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이없는 퇴행 현상을 가속화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서를 진작한다는 목적으로 시행 혹은 강요되는 독후감 쓰기다. 독후감이 숙제가 되고 평가가 되고 대회를 벌여 순위를 매기는 순간 게걸스레 책을 삼키던 우리 안의 아이들이 입맛을 잃는다. 헛구역을 하며 책에 대한 순수했던 열망을 토해낸다.
| ▲ <여행자의 서재>(이권우 지음, 동녘 펴냄). ⓒ동녘 |
'아는 사람'의 글을 읽는 일은 '모르는 사람'의 글을 읽는 것과 달리 어쩔 수 없는 애정과 민망함이 공존한다. 그럼에도 두껍거나 무겁지 않은 이 책을 새삼스런 탄복과 묵지근한 감명으로 읽었다. 나는 그가 선비이고, 산객이고, 술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여행가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리하여 '여행'을 주제로 삼은 숱한 책들의 숲을 헤쳐 가는 노정은 독후감이 아니라 여행기일 수밖에 없고, 나 또한 독후감 숙제를 받은 독자가 아니라 길잡이를 좇아 책의 세계를 탐험하는 여행객이 되었다.
소설가, 시인, 역사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서른 즈음에' 다다른 젊은이, 퇴물이 될 위기에 처한 늙은이, 어린아이가 딸린 어멈…… 저자의 '페르소나(persona)'이자 길벗인 이들의 면면은 지극히 다종다양하다. 숲, 산, 사막, 도시의 뒷골목, 원시의 오지…… 그들이 떠돈 미지의 세계 또한 세상의 모든 공간과, 공간을 넘어선 시간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한결 같이 자신의 삶을 걸고, 자신의 삶만큼 여행한다는 사실이다. 게으름과 기만과 두려움을 박차고 기꺼이 낯선 세계 속으로 투신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행은 경계를 넘어서 존재를 전환한다. "문학하는 자는 월경(越境)을 꿈꾸는 자"(김연수)임을 깨달으면 이광수의 '가짜' 월경과 김수영의 '진짜' 월경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이처럼 불온한 꿈에서 비롯된 여행은 삶의 장대 높이뛰기와 같다. 관광객으로 풍광을 일별하기보다는 여행자로서 낯선 눈, 집요한 눈, 황홀한 눈을 부릅뜨고 "앞서 다녀온 이들이 남겨놓은 잠언을 장대로 삼아 더 높이 뛰어올라 더 장엄한 것들을 보고 그것을 기록"(알랭 드 보통)한다. 하지만 저자의 관심은 애초부터 신기록의 갱신에 흥분하여 씩씩거리는 '선수'들에게 있지 않다. "진정성에 뿌리내리지 않은, 공허한 수사로 얼룩진 글"을 걷어차고 "어떤 한계를 돌파해내는 순간에 떠오른 언어를 낚아챈 글"을 집요하게 찾아낸다. 따라서 그는 금욕의 수사학에 다름 아닌 번역과 같은 여행, 내밀하고도 치열한 산책과 같은 여행, 그리하여 삶이란 "빵에 붙어 있는 맛있는 건포도만 쏙 빼서" 먹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자유와 치유의 여행에 애정을 쏟는다. 왜, 어떻게, 무엇을 찾아 여행하는지 '요령'이 아닌 진짜 '기술'을 찾는 과정에 촉수를 뻗치는 것이다.
| ▲ <여행자의 서재> 저자 이권우. ⓒ프레시안(최형락) |
그런데 <여행자의 서재>의 미덕은 좋은 책들을 잘 골라 소개하는 길잡이로서의 역할에만 있지 않다. 저자는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책벌레, 영락없는 책상물림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읽기를 업으로 삼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그는 책의 숲을 떠도는 여행가로서 영원히 헤매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탐험, 열정, 각성이라는 여행과 독서의 공통점을 열쇠꾸러미로 차고 절걱거리면서도 활짝 열린 감옥 같은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 고집스런 서치(書癡)가 그려내는 책세계로의 여행은 흐뭇하고도 황홀하다.
이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이미 고고학자다. 지은이가 세워놓은 세계를 속속들이 들춰보고 펼쳐보며 시시콜콜 따지니 말이다. (…) 그 세계에 발 디딘 이들은 행복하다. 현실이라는 땡볕에 지친 영혼들이 여기로 들어와 숨을 고르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으니. 정말, 기적이다. 여권을 발급받고 비행기 표를 사고 여행지를 물색해 호텔을 예약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 없다. 그냥 책을 펼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세계로 곧바로 빠져든다. 이런 여행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아무리 멋진 여행이라도 영영 돌아오지 않고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원심력을 잃은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실종이며, 어디에도 없는 곳을 찾아 헤매는 일 또한 여행이 아니라 방황일 뿐이리니. 유토피아 대신 유토피스틱스(Eutopistics: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책벌레는 방 안 깊숙이에서 세계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그가 외친다.
"가보아라, 그리고 다시 돌아와 세워라!"
좋은 길잡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즐거웠다. 기념품도 알뜰하다. 눈앞에 펼쳐진 스물네 갈래로 뻗힌 길을 하나씩 홀로 밟아볼 욕심으로 가을이 총총하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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