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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의 삶은 자유다

[귀농통문] 귀농 2년 차, '진주골' 적응기

나이 쉰을 앞에 두고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결단을 내리고 싶었습니다. 돌아보건대, 그동안 내 삶은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봤습니다. 농사였습니다. 농사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가슴 두근거리는 일을 해보고 싶었던 거죠.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는 전국귀농운동본부의 생태귀농학교에 참여하면서부터입니다. 처음엔 귀촌을 목적으로 농사 공부를 시작했는데, '생태농사'를 알게 되면서 귀농을 결심했지요. 그래서 내친김에 소농학교에도 입학했고요.

소농학교에서 생명농사의 신비를 경험하고 본격적으로 귀농 지역을 찾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가족들의 반대였습니다. 가족들은 내가 그러다 말려니, 했습니다. 소농학교에서 한 해 동안 농사 공부를 마치고 회사를 그만두고 농사지을 땅을 찾아 나설 무렵, 가족들은 그제야 실감했습니다. 가장의 실직과 낯선 직업으로의 전환을 동의하고 인정해준 아내와 아이들에게 고맙습니다. 아내와 함께하려던 귀농은 복잡한 가족 문제로 우선 어머니와 함께하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내 농사와 내 직업을 못마땅해하지만, 장자(長子)의 갑작스럽고 생경한 이직의 충격을 잘 견디며, 귀농 후 밥도 해주시고 농사일도 거들어줘 고마울 뿐입니다.

▲ 소로 쟁기를 몰아 밭을 가는 아랫집 어르신. ⓒ김우열

각설하고요. 농사를 생각하면 왜 가슴이 두근거렸을까? 그 까닭을 귀농한 뒤 알게 됐습니다. 농사는 생명을 키우는 귀한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씨앗을 보면서도 생명을 상상하지 못한 삶을 살았지요. 쌀은 쌀일 뿐이고, 콩은 콩일 뿐이었습니다. 밥상 위의 먹을거리일 뿐이었지요. 그 씨앗들을 보면서 생명을 보는 상상력이 부족했습니다. 내가 심은 옥수수 한 알이, 감자 한 조각이 싹을 틔우고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생명'이라는 기적에 대한 체험이었습니다.

농사는 또한 새로운 삶의 형태입니다. 단순히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지요. 태어나서 우리가 사회라는 곳으로 나서는 순간이 바로 경쟁의 시작이었고, 또 생존하기 위한 경쟁의 연속이었습니다. 늘 누군가를 이겨야 하고 앞서야 하고, 그래야만 칭찬받을 수 있었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사를 짓는 삶은 자연과 경쟁하는 삶이 아니고, 조화하는 삶일 거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느끼고 생명을 키우고 생명과 함께하는 기대가 있었기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이겠죠.

농사의 삶은 자유입니다. 나를 감시하는 상사도 없고 생산성을 독촉하는 조직도 없습니다. 그냥 내가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면 되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길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숲 속 새들의 소리도 실컷 들을 수 있고,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날 한더위에 식은 밥을 시원한 물에 말아 먹고 곤한 낮잠을 즐길 수도 있지요. 추운 겨울날 아궁이에 장작을 가득 넣고, 시골 방 아랫목의 따뜻한 정취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 온전한 자유의 삶을 상상하면 절로 가슴이 뛸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럼에도 농사는 삶이고, 자본이라는 굴레로 만들어진 이 사회의 한쪽입니다. 귀농은 우리의 삶을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 않습니다. 소유와 돈이라는 관점에서 삶은 더 팍팍해지고 어려워집니다. 애초에 귀농의 목표가 자급이었습니다. '생활비 정도는 어찌어찌 만들어지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사를 지으며 한 달에 100만 원 벌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가 배웠고 꿈꾸었던 소농의 삶과 생명농사의 정신으로는 더욱 그러합니다.

