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말라야인이 되기 위해 Tanah Melayu as Malaya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말라야인이 되기 위해 Tanah Melayu as Malaya

[왕겅우 회고록] 4.

대학 다닐 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 교수님들 말씀을 잘 듣고, 필요한 일을 하고, 흥미를 끄는 것을 무엇이든 찾아 읽었다. 잊어버리거나 잘못 이해하는 일이 없도록 기록하는 습관도 익혔다. 지식이 더 많아지면 언제고 훌륭한 교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은 공부를 계속해 나갈 자유를 찾기에 좋은 곳이다.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문학작품에 관해, 또는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관해 논문이나 책을 쓰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이론적인 사고도 내키지 않았다. 두 가지 기술이 여러 학문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것인데, 나는 무엇을 가지고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차이에 대한 내 관심, 사실과 해석의 차이, 원인과 결과의 차이, 그럴싸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에 대한 관심이 역사학 공부에서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과거에 있어서나 현재에 있어서나 사람들 사이, 그리고 정치조직과 사회들 사이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간과하거나 착각한 연결점을 내가 찾아낼 수 있다면 학문에 공헌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유산에 대한 내 관심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다. 내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어머니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는 왕씨 가문의 자손으로서 내 교육에 책임감을 보였다.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줘야 하고 절대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거듭거듭 일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매일 저녁 서예 연습을 하고 중국 고전을 가르쳐줌으로써 우리 유산의 시범을 보였다.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그분들의 고향은 과거였고, 그곳에 나를 데려다주는 것을 내 미래로 생각했다.

중국 고전은 아버지에게 한쪽 유산의 핵심이었는데, 그분은 거기 만족하지 않았다. 영문학 공부의 즐거움을 또 하나 유산으로 찾아낸 그분은 형편이 될 때 내가 영어를 일찍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학교 때 나는 영국인 여교사 두 분에게 맡겨졌고, 두 분은 내가 영어를 제대로 쓰게 만들어 자기네 유산에 대한 의무를 수행했다. 그 뒤에는 스리랑카인과 인도인 교사들에게 영어로 여러 과목을 배웠다. 아버지는 내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유산을 갖게 된 사실을 알고, 어느 쪽에서든 배울 만한 것을 내가 알아서 배우도록 맡겨두었다.

일본 점령 때문에 물려받는 유산이 더 늘어났다. 나는 중국인학교에 몇 달 다니다가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아버지가 그만두게 했다. 친구 자제들에게 중국 고전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반에 나를 넣었다. 그 안에서 경쟁하며 중국어가 늘었으나 그 유산에 대한 내 이해는 어설프고 뒤죽박죽이었다.

하카계나 광둥계 친구들은 아버지가 표준어로 고전 읽는 것을 따라가기 힘들어했다. 아버지는 방언을 쓰는 일이 없었다. "만다린", 또는 "궈위(國語)"라 불리는 표준어만 썼다. “페킹 방언”이라고도 하는데 틀린 이름이다. 표준어 중 북방계가 "만다린"인데, 남쪽 수도 난징의 관료들이 쓰던 남방계가 따로 있었다. "남방 만다린"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 집에서 쓰던 표준어가 이것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하카어와 광둥어도 내 유산으로 여기며 자연스럽게 배워서 썼다.

