최무영 교수는 이론물리학을 전공하면서 권위 있는 국제 학술지에 최근까지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한, 한국물리학회학술상·한국과학상 등 학계의 권위 있는 상을 다수 수상한 정상급 과학자이다. 평소 소신이 뚜렷한 학자로 존경하던 분이라 반가움과 호기심이 앞섰다. 주로 시사를 다룬다고 여기던 <프레시안>이 과학 강의를 싣는다는 점도 궁금증을 더했다.
여러 편의 연재 중 그날 접했던 강의는 현대물리학의 큰 줄기의 하나인 양자역학과 관련된 것인데, 관찰자의 측정과 관찰 대상의 상태에 대한 해석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흔히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예시되는 이 주제는 물리학도로서 자주 접할 수밖에 없는, 하지만 깊은 이해를 위해 고민을 늘 미루던 그런 문제였다.
매사 대충 지나기를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기대를 갖고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을 읽어 나갔다. 오랫동안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히는 느낌이었다. 물리학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와 흔치 않은 명쾌한 설명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친 김에 앞서 실렸던 강의를 몇 편 더 읽었고, 이후에는 게재가 예고된 날짜를 기억하며 들러보는 팬이 되었다.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는 2008년 1월 28일부터 8월 22일까지 매주 3회씩 총 90회에 걸쳐 <프레시안>에 '최무영의 과학이야기'라는 꼭지로 연재되었다. (하지만 책에서는 25회의 강의로 편제되어 있다.) 연재 기간을 헤아려 보니 30주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셈이다. 그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상당한 분량의 강의록은 2002년부터 2005년 사이에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을 대상으로 했던 그의 강의가 바탕이 되었다. 강의 내용이 물리학 대부분의 분야를 섭렵하면서도 수식의 사용은 매우 절제되어 있어서,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에게 더욱 적절하면서도 유익했을 것이다.
모든 종류의 지식이라는 것에 해당되겠지만, 본인이 이해하는 것과 다른 이를 이해시키는 것은 별개의 능력을 요한다. 그의 강의 중에는 내가 수십 년간 배우고 가르쳤던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과학과 인문학·예술과의 연관성을 찾아 그 경계를 넘나드는 해박함과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설명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배우고 있는 학생으로서, 항상 자신의 미흡한 강의를 반성하는 교사로서, 훌륭한 학습 지침서를 발견한 기쁨을 느꼈다.
책 제목에서 명시하듯이 이 책의 본론은 물리학 강의이다. 그의 강의는 물질과 생명, 그리고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이론물리학의 전 분야를 망라한다. 물리학자라고 해도 거의 대부분은 어떤 좁은 분야를 전공으로 하기 때문에 전 분야에 걸쳐 두루 정확한 지식을 갖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물리학에 대한 그의 해박한 이해는 놀랍다.
또 이론물리학에서 수학은 필수적인 도구이다. 따라서 수식을 사용하지 않고 물리학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말 대신 몸짓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들은 이런 어려움을 쉽게 뛰어 넘는다. 앞에서 언급한 측정과 해석의 문제 같은 것이 많은 예 중의 하나이다. 사실 이런 물리학 개념 중에는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자들도 헛갈려 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강의는 물리학자에게 더욱 명쾌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강의하는 물리학 이론을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이나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약간의 의구심이 남는다. 물리학자 눈에는 쉽게 풀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이들에게는 엉뚱하게 왜곡되어 전달된 경우들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은 독자로부터의 반향을 통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본론이 물리학 강의라고 했지만 사실 이 책은 여느 물리학 강의와 다르게 그 범위가 물리학에만 갇혀 있지 않다. 그의 강의는 자주 물리학을 벗어나, 문학, 예술, 경제, 정치 등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들 사이의 연관성을 조명한다.
일례로, '대칭성 깨짐'이라는 물리학의 보편이론을 강의하면서 그는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입자의 대칭성이나 물의 상전이와 같은 물리계뿐만 아니라, 시각 인지와 관련된 심리학 연구, 심지어 화가 고흐의 그림과 바흐의 음악에 이르기까지 '대칭성의 깨짐'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이론인 것을 지적한다.
그의 물리학 강의는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과학적인 사회 및 정치 현상을 비판하는 데도 활용된다. 지율 스님의 단식 투쟁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던 경부고속철도 공사로 인한 생태계 파괴의 문제도 그 바탕에 과학적 사고가 결여된 것에 기인한다는 통렬한 비판은 부디 우리의 정책 입안자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대목이다.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비과학적인 미국의 '인디언'이나 '과학기술'과 같은 용어들. 게다가 이런 용어들이 때로는 사회에 편재하는 반과학적인 성향을 반영하는 것임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사실 그는 우리말 용어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한국물리학회에서 우리말 과학 용어를 정리하는 일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우리말 용어 사용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노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중등 과학 교육 과정에서조차 우리말 과학 용어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우리말 용어들이 생소하여 오히려 이해를 방해하는 경우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강의에서 자주 접할수록 우리말이 주는 장점들을 느껴가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우리말 사용은 과학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요즘도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캠퍼스커플'(대개는 더 줄여서 'CC')을 '교정 짝'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우리말에 대한 그의 관심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재미있는 착상이 아닌가! 편의적 획일성을 위한 '글로벌리즘'의 기치가 드높은 이 시대에, 그의 용어의 '신토불이'에 대한 고집은, 다양성을 소중히 여기고 생태계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그의 과학적 사고와 맥이 이어지는 듯하다.
이 책의 주된 관심사가 물리학에만 갇혀 있지 않을 때, 최무영 교수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 책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은 무엇이며,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맡는 역할은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이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과학의 위력은 과학적 지식이나 거기에서 파생된 기술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 즉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라는 점. 자연에 대한 이해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한다는 점. 우리의 삶이 과학과 분리될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점. 그리고 과학이 문화의 중요한 근간이라는 점 등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의미를 온전히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강의를 닫으며 최무영 교수는 마지막에 그 답을 던진다. "과학이 보여주는 자연, 우주와 물질, 그리고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살피고 삶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를 가지기 바랍니다."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득하고, 과학이 인문, 예술, 사회를 망라한 세계의 활동과 갖는 필연적인 연관성을 통찰하는 경지에 오르지 않고는, 과학이 주는 깊은 의미를 성찰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과학은 인간과 자연을 비추는 등과 같은 것이다.
그 자신이 비록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 빛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빛이 헛되거나 위험한 것이 아닌지는 가릴 줄 알아야 그 빛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세상이라는 밝혀진 길을 따라 삶이라는 여정을 갈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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