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 임근준의 서평 "'국가의 적' 동성애자는 어떻게 해방되었나"(2014년 1월 10일 '프레시안 books' 게재)
무엇보다도 우선 '프레시안 books'가 고맙다. 지난 해 말에 출간된 필자의 책 <나치즘과 동성애>(문학과지성사 펴냄)가 서양의 낯선 과거에 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프레시안 books'는 출중한 인문학자 한 분에게 서평을 부탁하고 또 게재했다. 서평을 써준 임근준 님은 더욱 고맙다. 탁월한 미술평론가이자 동성애자 운동가이기는 하지만 역사학이 본업이 아닌 분이, 대중적이기는 하지만 전문적이기도 한 내 책을 성실히 읽어주었고 열정적으로 비판해주었다. 나는 임근준 님의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임근준 님의 서평에는 오독도 있었다.
임근준 님이 여러 가지를 지적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동성애자의 고통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내 책에서 동성애자들이 나치로부터 가혹하게 처벌받지 않았다고 독자들이 생각한다면 오해이며, 그들은 일반 형무소에서나 강제수용소에서나 가혹한 대접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적시했다(425쪽). 수용소로 한정해서 말하자면 나는 동성애자들이 수용소 내의 수용소라고 할 수 있는 '형벌막사'에 전원 수감되었고, 사망률 역시 60%에 달했다고 강조했다. 정치범의 사망률은 41%였다(426~431쪽).
임근준 님이 정확히 인용한 부분도 있다. 나는 나치 전체주의의 틈새는 넓었으며 동성애자들은 그 틈을 "사뿐히 이용했다"고 서술했다. 오해의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나치가 동성애자를 가혹하게 억압했다는, 임근준 님도 강조하였고 기존의 연구에도 늘 등장하던 주장은 진실이다! 그러나 동성애자가 나치즘의 틈새를 천연덕스럽게 이용했다는 나의 주장도 진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삶에는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공존한다는 진부한 발언을 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나는 그 두 가지 진실의 이면에 더 크고 더 결정적인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
약간 에둘러가도록 하자. 국내의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의 역사학자 조앤 스콧은 1991년의 한 논문에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여성사를 천명하고 그렇게 여성성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논문에서 스콧은 담론으로부터 독립된 인간 주체가 있고, 그 주체가 특정한 경험을 통해서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기존의 입론을 거부했다. 인간 주체와 그 정체성, 즉 노동자와 여성과 동성애자가 이미 담론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동의 주체와 해방 및 진보의 지평은 소멸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스콧은 담론은 완결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다고, 담론은 내적으로 갈등과 모순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담론적 구성물인 인간 주체는 담론 내부의 그 모순과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콧의 입론은 푸코와 데리다를 버무린 것인데, 그런 입장이 1990년대에만,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를 수용한 사람들만, 혹은 일부 페미니스트들만 제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남성의 역사>로 국내에 꽤 알려진 토마스 퀴네는 포스트구조주의가 아니라 해석학과 현상학에 입각하여 남성성의 역사를 연구한 독일의 역사가이다. 그런 그가 2006년에, 2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투입된 나치 병사들에 대한 연구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헤게모니적인 해석 틀"은 "전체주의 국가들에서조차 성공을 자신하지 못한다. 의미론적으로 구성된 현실은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더불어 퀴네는 나치 병사들의 "경험 공간"이 다양했다고 강조했다. 스콧과 퀴네의 입론이 유의미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저항이 부지불식간에 지배와 공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도록 해주는 동시에 저항의 지점을 새로이 적시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쓰면서 스콧 및 퀴네와 인식관심을 공유했다. 그리하여 나는 성 담론이 동성애자를 장악하는 면모와 그 실패,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그 모순을 능동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담으려했다. 나는 우선 1900년경의 성과학자들이 어떤 담론을 생산했는지 분석했다. 동시에 나는 동성애자들의 편지에서 성과학자들의 담론과 어긋나는 삶과 성애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긋나는 경우가 심지어 절반이 약간 넘었다. 이어서 나는 세계 최초로 공식적인 동성애 해방운동을 개시한 독일의 동성애자 '지식인들'이 동성애 해방을 주장하면서도 자연성 담론과 독일 국가 및 국민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또한 1920년 독일에서 세계 최초로 출범한 일반인 동성애자들의 '운동 조직 지도부'가 지식인들보다도 오히려 진보적이게도, 자연적인 성이 아니라 인권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부르주아 이성애자들의 가치인 "품위"를 동성애자들에게 주입하려 하였고, 그런 한에서 지배 담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나는 동성애자들의 놀이문화에서 '일반인 동성애자들'이 품위가 아니라 "환희"를 구현하고 그렇게 지배문화에 맞서던 면모를 찾아냈다.
