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간절히 바라는 인문학의 본모습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이란 어떤 조건에도 매어있지 않은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삼"(34쪽)으며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를 다뤄서 보다 나은 삶의 가치를 탐구하려"(230쪽) 하는 학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소위 'CEO 인문학'으로 대표되는 최근의 인문학 열풍은 무가치할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인문학'이라는 타이틀이 내뿜는 고상한 아우라로 위장막을 친 후, 산업·기술 중심에서 정보·지식 중심으로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흐름에 재빨리 올라타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인간의 탈을 쓴 자본은 '인간성'을 근거로 한 저항을 무력화시켜버릴 위험성마저 지닌 것이다.
| ▲ <절망의 인문학>(오창은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
인문학의 근본주의란 결국 주어진 현실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자유와 짝패를 이룬다는 저자의 주장에 반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이 근본주의가, 실천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이끌린 나머지 훼절되고 만다는 점이다. 물론 근본주의를 끝까지 고수할 때 이론이 공허한 말장난에 빠져버릴 위험성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마따나, 이론적 근본주의는 언제나 역사로부터 탈각된 '언어의 감옥'에 빠질 위험성을 언제나 안고 있다. 그러나 제임슨조차 '언어의 감옥'을 부수는 작업을 '정치적 무의식'의 이론을 수립하는 것을 통해 시도했다는 점은 음미될 필요가 있다. 이론의 정치화·역사화란 이론 바깥의 현실에 그것을 직접 적용하여 즉각적인 실천을 이끌어내는 것으로는 성취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론 자신의 '무의식'에까지 파고들어 가는 내향성이 이론의 정치성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철저한 내향성과 자기반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면, 저자가 '간절히 바라는' 인문학의 "학문의 자유"(232쪽)는 실현될 수 없다. 저자가 3장에서 비판한대로, 작금의 한국의 인문학은 시장주의와 국가주의에 포박되어 비판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연구지원금이 연구자의 밥을 먹여주는 현실이, "보편적 진리"(232쪽)라는 이상 성취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보편적 진리"는 "대중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30쪽) "인간 윤리의 재구성"(23쪽)을 시도할 때 도달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의 욕망 아니면 '대중'의 욕망이라는 양자택일에서 후자를 택하는 것이 인문학의 자유인 셈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은 '대중'의 자유이지 인문학의 자유는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저자는 인문학이 응당 누려야 할 자유를, '대중'의 욕망에 대한 복무로 한정시켜 버리고 있다.
나는 여기서 '대중'의 천박함을 비판하고 엘리트주의에 입각한 학문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현실의 중독에 대한 해독제로 대중의 욕망을 내세우는 대중주의가 오히려 더 나쁜 엘리트주의로 귀결될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대중은 본질상 그 윤곽을 그릴 수 없는 범주이며, 그들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책의 마지막 장에서 '약소자'라는 범주를 제시하며 그들을 현실 변혁의 주체로 호명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중' 가운데에는 자본의 폭압적 지배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눈앞의 달콤한 "소비문화"(290쪽)에 현혹되거나, 무한 경쟁 체제로부터 언제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312쪽)에 시달리며, 저항이라는 올바른 길을 택하지 못하는 자가 부지기수이다. 예컨대 "농민과 노동자면서도 도시 소비자와 부르주아의 과잉 소비를 욕망한다면 그 사람은"(346쪽) 체제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대중이라는 덩어리로부터 체제의 논리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며 변혁을 담당할 누군가를 가려내야만 한다. 저자는 그들을 자본의 권력에 기생하는 '유력자'에 반대하는 '약소자'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약소자'는 누구인가?
약소자의 새로운 정체성은 억압당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저절로 윤리적 주체로 구성되지 않는다. 저절로 저항 주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몸에 새겨진 자본주의 체계의 억압적 흔적이 자기 표현의 의지와 결합하는 순간 약소자는 윤리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주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349쪽)
약소자는 자기가 억압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료히 인식하고 그것을 표현해 낼 줄 아는 자이다. 사회의 절대 다수를 폭압적으로 지배하면서도 갖가지 "상징 조작"(348쪽) 기법을 동원하여 그것을 교묘히 감추는 자본의 기만을, "지적이면서 감성적으로 느끼는"(346쪽) 자가 약소자이다. 이제 문제는 대중들이 어떻게 이 "새로운 삶의 감수성"(347쪽)을 가지게 되는가이다. 저자의 대답은 이렇다. 그것은 약소자로서의 "자기 표현의 의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억압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자본이 제공하는 틀에 고착되어 있는 자들은 자기의 진짜 정체성을 모른 채, 인간됨의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는 한낱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인문학자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이 자본이 제공하는 달콤한 꿈으로부터 깨어나 약소자로서 자기를 표현하도록 돕는 일이다. 그러나 인문학자에 의해 유도된 이 각성은 결국 타인에 의한 계몽의 산물이지, "자기 표현의 의지"의 산물은 아니다. 이때 인문학자는 대중의 잠을 깨우는 '선각자'가 되고, 동시에 대중은 인문학자가 없으면 인간이 아닌 기계에 그치고 마는 존재가 된다.
분명 저자의 목표는 대중과의 소통을 통한 새 시대의 윤리학의 제시에 있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 이르고 보면, 이 '소통'이라는 목표는 대중의 계몽을 통한 엘리트주의적 정치학으로 실현되고 있다. 대중주의(populism)를 적대시하면서 노골적으로 엘리트 지배를 주장하는 현실 정치의 논리는 피지배 대중들에게 반감을 일으킴으로써 오히려 어떤 저항의 빌미를 제공한다. 그러나 대중주의를 지향하면서 엘리트 지배의 비인간성을 주장하는 인문학의 논리는 대중을 비인간화를 오히려 더 철저히 한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인문학은 자유를 잃고 대중 사회의 인간성이란 완전히 회복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저자가 그토록 바라는 인문학의 근본주의는 인문학적 탐구의 결과를 현실에서의 실천으로 곧바로 전용하는 것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현실 개입을 위한 인문학 연구는, 저자 스스로 경계한 "자기 위안에 매혹된 인문학자가 교육이라는 계몽주의적 태도로 세상을 만나"(19쪽)는 것에 그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문학은 더 철저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자기의 이론을 반성하는 것에서 멈춰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문학은 그렇게 끝없는 반성 속에서 스스로를 '위기'로 몰고 갈 때 제 자리를 찾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실천적 역할을 하기를 절망(切望)하는 것을 그치고 철저히 절망(絶望)할 때, 인문학의 현실 귀환이 비로소 가능하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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