첫해 생명농사를 흉내 내며, 소득으로 연결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 시대와 이 사회는 농사꾼들에게 농사 이상을 요구합니다. 이 정권은 '6차 산업'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붙여 농사꾼더러 농사지은 것을 잘 포장하고 잘 팔아 알아서 잘 먹고 살아가길 강요합니다. 그런데 농사만도 힘든 일인데, 상품성 있게 꾸미고, 자본적 소비자의 관점에서 이른바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체험까지 시켜 돈 벌어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그들의 기준에서 귀농 성공이니까요. 우리의 귀농 선배들은 그런 관점에서 정말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도시에서의 삶보다 더 지난한 노력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본까지 축적하시는 분들이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해 소농주의와 생명 가치 지향의 농사를 통해 자급을 실현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한 삶은 적어도 우리 농촌사회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게 중간 결론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꿈꾸었던 농사의 삶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소농주의와 생명 가치 지향의 농사가 보편성이란 관점에서 경제적 자립으로 이어지기엔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생명 가치와 소농주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올해 귀농 2년 차에는 전통적 의미를 넘어 소농의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집 고치기

지난해 초, 귀농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집 고치기였습니다. 집은 될 수 있으면 손을 많이 손을 대지 않고도 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집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내 경제 형편에 맞춰 작고 소박한 집을 찾았습니다. 시골에서는 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집이라 해도 고쳐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아궁이 방의 구들을 수리하고 도배를 다시 했습니다. 도시 사람이 시골로 이주하면, 추위가 더한 것 같습니다. 함께 귀농한 어머니를 위해 특별히 단열에 신경을 더 썼습니다. 집수리는 되도록 친환경적으로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재료를 구하는 것이 어렵고 나 혼자 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귀농학교 동기들이 도와주기도 했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화학제품 재료와 작업이 쉬운 기계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해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1차 집수리를 마무리했습니다. 지난해 2월에 귀농해서 농사 시작 전까지 약 두 달 동안 집수리를 했지만, 아직도 필요에 따라 진행 중입니다.

▲ 한겨울에 집수리를 하고 들어왔다. 몸 쓰는 일이 아직 서툴지만 내가 살 집을 손수 고치는 자신이 대견하다. ⓒ김우열

농사짓기

겨울에 귀농해서 날이 풀리고 봄이 오니, 마음이 급해집니다. 무엇인가 심어야 한다는 마음만 앞섭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이 밭에 거름주기와 경운(耕耘)입니다. 귀농 첫해의 가장 큰 고민은 거름을 어떻게 조달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지요. 길을 지나다 이웃에 거름더미가 쌓인 것을 보면 가장 부러웠습니다. 가까운 농협에 가서 알아보기도 하고 만들어볼 궁리도 하는 중에 '관행 농사'를 하는 한 귀농 선배가 유기질 비료를 추천해주셨습니다. 유기질이라는 말에 덜컥 사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익히 알고 있던 '유박(깻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밭을 갈아야 합니다. 처음엔 무경운을 생각했지만, 아직 농사 방법에 대한 생각이 정립되지 않아 남들이 다 하는 방법을 따랐습니다. 경운이란,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드는 일입니다. 용감하게도 삽과 괭이를 들고 경운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웃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죠. 원시농사를 짓는다고요. 100평도 안 되는 밭을 갈기 위해 며칠을 매달려서 흙을 뒤집고 돌을 골라내는 일을 합니다. 폐가를 철거하고 밭으로 만든 곳이라 유난히 돌이 많습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흙을 뒤집고 돌을 골라냅니다. 그러다 보니 "돌이 새끼를 친다"는 말이 정말처럼 믿어집니다. 100평을 손으로 경운하고 나머지 땅은 미련 없이 이웃 어른께 트랙터 경운을 부탁했습니다. 물론 노임을 지급했지요. 첫해 경작했던 땅은 약 1000평입니다. 되도록 기계와 석유를 쓰지 않고 농사를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너무 쉽게 현실과 타협했습니다.

농사는 소농 지향과 자급 목표의 실현을 위해서 다양한 곡식을 심었습니다. 가장 먼저 감자와 옥수수, 그러고 나서 고추, 땅콩, 콩, 참깨, 들깨, 고구마, 수수, 팥, 녹두 들을 차례로 파종했죠. 비닐 덮기(멀칭, mulching)를 하지 않았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봄 농사는 수확이 좋았습니다. 옥수수는 뜻밖의 풍작이었는데 판로가 없었고, 도시의 친구들에게 그냥 주고 싶어도 택배비 때문에 고민이었습니다. 그 정도 비용이면 도시에서 옥수수를 충분히 사 먹을 수 있으니까요. 채소와 곡식은 적은 양의 농사를 지었지만, 어느 정도 자급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첫해 농사로 소득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결론이었습니다. 소득이 될 만큼 농사 규모가 되지 않았고요. 내 농사 방법으론 생산성도 너무 낮았기 때문이죠.

