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 2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영화가 모더니즘의 종언과 그 예술의 정신을 지지했던 부르주아적 문화의 해체라니,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삼촌과 '연인'관계를 맺을 정도로 그의 예술을 숭배했지만, 노동계급인 남편은 깔봤던 영화 속 헬렌의 삶은 모더니즘 예술이 처해 있던 이중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를 초월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모더니즘의 운명은 이 영화에서 '가족'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난다.
| ▲ <여름의 조각들> 촬영현장에서 올리비에 아사야 감독과 줄리엣 비노슈 |
헬렌의 죽음 이후,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한 곳에 모인 아들딸은 장남인 프레드릭의 희망과 달리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머니가 남겨 놓은 것들을 처분하고자 한다.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을 불신했던 헬렌의 예상은 적중한 것이다. 헬렌의 사후 프레드릭의 상실감에게 공감하는 유일한 존재는 가정부 엘로이즈 뿐이다. 이런 엘로이즈는 노동계급의 정직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꽃병에 얽힌 에피소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천문학적인 값어치를 지닌 프랑스 모더니스트의 예술작품이지만,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냥 헬렌이 좋아했던 꽃을 꽂아놓는 꽃병일 뿐이다. 프레드릭이 유품 중에서 갖고 싶은 것을 가져가라고 했을 때, 가정부는 얼마짜리인지도 모른 채, 그 꽃병을 고른다. 엘로이즈에게 그건 엄청난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이라기보다 평생을 함께한 헬렌의 추억이 담긴 '기념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경제학 교수이면서 경제학의 과학성을 의심하는 프레드릭만이 엘로이즈의 선택을 이해한다.
영화는 마치 토마스 만의 소설처럼, 프랑스적 부르주아의 가치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냉정한 필치로 그려낸다. 예술은 박물관으로 보내져야하고, 남은 이들에게 필요한 건 일용할 양식에 보태기 위한 '돈'이다. 초국적 삶을 살고 있는 아드리엔에게 프랑스는 의미 없는 '본적지'이다. 미국적 삶에 익숙한 아드리엔의 국제성은 세계화(globalization)의 실체를 보여준다. 아드리엔이 문화적 세계화를 암시한다면, 제레미는 훨씬 구체적으로 경제적 세계화의 현실을 증거한다. 그는 '중국'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잡기 위해 집을 팔고 싶어 한다. 그에게도 역시 프랑스는 의미 없는 낡은 세계이다. 그의 자식들은 프랑스보다 오히려 중국을 더 선호한다.
| ▲ <여름의 조각들>은 부르주아적 안온한 삶과 문화가 세계화 앞에서 붕괴하는 과정에 대한 담담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
자칫 민족주의에 대한 촌스러운 옹호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이런 설정들은 '계급의식'이라는 안전장치 덕분에 다른 의미의 결들을 드러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화가 무력화시킨 건 과거에 집착하는 부르주아의 삶이지, 인민이 구성하는 프랑스적인 삶 자체가 끝난 게 아니라는 메시지가 영화 속에 숨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프레드릭의 딸이 남자친구와 함께 담을 넘어 달려가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미국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는 프랑스 십대들은 인종도 계급도 불문이다. 이들에게 한때 프랑스적인 것이 꽃피어났던 위대한 예술가의 저택은 그냥 하룻밤의 놀이를 위한 '평등'의 공간에 불과하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장소는 새로운 주체들을 구성해낸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에 프랑스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배제된 것들의 향연이다. 영원한 것을 고집하는 부르주아적인 형이상학을 <여름의 조각들>은 허락하지 않는다. 과거가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묵묵히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프레드릭이라는 개인은 세계화의 양면성을 인지하고 있는 프랑스 지식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놀이에 열중하는 십대들이 암시하듯이, 세계화는 낡은 것을 사라지게 하지만, 또한 새것을 돋아나게 만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파리에 갔을 때, 오르세 미술관에 처음 들렀던 그 순간이 나에게 떠올랐다. 동방에서 온 '이방인'이 프랑스 모더니스트의 작품들을 보기 위해 오르세에 들어섰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여름의 조각들>이 말하고자 하는 '변화'의 본질일 것이다. 이 본질은 프랑스적인 것의 붕괴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국제주의의 토양이기도 하다. 프레드릭은 회한에 젖어 있긴 하지만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추억이라는 사적인 것이 박물관으로 옮겨져서 공적인 것으로 사회화하는 과정을 이 영화는 친절하게 묘사한다. 프레드릭은 내밀한 사적인 공간을 잃었지만, 그로 인해 박물관이라는 만인의 공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아이러니에 대해 이렇게 아름답게 해설해주는 영화가 어디에 또 있으랴!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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