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카스트로 "차베스 사망은 남미의 비극"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카스트로 "차베스 사망은 남미의 비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이그나시오 라모네, 카스트로를 만나다

"카스트로는 노련한 사색가이자 독서광"

그날은 봄의 부드러움, 무지갯빛 햇빛, 맑은 바람이 느껴지는 쿠바 겨울의 멋진 날들 중의 하루였다. 요오드 냄새가 가까운 바다에서 밀려왔고, 미풍에 흔들리는 종려나무가 살랑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여자 친구와 함께 이제는 곳곳에 많이 생긴 팔라다르(국영 레스토랑이 아닌 민간 레스토랑) 중의 한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나의 연락책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30분 후에 당신을 보고자 합니다. 서두르세요." 나는 여자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고 레스토랑을 떠나 지시해 준 장소로 갔다. 이목을 끌지 않을 정도의 자동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운전사는 곧장 쿠바 수도 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멕시코에서 3일 전에 쿠바에 도착했다. 나는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에서 <우고 차베스, 내 첫 번째 삶>이라는 새 저서를 북살롱에 전시했다. 이 책은 볼리바르 혁명의 리더인 차베스와 나눈 대담을 엮은 책이다. 매년 이 시기의 쿠바 수도 아바나는 '라틴아메리카 신(新)영화 페스티벌'로 활기가 넘친다. 페스티벌 조직 위원장인 이반 지루드가 친절하게도 이 페스티벌 창시자인 알프레도 구에바라를 위한 추도식에 나를 초대해 주었다. 2013년 4월 사망한 천재적 창조자인 구에바라는 나와 아주 가까운 친구로 쿠바 영화의 중흥을 이끌었다.

평소 때처럼 나는 피델 카스트로의 소식을 물었다. 내가 카스트로를 못 본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본 것은 2012년 2월 10일 아바나에서 북살롱이 열렸을 때 개최된 '평화와 환경 보호를 위한' 대(大)회합에서였다. 그때 카스트로는 다양한 국적의 지식인 40여 명과 토론을 벌였다.

대회합에서는 '미디어 권력과 정신 조작' 섹션을 시작으로 하여 다양한 주제가 토의되었다. 카스트로가 나에게 이 섹션의 권두 발표를 요청했었다. 내 발표가 끝난 후 카스트로는 예리한 지적을 했는데 나는 그 지적을 잊을 수가 없다. "지배적 미디어가 퍼뜨리는 거짓말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실을 말하고 그 진실을 퍼뜨리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회합이 지속되는 9시간 동안 카스트로는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활력과 지적 호기심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참석자들과 다양한 아이디어를 교환했으며, 성찰적 주제들을 제안했고, 새로운 지평, 혁신,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예측하면서 다양한 전망을 내놓았다. 노련한 현자처럼 여전히 세상의 새로운 변화들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가는 자동차 안에서 "지난 19개월 동안 그가 많이 변했을까?"라고 자문해 보았다. 최근 몇 달 동안 그는 대중 앞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지난해보다 더 적은 기사들과 견해들을 발표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카스트로는 상냥한 부인 달리아 소토 델 발레와 함께 거실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거실은 햇빛이 넘치는 정원 쪽을 향해 열린 밝고 커다란 방이었다. 우리는 뜨거운 포옹을 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비수같이 빛나는 눈빛을 가진 그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10년이 지난 후 <피델 카스트로, 두 가지 음색의 자서전>이라는 책에 대해 기나긴 토론을 이어가려는 것처럼, 그가 대화를 몹시 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스트로는 우리가 미처 앉기도 전에 프랑스 경제 상황과 프랑스 정부의 태도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두 시간 반 동안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이런저런 온갖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그 만남은 직업적인 것이 아니라 우정을 나누는 만남이었다. 나는 우리 대화를 녹음하지도 않았고, 대담 중에 어떤 메모도 하지 않았다. (이 기사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모든 인용 문구는 기억에 의한 것이다. 인용구들은 카스트로가 한 말 그대로가 아니다. 저자의 기억에 근거하여 나중에 재구성된 것이다. 절대 카스트로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쿠바 '지도자'가 현재 갖고 있는 몇 가지 견해들을 알기 위한 것이고,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간에 '피델 카스트로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만델라의 진짜 친구

