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봉준(화가, 신화미술관장 www.mafm.kr) |
전통이 부서지고 사라져 의미 해석이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의 전통문화는 4중5중고에 시달리며 왜곡 변질 소멸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다 짐작 하고도 남듯이 4중5중고라면 식민지, 전쟁, 군사독재식 근대화 (새마을운동), 서양종교의 배태적 유일신앙, 근대과학적 합리주의 교육 등입니다. 지금 여기서 지나온 날의 공과를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젠 웬만큼 다 아는 사실이고 이 글의 초점도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이런 수난의 길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최대의 축제로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 ▲ 한국 원주의 난장굿, |
| ▲ 아래는 연해주의 난장굿 |
신명은 민족을 넘는 보편성을 가진다. 그러나 사회적 한과 유전적 반복으로 집단무의식의 원형형식이 특정한 행동유형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것은 종족의 문화원형이다.
그 힘의 원천이 문화원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보름맞이는 우리 겨레문화의 문화원형입니다. 수십 세기 동안 내려오는 고유한 삶의 양식이 대보름굿에 아직도 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화적으로 말하면 신화의례는 탄생, 죽음, 성장, 재생 등 삶의 매듭을 상징적 행위로 공유하는 집단적 문화양식입니다. 의례는 집단무의식이 공유하는 문화적 체험입니다. 그래서 쉽게 살아지지 않고 반복됩니다. 여기서는 수십 세기 동안 반복 되어지는 일정한 행동의 유형,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축제인 대보름의 의미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의례를 먼저 살피고 그 의례와 관련됨직한 신화와 상징을 찾아가 봅니다.
이를테면 동네를 단위로 대결놀이를 하는 줄다리기, 소머리대기, 기세배 등의 대응의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밤을 지세며 불을 밝히며 어둠을 이기려는 쥐불놀이, 달집놀이, 잠 안자는 보름새기 등의 제야(除夜)의례가 있습니다. 새해 첫 보름달의 신성한 힘에 소원을 비는 기원의례로 분류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대보름맞이 의례들은 지금 손상된 채 남아 있기에 이 의례들에 깃든 신화를 밝히려 하지 않으면 의례는 한낱 전통형식주의에 머무르고 매너리즘으로 추락할겁니다. 전통문화의 깊은 이해가 없다면 '전통은 무조건 좋은 것' 이거나, '전통은 거추장스러운 봉건잔재'로 취급하고 맙니다. 맹목주의나 청산주의는 둘 다 문화를 진정 사랑하는 태도도 아니고 문화교양인이라 말할 수도 없습니다.
대보름축제의 3가지 의례상 특징인 대응(對應)의례, 제야(除夜)의례, 기원(祈願)의례를 하나씩 살펴봅니다. 다 아시다시피 줄다리기, 기세배, 차전놀이 등은 옆 마을끼리 서로 편을 나누어 어르고 힘 대결하고 어울리는 놀이입니다. 대립에서 화합으로 나아갑니다. 서로 묵은 대립과 갈등을 신성한 힘을 빌어서 초극적인 화해의 길을 찾습니다. 신성한 힘을 가진 신화를 빌지 않으면 대극은 좀처럼 화해하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암줄과 숫줄을 함께 만들기를 체험하고 암수합작의 줄 꼬기, 그리고 합쳐진 심신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힘은 모두 신성한 힘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담은 의례입니다. 신화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에서 서로 화해 할 수 없는 대극이 초월로 나아가는 탈출구가 생긴 것입니다. 지금 나타난 의례는 물적 형식이고 그 이면의 신화와 상징은 대보름의 내용입니다. 대보름은 한겨레의 거대한 의례신화였습니다. 여기서 현실의 대립과 갈등을 푸는 대단원을 이루려 했던 것입니다. 자발적이고 집단무의식적인 대응의례로 착종되고 경직된 대립적 사회적 질서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소망하고 창조하였던 것입니다. 이 대립을 푸는 것을 사회적 질서 안에서 찾지 않고 본래 다름을 인정하고 어울려 살아 마땅하다고 여긴 본성의 질서(신화)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암수, 남녀의 천성적 대립으로 귀환시켜서 갈등을 무력화시키며 웃고 춤추며 스스로 신이 되었습니다. 신화는 신을 말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신이 나는 것'입니다. 줄다리기는 원래 밤에 하는 것입니다. 암숫줄을 서로 어르면서 음담패설 같은 질펀한 말도 거친 행동도 밤의 혼돈에 휩싸입니다.