난징에서 대학 다닐 때는 누구나 어떤 종류든 표준어를 썼다. 언어 능력의 표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것이 내 쪽이었다. 교수님과 급우들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는지 늘 불안했다. 장난과 저장에서 온 사람들은 우(吳) 말씨가 두드러졌다. 충칭 시절의 학교를 따라온 쓰촨 사람들은 말씨가 하도 달라서 알아듣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장시와 푸젠 경계 지역에서 온 한 친구는 통역 없이 대화가 안 되었다. 내 유산에 자신감을 느낀 것은 문학 강의뿐이었는데, 교수님이 고대 시문에 문헌학 주석을 많이 붙여 가르쳐주는 강의였다. 원문에 비해 우리 이해가 가능한 보통 고전한문으로 주석이 붙어 있어서 교수님의 지독한 푸저우 방언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라야에 돌아와서는 중국의 기억들을 구석에 치워놓고 새 나라의 유산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말라야대학은 출발점으로 좋은 곳이었다. 학생 중에 모든 지방 출신이 있었고, 싱가포르 출신 외의 남학생들이 모두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페락 외의 어느 지방에 관해서도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어느 주나 출신 학생이 있었고, 덕분에 말라야연방 출신의 우리 모두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새 친구들과 늘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원하는 정보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배우게 되었다.

말레이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말레이어를 잘 배울 필요와 여러 지방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 이해할 필요가 분명해졌다. 말레이인 정치지도자들이 새 말라야연방에서 말레이-무슬림 유산이 보호받도록 힘을 합쳐 노력하고 있음을 들으며 중요한 일로 생각되었다. 비-말레이 학생들은 모두 영어를 썼는데, 자기네 언어도 따로 쓰는 친구들이 있었다. 비-말레이인 비율이 큰 지방들이 있고 도시마다 인도인과 중국인 비율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내게는 즐거웠고, 자기 출신지 이야기를 많이 해달라고 친구들을 늘 졸랐다. 열심히 묻는 것이 배우는 데 제일 좋은 길임을 그렇게 하면서 확인하게 되었다.

말라야인이 되기 위해서는 글을 영국인처럼 쓰지 않고 우리 자신의 문학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어서 몇 편 시를 시험 삼아 써본 것이 1959년 <맥박(Pulse)>이란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 그 책에 실린 "달 생각(Moon Thoughts)"이 제일 처음 쓴 것인데, 잠 안 오는 밤 늦은 시간에 기숙사 복도의 형광등 아래 쓴 것이다.

이 시집을 대단하게 여겨준 친구는 없었으나 나는 시인으로 통하게 되었고, 몇 달 후 마닐라의 작가 워크숍에 록펠러재단의 초청을 받았다. 재단의 아시아 담당 이사 찰스 파스가 우리 영문학 교수 그레이엄 하우를 만났을 때 <맥박> 한 부를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워크숍에서 만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작가들로부터 민족문학의 의미를 배웠다.

Moon Thoughts "달 생각"

The moon, impure as ever, like tea-leaves,

Coffee dregs, on a cup of cream, cleaves

On to drooping leaves of rubber trees,

Scatters bright thieves to steal the keys

That open to mem’ries of home.

Distracted, home seems distant, fades

Into the light of nascent night, the same

That shone on ancient heroes born.

Thought loiters among the glorious shades,

And martyrs and lovers, alike they, came,

Welcome as dewdrops on to the evening lawn;

How they embalm the thought-cells,

How they sweeten the deepest depths of mind’s own dells.

The Truly Great adorn these green arcades,

Marble images, idols, now but shadows,

Spectre-like in the moonlit glades,

Have-beens; the night returns, but their lives

Come no more.

Think no more, home appears nearer;

The moon, impure as ever, becomes clearer.

워크숍을 주재한 미국 소설가 월리스 스테그너는 나에 관해 이렇게 썼다: "하나의 극단적 예로 말라야의 젊은 시인 한 사람을 생각해 보시라. 중국어와 인도네시아어(말레이어)를 알면서도 굳이 영어로 작품을 쓴다.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출생지인 인도네시아 국민도 아니고 부모의 출생지인 중국의 국민도 아니다. 살고 있는 말라야의 국민도 아니고, 종족 때문에 될 수도 없다. 여권에는 '영국 보호령 주민'으로 표시되어 있다. 실제로 그는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니고, 대변할 사람도 없는, 뿌리를 잃어버린 아시아 지식인의 전형적 모습이다. 깨어진 제국의 한 조각 파편으로서 자기 것 아닌 언어로 누구인지 모를 독자들을 향해 글을 쓰는 것이다."