이미 말했다시피 그는 아주 건강했다. 이미 사망한 지 일주일이 지난 자신의 친구 넬슨 만델라에 대해 왜 아직 아무 말도 안 하는지에 대해 그에게 질문했다. "기사 초고를 거의 완성했습니다. 만델라는 인간 존엄과 자유의 상징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놀라운 품성과 인상적인 지적 고귀함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어제 아파르트헤이트를 옹호했던 사람들이 오늘 만델라의 친구들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묘하지 않습니까? 참 파렴치합니다! 만델라에게는 적이 없고 오직 친구들만 있다고 하니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 누가 만델라를 감옥에 처넣었습니까? 어떻게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그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만델라는 자신의 진짜 친구들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석방되었을 때 그의 첫 번째 제스처 중의 하나는 우리를 방문하러 쿠바에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쿠이투쿠아나발르(앙골라의 도시) 전투(1988년)에서 쿠바 원정군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주의적 엘리트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파하여 앙골라와 나미비아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돕지 않았다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무너지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는 감옥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핵폭탄을 여러 개 갖고 있고 그것을 사용할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카스트로가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친구 우고 차베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카스트로가 아직도 심각한 상실의 상태에 빠져 있다고 느꼈다. 카스트로는 거의 눈물을 흘릴 뻔하면서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사령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고 차베스, 내 첫 번째 삶>을 '단 이틀 만'에 읽었다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이 제2부를 써야 합니다. 사람들은 2부를 읽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우고 차베스를 위해 그 일을 해야만 합니다"라고 나에게 말했다. 이때 달리아가 오늘이 2013년 12월 13일이고 아주 우연히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두 사령관이 처음으로 아바나에서 만난 날이 바로 정확히 19년 전 오늘이라고 일러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치 이 상황이 갑자기 우리의 만남에 설명할 수 없는 장엄함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 피델 카스트로. ⓒ위키미디어커먼스
카스트로는 1994년 12월 13일 차베스와 머리를 맞댄 첫 번째 만남을 다시 기억하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완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나는 운 좋게도 에우제비오 레알(아바나의 사료편찬관이며 구도시 아바나의 복원을 책임진 장인)이 볼리바르(볼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를 스페인 식민 통치에서 해방시킨 남미의 영웅)에 대한 강연회에 참석해 달라고 그를 초대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카라카스(베네수엘라 수도)로부터 그를 실어오는 비행기 발판에서 그를 맞이하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차베스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만나고 싶어 조바심이 났었습니다. 우리는 토론하느라 하룻밤을 완전히 지새웠습니다." 나는 "카스트로 당신이 꼭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차베스가 나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을 카스트로에게 말했다.

카스트로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그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의 문화, 그의 지성, 그의 정치적 능력, 그의 볼리바르식 비전, 친절함, 유머 등으로 말입니다. 그는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위대한 지도자들 중의 한 거인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사망은 우리 대륙으로 보면 비극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친구를 잃어버린 나에게는 아주 커다란 불행입니다"라고 말했다.

"차베스 사망은 남미의 비극"