"크게 좀 벌려라, 좀 더 밑에서 꽂아라, 딱따구리는 참나무 구멍도 뚫는데 열린 구멍도 못 찾냐."
이것은 신화의 키치입니다만, 원신화의 흔적을 짐작하게 합니다. 인류족 시조시화인 오누이신화에서는 오빠와 누이의 혈연적 관계도 여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하고 자손을 갖고자 하는 본성의 질서보다 하위임을 천성으로 확인합니다. 생존의 본성이 하늘의 뜻임을 암시하는 오누이 신화는 대보름 대응의례에서도 암수대응이 사회적 대립을 환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신화적 원리를 감춘 채 들어 내고 있습니다. 암줄과 숫줄의 상징물이 신화의 흔적을 말할뿐 망실한 신화는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상징으로 전하는데, 상징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진리를 은유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그 암숫줄 상징에 가담하는 순간, 묶은 사회적 대립은 '칼로 물 베기처럼' 부질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흔쾌히 상대를 받아드리게 됩니다. 신화와 상징을 잃어버린 사회는 대립을 초극할 방법을 잃었음을 의미합니다. 사회적 갈등을 사회적 질서로 풀 수 있다는 법치 만능주의로는 인간의 생존과 인정의 본성적 가치를 보존할 수 없습니다. 대립적인 사회질서에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질서를 수용하는 열린 사회에 해답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적 질서를 확인하고 열린 사회를 창조 하고자 대보름 맞이는 있었던 것입니다.
| ▲ <달맞이> 김봉준 목판화 부분도 1998년작 |
제야의례에서도 잃어버린 신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야(除夜)란 말 그대로 밤을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어둠을 축출하고 밤을 빛으로 밝히는 의례입니다. 달집놀이, 쥐불놀이, 밤새 불 밝히고 밤새기 등인데 이 의례는 어둠과 빛의 싸움입니다. 어둠을 이기려는 빛의 신화가 여기 있습니다. 어둡고 추운 긴 겨울을 넘어 봄을 적극적으로 맞이하려는 빛 의례입니다. 어둠은 죽음의 상징이고 빛은 생명의 상징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힘의 원천은 이 빛에서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처음 불 밝히는 행위를 통하여 빛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상징의례입니다. 달맞이, 달집맞이가 그것입니다. 신화에서 빛맞이 신화는 희망, 부활의 신화입니다. 함경도 금벌레와 은벌레 신화(일명 창세가)는 우리의 인류창조신화가 빛 맞이로 시작하였음을 알려 줍니다. 금빛 나는 벌레 다섯과 은빛 나는 벌레 다섯이 점점 자라서 남녀사람이 되고, 그 남녀들이 점점 자라나서 짝을 지어 자손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농사도 금빛•은빛 생명의 씨앗이 땅에 접촉하여 점점 자라 떡잎이 되고 줄기가 되고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이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절의 '대보름 빛 맞이'는 생산과 부활의 시작을 알리는 신화를 품고 있습니다. 죽음의 상징인 어둠에서 부활의 상징인 빛으로의 대전환기가 새해 첫 보름, 대보름입니다. 빛의 신화는 씨앗과 농사법을 전했다는 박혁거세 부인 알영 신화에서도 보이고 유화의 주몽 잉태 신화에서도 보입니다.