▲ 초보 농사꾼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귀농 첫해에 농사지어 수확한 콩으로 메주를 쑤고 곶감도 깎아 매달았다. ⓒ김우열

'진주골'에 적응해 살기

내가 사는 곳은 충북 보은의 서쪽이고, 옥천과 맞닿아 있습니다. 마을엔 여덟 가구가 사는데, 평균 연령이 여든 전후의 어르신들이십니다. 대청호가 생기면서 수몰로 농토가 많이 없어졌고, 대부분 산이어서 남은 땅도 비탈의 경사지입니다. 그래서 농사의 생산성도 높지 않고 다른 지방보다 귀농 인구의 유입도 많지 않습니다. 덕분에 어르신들의 농사는 전통적인 소농이 대부분이고요. 비탈진 농토 덕분에 아직도 일소를 부려 농사를 짓는 어른도 계십니다. 귀농 2년 차, 하지만 이곳을 지켜오던 어르신들의 기력이 쇠퇴하면서 한두 분씩 농사를 포기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프답니다.

내가 사는 골짜기 이름이 '진주골'인데요. 우리 집을 포함해 달랑 두 가구가 산답니다. 아랫집은 여든이 넘은 노부부가 나보다 많은 농사를 지으며 삽니다. 이웃 어른들께 나의 농사는 놀림의 대상입니다. 원시 농사라고요. 농약도 안 쓰고 화학비료도 안 쓰고 더구나 비닐 멀칭까지 하지 않으니, 동네 어르신들께는 신기할 따름이지요. 그래서 동네에서 별명이 '원시 농부'랍니다. 그럼에도 내 농사를 격려하는 분들이 있어 즐겁고, '원시 농부'라는 별명도 싫지 않습니다.

진주골에 이사를 오면서 내 인간관계 맺기의 소신은 인사 잘하기입니다. 동네에서 나는 가장 어립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큰 소리로 어르들께 인사했더니, 모두들 좋아합니다. 그리고 차가 없는 분을 위해 자주 차를 태워 드립니다. 덕분에 귀농 2년 만에 '진주골 새마을 지도자'라는 감투를 쓰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을 넘어 같은 면에 속해 있는 이웃들과도 많이 사귀게 됐죠. 모두들 좋은 이웃입니다.

올해는…

2년 차 농부에게 농사는 여전히 힘든 일입니다. 육체노동에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은 노동으로 단련되지 않아 곧잘 고장이 납니다. 하지만 농사는 여전히 즐거운 일입니다. 풀매기 명상은 즐겁고, 곳곳에서 만나는 생명의 경험은 행복이 됩니다.

올해도 할 일이 많습니다. 식량 자급을 위해 쌀농사를 지을 예정입니다. 그래서 두어 마지기의 논을 빌려 벼농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맨발의 살갗에 논의 진흙이 닿는 느낌이 전해옵니다. 또 하나의 계획은 지렁이처럼 길어서 '지렁이 밭'이라 이름 붙인 집 뒷밭에 조그만 오솔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지만, 나에게 또 다른 행복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오솔길 가에 양봉을 위한 벌통도 가져다 놓을 예정입니다. 그러면 진주골 식구는 몇만이 넘을 거예요. 벌써 귓가에 윙윙거리는 새 식구들의 날갯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하고 싶은 일을 넘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일도 해결해야 하고요. 내 이웃과 함께하는 일들, 가족과 행복할 수 있는 일들도 고민해야겠지요. 요즘 밭을 갈면서 나는 나만의 행복을 넘어 이웃과 함께하는 농사를 짓는 고민에 푹 빠져 있습니다.

▲ 산골짜기 우리집. 새소리만 들리는 고즈넉한 이곳에서 귀농 두 해째를 살고 있다. ⓒ김우열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5년 8월 현재 73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바로 가기 : 전국귀농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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