"그 순간부터 당신은 차베스가 볼리바르식 혁명의 선구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까?"라고 내가 물었다. "그는 핸디캡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이었고, 그 당시 실제적으로는 극단적 자유주의자였던 사회민주당 대통령에 반항하여 봉기했습니다.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는 1974~1979년, 1989~1993년 두 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는 국제사회주의연맹 부회장이었다. 그는 1989년 베네수엘라에 극단적 자유주의 ‘충격 요법’을 처방했는데, 이것 때문에 '카라카조'라 불리는 격렬한 대중의 봉기가 일어났다. 1992년 2월 4일 반군 수장인 우고 차베스가 그를 전복하려고 시도했다.) 수많은 군사 독재자들이 권좌에 있었던 당시의 라틴아메리카 상황에서 대부분의 좌파들은 차베스를 의심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했어요. 그러니까 정확히 19년 전인 오늘 내가 그와 토론을 했을 때, 나는 곧바로 차베스가 라틴아메리카 군인들의 위대한 전통을 물려받을 것을 감지했습니다. 말하자면 1938년 석유를 국유화하고 가장 위대한 농지 개혁을 시행한 멕시코 장군이며 대통령인 라자로 카르데나스(1895~1970) 같은 사람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 말입니다"라고 카스트로가 대답했다.

그 시점에 카스트로는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군인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으며,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페루 장군이 시행한 모델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차베스는 아직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인 1974년에 페루 여행을 하면서 벨라스코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차베스보다 몇 년 전인 1971년 벨라스코를 이미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인민연합과 살바도르 아옌데가 통치하는 칠레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벨라스코가 중요한 개혁들을 시행했지만, 그 역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차베스는 그 실수들을 분석해 보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회피할 줄 알았습니다."

베네수엘라 사령관의 모든 좋은 자질 중에서 카스트로는 특히 하나를 콕 집어서 말했다. "그는 젊은 지도자 세대를 양성할 줄 알았습니다. 그의 옆에서 이 젊은 지도자들은 정치교육을 확실히 받았고, 차베스 사후에 볼리바르식 혁명을 보장하는 데 그의 교육이 주효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증명해 주었습니다. 우선 지난해 12월 8일 선거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둔, 단호함과 명석함을 갖춘 니콜라스 마두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두로 주변에 라파엘 라미레스, 호르헤 로드리게스 등의 인물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 몇몇은 아주 젊었을 때부터 우고 차베스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의 아들이며 사진작가이고 특이한 몇몇 저서의 저자인 알렉스 카스트로가 우리 모임에 합류했다. 그는 여러 장의 '기념용'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또한 지난해 11월 24일 제네바에서 서명된 임시 협정과 이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주제는 카스트로 사령관이 아주 잘 아는 주제로, 나에게 완벽하게 분석해주면서 "이란은 민간용 핵에너지를 생산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곧바로 "우리 지구를 여러 번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아주 소수의 강대국들이 가진 과도한 핵폭탄과 그 확산으로 인해 세계가 위협받고 있으므로 핵의 위험성에 대해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카스트로는 기후변화를 근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여러 지역과 경제 활성화 정책에서 자신이 감지한 위험, 온실가스 배출 분야에서 석탄 채굴과 그 해로운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게다가 매일 수백 명이 탄광에서 발생한 사고로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19세기에 벌어진 일보다 더 나쁜 대량 학살입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농학과 식물학 문제에 대해서도 계속 관심을 보였다. 그는 녹색 물질이 가득한 여러 개의 작은 병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이것은 뽕나무 씨앗들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수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또 뽕나무 잎들은 누에의 먹잇감으로 쓰이는 고마운 나무입니다. 나는 조금 있다가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뽕나무 전문가인 한 교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끊임없이 공부를 하는군요"라고 내가 말했다. "정치 지도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을 때는, 시간이 엄청나게 모자랍니다. 그들은 책 한 권도 읽지 못합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런데 현재 현실 정치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 나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에 대한 관심이 그 문제와 연관된 다른 주제들에도 관심을 쏟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독서와 접촉을 이렇게 축적해가면, 곧바로 알고 싶은 많은 것을 다 알기에는 시간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2시간 30분이 흘렀지만 나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어스름한 빛도 없는 밤이 아바나를 감싸기 시작했지만 사령관에게는 아직도 다른 약속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와 달리아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작별인사를 고하고 자리를 떴다. 피델 카스트로가 여전히 놀랄 만한 지적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돼서 행복하다. (번역 : 고광식)

*<르몽드 디플로마티크>(2014년 5월호) 제공 기사.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