워크숍에서 돌아올 때는 내 생각이 조금 자라나 있었다. 학생회에서 1학년 대표로 뽑힌 뒤 학생회보 편집을 맡은 것은 많은 것을 배울 경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일에서 나중에 학생회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말라야대학에서 마침내 학생들의 정치모임을 허용하기로 했을 때 결성된 사회주의클럽의 회장을 맡았다. 그때까지 나는 온갖 학생 정치운동에 관여하고 반-식민주의 토론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2년 말에는 학문의 길로 나아갈 결정을 내리고 학생운동에서 역할을 정리했다. 학사 과정을 마치고 석사 과정을 시작할 참이었다.

그런데 역사학을 전공으로 정하고 보니 내게 말라야 유산이 없다는 사실이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동료 학생들과 내가 공유하는 조건은 영어 학교에 다녔다는 것뿐이었다. 영국의 개입에 관해 읽은 것이 좀 있고, 바바(해협식민지의 중국인)와 신커(新客, 새로 이주한 중국인)에 관해

들은 것이 있었으나 인도인과 말레이인의 다양한 사회와 문화에 관해서는 이해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내 유산에 이끌려 말라야와 아무 관계가 없는 중국 고대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문서에만 의존하지 않으려면 남중국해 건너 중국과의 관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주제를 석사 과정의 첫 연구과제로 삼기로 결정했다.

1953년 늦게까지 나는 남해의 고대 교역에 빠져 지냈다. 학교에서 배우고 토론하는 모든 것이 서양의 패권에 연결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경제 이론 과목도 그랬고, 진행 중인 탈-식민 과정을 지배하는 교역과 화폐의 자본주의 기반도 그랬다. 오직 영국문학의 고전에서만 열등감 없이 인간의 조건에서 재미와 어리석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기묘한 일이었다.

대륙 중국으로 눈을 돌려 중국사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석사논문의 경험 덕분이었다. 아버지에게 배운 고전한문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런던대학 소아스에 있을 때 나는 우리 지역의 역사와 완전히 떨어져 지냈다. 그 대신 초원에서 온 오랑캐 전사들이 새로운 권력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던 정치적 분열의 시대로 눈길을 돌렸다. 그 상황에서 한족의 송나라가 새로 키워낸 학인 계급은 관직을 담당할 뿐 아니라 그로부터 천 년간 지속될 유가 유산을 정리해내고 있었다.

이제 돌아보면 그때 내가 한 일은 여러 갈래 유산을 통해 공부를 쌓아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주변의 여러 문자를 통해 공부하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한 갈래 유산의 스승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다른 유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아마 그런 방식이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역사 공부를 접어놓고 북중국에서 벌어진 한족과 돌궐족 사이의 대결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유산을 살펴볼 도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주제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공부한 내용을 전달해 주는 근대적 방법론을 습득한 것이다.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는 채로 공부를 해낸 경험으로 생각한다. 근대적 역사서술과 고전적 중국학을 내 나름대로 결합한 내 글쓰기 방식은 주관적이고 주변적인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설명에 타당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식의 글쓰기에서 어떤 전문적 기술을 터득한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으나, 서로 다른 문명들 사이에 여러 분야 학술을 활용하는 통행로의 건설 같은 일로 생각했다.

방법에 관한 생각 없이 공부를 해나가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린 오래된 문명에 더 이상 소속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 나의 새집은 아직 모습을 갖추지 않은 말라야로서 말레이인 귀족과 평민들의 열망 속에 지어지고 있었고, 외지 출신의 상인-노동자 집단이 그들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런 복잡한 배경 위에서 결국 어떤 모습의 국가가 나타날지 그려보는 데는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했다. 어떤 상상력이 필요할지 아직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출처: https://orunkim.tistory.com/2255 [페리스코프:티스토리]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