나의 인식관심은 서부 독일의 공업도시 에센 게슈타포의 동성애 수사파일을 분석할 때에도 견지되었다. 에센 게슈타포의 동성애자 수사파일은 295개이고, 처리가 기록된 225명 중에서 83명(36.9%)이 증거 부족으로 방면되었고, 기소된 112명(49.8%) 중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7명, 훈방된 사람이 9명(합하여 피소된 사람의 14.2%)이었으며, 실형을 선고받은 97명의 평균 형량이 7개월 2주일이었고, 거세당한 사람이 2명이었다. 게슈타포가 사법 기관을 경유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처벌하던 수단인 '보호구금' 조치에 처해진 사람은 모두 17명이었고, 그 중에서 강제수용소에 보내진 사람이 5명이고, 그 5명 중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2명이었다.
나는 그 통계들로부터 나치가 동성애자를 별반 억압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도출하지 않았다. 나는 위 통계를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적인 내적 모순의 결과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치의 담론 및 지배의 한 가운데 모순이, 즉 구멍이 깊이 패어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는 모순 두 개를 적시했다. 나치는 여성이 배제된 전투적인 남성들만의 공동체, 즉 "남성동맹"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한 운동이었다. 문제는 남성동맹과 남성 동성애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데 있었다. 이는 참으로 오래된 이야기다. 예컨대 영문학자인 이브 세지윅은 서양 근대 부르주아 사회가 여자를 배제한 남자들만의 에로틱한 결속에 근거하고 있고, 바로 그 본질 때문에 동성애혐오증이 서양 근대 남성주의 문명의 본질적인 계기라고 주장했다.
남성동맹 단체에 속하지 않는 평범한 남성들이 그랬다면, 남성동맹인 나치는 어떠하였겠는가. 따라서 간첩을 잡아야 하는 게슈타포는 바로 그 때문에 동성애자를 "국가의 적"으로 분류했지만, 또한 그 모순 때문에 동성애를 발본색원할 수 없었다. 동성애자를 가려내겠다고 나치 남성동맹 단체들을 모조리 뒤지다가는 남성동맹이 발휘하리라고 기대하던 역동성이 훼손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치에게는 또 다른 모순이 있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이전의 제2제정 때부터 독일 국가는 법치국가였다. 다만 권위적이었다. 나치는 그 국가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국가를 필요로 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런 "규범국가"가 작동하지 않으면 산업 자본주의가 훼손되고, 그렇게 되면 정복전쟁에 필요한 경제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나치는 절멸전쟁을 벌이고, 유대인을 죽이고, 정신병자를 비롯한 소수자들을 억압하거나 학살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규범국가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테러국가"의 업무였다. 문제는 테러국가로서만 작동하면 규범국가는 파괴되기 마련이라는 데 있었다. 나치 국가의 본색은 규범국가와 테러국가라는 '모순'된 두 얼굴을 지닌 "이중국가"였던 것이고, 나는 이를 나치 동성애정책에 적용했다.
논리만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나치는 남성동맹이라는 정체성 때문에서라도 '동성애'를 소멸시키고자 했다. 나치는 당시의 동성애자 수를 200만 명 내지 300만 명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나치는 유대인과 달리 그들을 모두 제거하려 하지 않고 일부는 제거하고 나머지는 '치료'하려 했다. 그 많은 '독일' 남자는 노동자와 군인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성애자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단 말인가? 여성과의 결혼 혹은 성교는 이성애자라는 증거가 아니라 위장일 수 있었다. 설혹 남자들끼리 성애를 했다 하여 검거되었어도, 술 한 잔 걸친 터에 어깨동무하고 가다가 어쩌다가 딥키스를 했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 그런 사람들을 모조리 검거하고 거세하거나 죽이려하다가는 독일 "민족공동체"가 훼손될 것이었다. 따라서 나치는 우물쭈물하고, 증거가 부족하면 풀어주기도 하고, 고문이 가한 것이 확실하면 무죄를 선고했다.