신화에서 빛과 어둠은 본래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닙니다. 선과 악은 하나이고 절대선도 절대 악도 없는 하나입니다. 결코 완전히 섞이지도 않고 나뉘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둠을 벗어나려는 염원으로 제야의례를 치르며 빛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 제야의례의 신화상징으로는 고구려의 해님 달님을 들겠습니다. 고구려 벽화 속에 있습니다. 해님 달님은 처음부터 해와 달이 아닙니다. 해와 달의 빛을 맞이하러 하늘로 승천하는 지신입니다. 천의를 입어서 땅으로부터 승천할 수 있었습니다. 뱀으로 상징하는 지신이 인간의 상반신을 갖춘 지인합일신이 되어 어렵게 승천하여 하늘의 빛- 해와 달을 잡았습니다. 천지인(天地人)의 은유입니다. 천지인 삼태극(三太極)의 의인화입니다. 아니, 신인(神人) 상징이 먼저 있고 그 후 추상적 사유와 도상으로서 삼태극이 나중에 출생하였을 것입니다.
| ▲ 고구려 벽화- 해님과 달님/ 길림성 집안현 대왕촌 소재. 오회분4호묘 고분벽화 |
신화란 영혼이 실재하는 것으로 육신화합니다.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벌레로, 인간으로 실재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신화입니다. 땅의 축축하고 어두운 뱀 지신이 날개 옷을 입은 신선의 힘을 빌어 입고서야 비로소 하늘로 승천하여 빛을 잡게 됩니다. 신도 애써 노력해야 겨우 이룹니다. 빛을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것으로 어둠을 이기려 한 것이 재야의례인 달집놀이, 쥐불놀이, 달맞이입니다.
세 번째, 대보름 풍속에는 기원의례가 있습니다. 크게는 하늘 기원과 땅 기원입니다. 하늘 기원은 빛과 달을 향하여 소원을 비는 발원입니다. '일월성신에게 발원입니다.'하는 고사반이나 언덕위에 올라가 달을 우러러보며 소원을 비는 것이나, 달집과 장승과 솟대에 소원지를 달고 손빔을 하는 것이 모두 기원의례입니다. 또 하나는 땅에 드리는 의례입니다. 지신의례입니다. '어이어루 지신아 당산지신을 울리보세~'를 불림하며 풍물가락을 열 적에 우리는 지신이 무엇이며 왜 지신밟이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깜깜해 진 이유는 신화세계를 상실한 의례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다가 얼마 안가서 풍물의 근간이었던 지신밟이는 간대 없고 농악, 사물놀이만 판치는 민속문화의 파행을 잡지 못하게 될 것 같습니다. 민속의례에 숨은 신화를 재발견하고 재해석하는 노력이 시급합니다.
| ▲ 지신밟이 목판화들- 들당산, 샘굿, 마당밟이 / 김봉준 작 1998년 |
지신밟이 신화는 분명 있었습니다. 우리가 게을렀고 우리문화를 홀대해서 모르고 지나쳤을 뿐입니다. 여기에 제주도 문전본풀이 신화가 지신밟이의례의 배경 신화임을 밝힙니다. 궁금하신 분은 찾아서 참고 바랍니다. 다만 여기서는 대보름 풍속으로 아직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는 못난 후손들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는 마음으로 지신밟이 의례에 깃든 신화적 의미를 정리해 봅니다.
지신밟이의 지신류를 3가지로 봅니다. 지신은 대지신과 살림신과 방위신으로 분류 할 수 있습니다.
1. 대지신 의례
대지 숲의 상징인 당산목 앞에서의 들당산과 날당산 / 생명의 젖줄 샘 앞에 서의 샘굿 / 강과 서낭당, 산신 등에게 올리는 의례굿
2. 살림신 의례
부엌(조왕), 집(성주), 장독, 우물, 곡간, 외양간, 측간, 마당 등 살림의 신성한 힘을 기원하는 살림의례
3. 방위신장 의례
오방위신과 앞 문전, 뒷 문전 신장 / 장승제
이상 의 세 가지 분류의 지신의례에서 신화적 의미를 찾아봅니다.
