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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기록이 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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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기록이 재산이다

[귀농통문] 기록하는 농민, 생각하는 농민

이 글을 쓴 오도 씨는 충청남도 홍성에 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생태농업 전공부에서 농업 교사로 일한다. 시골에서 태어나 유기농업을 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호된 농사일을 배웠다. 어린 시절에 배운 농사일과 일본의 게이센 원예대학에서 배운 정원 만들기를 텃밭정원 속에 담으로 소농의 길을 걷고 있다. <텃밭정원 가이북>, <씨앗 받는 농사 매뉴얼>을 냈다.

어려서부터 나는 농사일을 했다. 유기농업을 하시는 부모님을 따라 다니며 콩 심으라면 콩 심고, 고추를 따라고 하면 고추 따고, 낫을 들고 벼를 베라고 하면 벼를 베었다. 콩을 심을 때나, 고추를 딸 때 혹은 위험한 낫을 들고 벼를 벨 때도 나는 부모님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따라 했다. 부모님이 구덩이 파는 시범을 보이면 호미로 구덩이를 파고, 낫으로 벼 베는 모습을 보이면 최대한 그대로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잘못 따라 해서 볏대 길이가 짧거나 벼 이삭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날카로운 시선과 책망을 피할 수가 없었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한순간에 한 해 농사가 엉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농사일은 그렇게 부모님의 모습 자체였지, 책을 보면서 공부하거나 일일이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하지도 않으셨다. 밭에서 일을 하시다가 산에 걸쳐 있는 구름이 심상치 않으면 소낙비가 내릴 걸 예상하고 뛰어가 널어놓은 고추를 걷고, 저녁 하늘에 달무리가 없이 깨끗하면 다음날 마음 놓고 벼를 길바닥에 널어두셨다.

그래서 농사의 농(農)자가 만들어졌나 보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어른들은 하늘에 뜬 별의 움직임과 달이 차는 모습, 먼 산에 걸려 있는 구름의 짙고 옅음을 보면서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는 세기와 방향을 보면서 날씨를 가늠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니 농부는 별(辰)을 보고 때를 알고, 논 김매기의 고됨을 노래(曲)하며 농사(農事)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 산업화의 끝자락에서 허덕이는 우리는 농사의 농(農)은커녕 우리가 먹는 쌀이 심지어 나무에서 달리는 줄 알고, 일 년 내내 토마토와 수박이 자라는 줄 안다.

그러니 우리 세대의 농부들에게는 기록이 필요한 것 같다. 부모 세대와 달리 농사일을 배우려는 의지도 약하거니와, 농사일을 가르쳐줄 이가 드물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다. 이제라도 일지를 꺼내 놓고 그날그날 논과 밭에서 하는 일들을 적어보는 것이다. 날씨도 기록하면서 이웃 농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콩을 심으면 콩을 심고, 고추를 심으면 고추를 심고, 시금치 씨앗을 받으면 나도 시금치 씨앗을 받으며 농사 일지를 적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10년 정도 지난 뒤에는 다음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되고, 부모님들처럼 농사일이 몸에 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 이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귀농통문

철 따라 농사짓는 사람이 '철든 사람'

우리는 흔히, 혼자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 어른들에게 깍듯한 예절로 대하는 사람, 아랫사람을 잘 살필 줄 아는 사람을 가리켜 철이 들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풀무학교 전공부의 어느 선생님은 "철 따라 농사를 지을 줄 알아야 철든 사람이야" 하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처음에는 뭐 그렇게까지 꼭 농사를 지어야 철이 드는 건가 농사를 안 지어도 훌륭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내 안에 부족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철 따라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에 늘 마음이 쓰였다. 철 따라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계절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이 무엇인지 알고, 제철에 수확한 채소를 요리해서 먹고, 나머지는 내년을 위해 저장하거나 씨앗을 받는 일일 것이다.

나와 우리 식구가 먹고살 쌀과 채소를 키우는 일 말고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지금은 수입 농산물이 넘쳐나는 세상이고,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지만, 내 손으로 식구들을 생각하며 정직하게 흙과 접촉하며 농사짓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내가 손수 농사지은 쌀과 채소에는 나의 숨결과 나의 생각과 우리 식구 모두의 땀과 기쁨, 괴로움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다.