동성애자들은 바로 그 모순, 혹은 틈새를 이용했다. 나는 에센 게슈타포의 수사파일에서 그동안 서양의 어느 연구서에도 적시된 바 없는 놀라운 모습을 발견했다. 동성애자들이 나치 치하에서도 여전히 동성애자 전용술집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동아리를 결성하여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카드도 치고 스테이크도 먹고, 섣달그믐남과 카니발 기간에는 바이마르공화국 시절과 다름없이 여성복을 입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다. 그들은 그 모임을 하필이면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에 만들어서 1937년까지 이어나갔다. 나치는 동성애자 단체와 저널을 없애버리고 동성애자들의 공적 사회성을 파괴했지만, 동성애자들은 그 환희의 사회성을 사적인 차원에서 복원하였던 것이다. 그토록 능동적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저항 개념을 체제에 대한 의식적인 도전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체제의 요구에 불응하는 행위 혹은 체제의 정책적 의지가 봉착한 한계로 규정한다면, 나치 치하 동성애자들의 사적인 사회성은 정확히 저항에 해당한다. 나는 이를 가리켜 나치 치하의 동성애자들이 체제의 틈새를 사뿐히 이용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물론 오해할 수 있다. 나는 동성애자들이 게슈타포에게서 겪어야 했던 폭압적인 대우를 세밀하게 서술하지 않았다. 이는 에센의 게슈타포 파일에 그런 면모가 부각되어 있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내가 동성애자들의 능동성을 강조하다가 저지른 잘못이기도 하다. 오해였어도 독자의 느낌은 그 자체로 고유한 법, 나는 나의 서술로 인하여 혹시라도 상처 받은 독자들에게 공손히 사과드린다.
이제 임근준 님이 언급한 여타 사항에 대해 간단하게 답하겠다. 임근준 님은 나에게 1990년대에 미국의 성과학자 레이 블랜처드가 "아들을 낳을수록 게이가 나올 확률은 높아진다"고 주장한 것을 모르냐고 비판했다. 솔직히 나는 블랜처드를 모른다. 그러나 내 책에는 나치 치하의 한 성과학자가 그와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는 점이 적시되어 있다. 카이저빌헬름 정신의학연구소 족보인구학과 과장인 테오 랑이 남녀의 일반적인 성비(性比)인 106대 100을 넘어서는 '현실의' 성비는 남자들 중에 그만큼 많은 게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랑은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나치 경찰로부터 동성애자들의 가족력 자료를 넘겨받아 작업했다(322쪽). 블랜처드와 랑의 논거는 동일하지 않지만, 논리는 동일하다. 블랜처드의 입장은 1900년경에 펼쳐진 바 있는 성 자연성 담론의 반복인 것이다. 게다가 성을 (재)생물학화 하는 논리에는 위험한 정치성이 도사리고 있다. 생물학은 사회적 판본일 경우조차 궁극적으로 인간과 삶과 사회를 DNA의 기계적 결과로 만든다. 그런 입장은 인간과 삶과 사회가 인간이 싸워서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그리하여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점을 탈각시키기 십상이다.
그 맥락에서 임근준 님은 블랜처드 논란 이후 "성 지향을 개인의 선택"으로 보는 입장이 관철되었다고 나를 깨우쳐주었다. 그러나 나는 내 책에서 마그누스 히르쉬펠트가 이미 1910년에 당시 지구상의 인구 18억 명 가운데 4300만 개의 성 유형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을 적시했다(85쪽). 나는 또한 2009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히르쉬펠트가 성을 자연이 아닌 문화로 바라보면서 성 선택 이론을 제창하였다고 해석했다. 2000년대의 성 선택 이론은 1900년경의 독일에서 문화론의 모습으로 이미 개진되었던 것이다.
임근준 님은 또한 내가 2차 대전 이후 미국에서 전개된 동성애 운동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나는 '전후 서양 동성애 해방운동'에 대한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나는 1880년대에서 1940년대에 이르는 시기 독일에서 나타난 동성애 담론,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 동성애 해방운동과 그들의 담론, 일반 동성애자들의 일상과 저항을 연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전 지구적인 동성혼 법제화"를 이끌어낸 것으로 임근준 님이 평가한 그 "의사(擬似) 인종화 과정"을 1880년대부터 1940년대의 독일에서 추적하면서, "의사 인종화"에 담론 권력의 억압과 동성애자들의 저항이 변증법적으로 얽혀있음을 논증한 것이다.
임근준 님은 또한 내가 "동성애(Homosexualität)"이란 단어를 만들어낸 카를 마리아 벵케르트를 딱 한 번만 언급하는 데 그쳤다고 비판했다. 벵케르트는 1869년에 프로이센 법무장관에게 '익명의' 진정서를 보내, 동성애 행위를 처벌하는 프로이센 형법이 북독일연방에 확산된 것을 비판한 인물이다. "동성애"라는 단어는 그 문서에서 역사상 최초로 등장했다. 벵케르트는 내 책에 자주 언급된 카를 하인리히 울릭스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울릭스가 자신의 단어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관계를 단절한 사람이고, 울릭스는 동성애 해방을 역사상 최초로 공개적으로 주장한 인물이다. 울릭스와 결별한 벵케르트는 구스타프와 예거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예거는 내 책에 자세히 언급된 남성주의 초남(超南) 동성애론자인 프리들랜더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3장). 동성애론을 공개적으로 제시한 적이 없는 벵케르트의 유산은 "동성애"라는 단어와 남성주의 성 이론의 흐릿한 배경으로 역사 속에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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