1. 대지신 의례는 지모신에 대한 감사의례입니다. 이것은 세계 지신신화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대지신화세계입니다. 우주목, 큰 산 큰 바위, 바다와 강, 숲과 호수, 큰땅, 기이한 기운의 거처 등 영혼이 실재하는 신성한 힘이 거기 있다고 보아 영혼의 교감과 체험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생생히 체험하는 것입니다. 지구를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을 언급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부터 인류는 사람이 태어나면 곧 어머니 젖부터 찾다가 젖을 떼고 나면 대지의 젖을 찾는 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가 지금은 슈퍼마켓에 가려져서 '대지의 젖'을 모르고 살 뿐입니다.
2. 살림신의례는 일상적으로 먹고 사는 살림살이의 소중함을 환기하고 살림의 물성- 물, 밥, 발효식, 가축 등에 깃든 신성함에 감사합니다. 혹자가 이런 살림고사를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살림살이의 신성한 힘을 이해 못해서 이고 동아시아 범신사상을 모르는 무지 때문입니다. 먹을 거리를 신성하게 보지 않고 물과 에너지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살림의 세속화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로라도 지신밟이 살림의례에서 다시 배워야 할 것입니다. 현대종교는 일상의 거처를 세속으로 보고 특별한 성지에서 성화를 이루도록 합니다. 자기종교의 배타적 성지화입니다. 그러나 지신밟이 신화의례는 일상의 거처를 성화하는 의례입니다. 땅의 온갖 동식물과 미생물이 서로 의존하며 먹고 먹히는 자연살림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우주의 별과 달과 해가 지구행성과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공생하는 전 우주가 큰살림이고 우리네 소우주가 작은 살림입니다. 이 살림을 신성하게 이해하며 감사하는 살림의례는 일상을 성스러움으로 환기하는 의례입니다.
3. 방위신장의례는 지금은 실감을 덜 느끼고 살지 모르지만 사방팔방으로부터 침입하는 유무형의 침입자에 대한 경계심이며, 터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해야 할 공간의 평화를 상징하는 의례입니다. 안녕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평화의례입니다. 지금은 문전신장을 대신하여 문에 붙은 사설경비장치가 있고, 마을 어귀 장승을 대신하여 파출소와 군대가 그 역할을 한다고 할 것입니다만, 평화의 신화와 상징이란 내면의 평화, 생존과 문화적 의미의 일상적 평화까지 고려한 것으로 세속의 물질과 제도권력으로만 대체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평화신화와 의례는 무엇인가 반문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대보름 풍습의 의례와 거기에 깃든 신화와 상징의 의미를 살폈습니다. 내일이면 정월 열 나흘 날 기축년 정월대보름 전야입니다. 민족명절 대보름의 의미를 민속적 해석에 그치지 않게 좀 더 깊고 멀리 돌아보고 내다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글을 썼습니다. 왜 우리민족은 대보름굿판을 세상에서 가장 큰 굿판으로 만들며 살아 왔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날 같습니다. 백여년 전 전봉준의 갑오농민 발아지가 백산인 것은 역사책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봉기의 날이 왜 하필이면 대보름굿판이었는지를 다시 숙고하게 합니다. 대보름굿은 사회적 질서가 어둠과 겨울로 경직되어 있을 적에 빛과 봄을 알리는 본능적 새 질서를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고, 이 깨우침을 온누리의 신성한 봄기운 같은 본능의 힘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 때가 다시 민중봉기의 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문화원형의 반복적 행동의 숨은 의미를 외면한다면 어둠을 넘으려는 신화적 저항에 직면 하고 말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보름맞이 신화와 역사는 이미 일상의 성화로, 백산봉기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보름에 전국에서 맞이할 대보름 축제들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살림평화 기원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할 것입니다. 그 기원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어둠과 혼돈을 넘어서 빛을 찾는 대보름맞이 신화는 지금 이 땅에서 끊임없이 계속 될 것입니다.
김봉준: 화가, 신화미술관장(www.mafm.kr)
| ▲ 대보름 지신밟이 신화의례- 문굿. 김봉준 작, 1998년작 회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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