농사 일지를 쓸 때 참고하면 좋은 '24절기'

농부들은 일 년을 열두 달로 나누고, 한 해를 24절기로 더 잘게 나눈다. 한 마디가 15일(1년이 365일이므로 16일이 되기도 한다)인 절기는 기후의 표준점이다. 따라서 절기 한 마디마다 날씨는 점차 달라지고, 날씨 변화를 알려주는 이름이 붙는다. 입춘으로 시작해서 우수, 경칩, 춘분, … 동지, 소한, 대한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농사는 한 해의 날씨 변화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날씨 변화를 아는 것은 24절기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몇몇 단체에서 나오는 농사 일지에는 반드시 24절기를 알 수 있도록 음력 표기가 되어 있고, 절기마다 해야 하는 일들이 섬세하게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텃밭보급소에서 다달이 발간하는 <텃밭신문> 통권 제 12호에는 '24절기 구조'에서부터 '농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날씨와 절기', '절기 따라 농사짓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학생들과 농사 계획을 짜는 수업 시간에는 <농가월령가>를 같이 읽고 24절기를 같이 공부하면서 일주일 동안 해야 할 일거리를 알아본다. 농사 일지를 처음 쓰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계절별로 해야 하는 일들과 감각을 몸으로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선배 교사의 농사 일지 참고하기

▲ 4월 9일 농사 계획 시간에 선배 교사가 설명해주는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해마다 듣지만 늘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다. 농부의 말을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3년 이상의 세월과 기록이 필요한 듯하다. ⓒ오도
2003년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실습 일지를 쓰고 있다. 처음에는 원예교사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주로 화단을 설계하고 화단에 심을 꽃씨를 뿌리고, 모종을 옮겨 심고, 화단을 가꾸는 일이 주된 일과였다. 정원을 새로 만들면서 나무를 심기도 하고, 학생들과 원예수업을 하기도 하다가 농사일이 바쁘면 논일, 밭일을 돕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려서부터 농사일이 몸에 밴 나는 원예일보다는 농사일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근무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농사 실습을 맡고 있다.

어려서 부모님께 배우며 하던 농사 방법과 교사로 일하시는 선배의 방법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사가 나 말고 두 분이 계시는데, 두 분이 참 다르다. 나 또한 이 두 분과는 조금 다름을 느낀다. 분명 처음 농사를 배울 때 저마다 다른 분들의 농사 방식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마을로 들어가면 집집이 농사짓는 방법이 다를 것이다. 다양한 작물이 있듯, 논과 밭에 다양한 생물이 있듯, 농부들도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농촌이 더 풍성해졌는지도 모른다.

풀무학교 전공부 학생들에게도 다양한 농부(비록 세 명뿐이지만)의 방법을 볼 수 있어서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농사 일지도 학생마다 다 다른 방법으로 정리한다. 농사 실습을 담당하고부터는 선배 교사의 농사 계획 수업을 듣기도 하고, 농사 일지를 빌려보면서 일주일간의 농사 일정을 세우기도 한다. 무언가 궁금한 부분이나 잘 모르겠으면 지금도 선배 교사에게 묻거나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물어보곤 한다.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농부에게 배우는 농사가 진짜 농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록이 재산인 농사 일지

풀무학교 전공부에 지원하는 대부분 학생은 농사일이 처음인 경우가 많다. 2년 과정이라 농사를 두 번 경험하고 나서는 손수 농사를 지어야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날마다 농사일이 끝나면 실습 일지를 쓰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실습 교사에게 검토를 받는다. 학생들도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일지를 쓴다.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꼼꼼하게 설명까지 덧붙여가며 쓰기도 한다. 농사일은 최소한 10년, 열 번은 경험해야 몸에 익는 것이 분명하지만 농사 일지를 성실하게 쓰다 보면 농사 또한 빨리 익히게 될 것이 아닌가.

공자는 백 번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보는 것이 낫고,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하는 것이 낫다(百聞而不如一見, 百見而不如一行)는 말을 남겼다. 단지 보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실행한 것을 기록해보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진짜 농사꾼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농사꾼. 내가 아는 진짜 농사꾼의 모습은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농사를 짓든 짓지 않든 계절의 순환 질서에 순응하면서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겸손하게 그리고 분수를 지키며, 모든 것을 아끼고 기르며 사는 우리들의 '엄마' 모습에서 대지의 포근함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5년 1월 현재 72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 전국귀농운동본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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