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되찾았다. 이제 안도해도 좋을까? 상하이는 조계(租界)가 설치되었던 것이 보여주듯, 외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온 도시다. 그런데 외국이 아예 점령, 지배했던 시기도 있었다. 바로 1937년 중일전쟁 중에 일본에 점령된 뒤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약 8년 동안의 기간이다. 중국이 이 도시를 돌려받았을 때, 일본의 점령과 지배가 남긴 과제들도 함께 왔다.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중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승전국이 되었다. 다음 달 9일 국민정부는 난징에서 일본을 상대로 수항(受降) 의식을 거행했다. 상하이는 수도 난징과 함께 징후(京滬) 지구로 묶인, 핵심적인 접수 지역이었다.
징후 지구의 접수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탕언보(湯恩伯)가 이끈 제3방면군이다. 육군 총사령 허잉친(何應欽)은 서남부에서 일본에 대한 반격 작전을 수행해 온 제3방면군에 이 임무를 맡겼다. 선발대가 상하이에 도달한 것은 9월 4일. 도착 당일 이들은 전진지휘소(前進指揮所)를 설치하고 곧바로 접수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9월 13일부터 상하이 전역과 주변 지역에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통제를 확보해 갔다. 무장이 해제된 일본군은 여러 집중영(集中營)에 분산 수용되었다.
시정 기구도 복원되었다. 국민정부는 8월 13일 충칭에서 첸따쥔(錢大鈞)을 상하이 시장으로, 우사오주(吳紹澍)를 부시장으로 임명해, 지난 8년간 단절되었던 시정부를 복원하도록 했다. 이들은 9월 5일부터 속속 귀환해 한 호텔에 임시 거점을 정하고 괴뢰정부를 상대로 한 시정 인수 작업을 기획했다. 실제 인수 작업은 9월 12일 시작되었다. 임시 거점에서 출발한 접수팀들은 각기 대상 기관으로 이동해 책임자로부터 업무를 인계받았다. 특별한 접수 의식은 없었다. 상하이시정부는 귀환한 지 불과 열흘 만인 9월 15일부터 정식 업무를 개시했다.
일정을 따라보면 접수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군과 정부의 복귀는 이 도시 사람들에게 전승과 해방이라는 들뜬 기대감을 가져다주었다. 이들이 귀환하는 비행장은 늘 환영 인파로 가득했고 화려한 환영식과 카퍼레이드가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적으로부터 도시를 되찾았다는 감격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안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돌려받은 도시는 빼앗기기 전의 도시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많은 부분이 파괴, 변형되었다. 새로운 권력이 이 도시를 성공적으로 접수하고 안정적인 지배를 펼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는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접수 작업에서 질서를 확보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해방을 맞자 각처에서 모습을 드러낸 비밀 조직들이 경쟁적으로 적산(敵産; 적성국 일본인의 재산), 역산(逆産; 대일 협력자의 재산)의 접수에 나섰다. 사실 조직의 진위나 권한 유무를 모두 명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지하 지사(地下志士), 항일영웅을 자처하는 무장한 장정들이 무리를 지어 재산과 건물을 강제로 접수, 점령하는 사례들이 빈발했다. 무고하게 한간(漢奸; 대일 협력자)으로 지목되어 재산을 빼앗기는 억울한 피해자도 있었다. 이는 8년 전 국민정부가 파천하고 일제와 괴뢰정권이 등장했을 때 유지회(維持會), 구공서(區公署) 같은 이름을 단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이비 기관들이 나타나 약탈을 자행했던 장면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그때와는 반대 맥락이고 정도도 달랐지만 분명 유사한 면이 있었다.
사실 국민정부는 전쟁 막바지부터 수복 이후의 접수를 대비해 각 지역에 중심 조직을 구축하려고 했다. 상하이에는 1944년 겨울 군사위원회 군사특파원 우사오주, 1945년 8월 위원장 대표 쟝보청(蔣伯誠) 등이 파견되었다. 두 조직은 접수 과정에서 군사 기관 간의 통일적인 지휘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협의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던 과거 비밀 활동 시기의 행동 방식을 버리고 이제 공인된 절차와 방식을 따를 것을 호소했다. 그렇지만 접수를 둘러싸고 혼란과 무질서가 우려되는 상황은 여전했다.
전후 일본 포로, 교민은 우선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점령, 통치하는 일본 본토로 송환한 뒤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중국은 미국에 협력하면서 이 송환 작업을 서둘렀다. 제3방면군은 상하이에서 이들을 송환 선박에 태우기 전까지 장악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이 끝난 시점에, 상하이에는 대략 6만 5천 명 정도의 일본인이 있었다. 이 안에는 육해군 군관, 헌병대, 행정기관, 국책회사, 대자본 기업 등에서 일하는 상대적으로 상위 계층에 속한 일본인도 있었고, 기업, 공장의 기술자, 상점 점원, 소상인 등 서민 계층의 일본인도 있었다. 그에 더해 많은 일본인 포로, 교민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한 달 반 정도 뒤인 9월 말 통계에 따르면, 그 수가 9만 5천 명 정도로 늘어났다. 일본인은 적성국 교민 가운데 절대다수를 점하는 인구 집단이었다.
일본 교민이 소유한 자산은 매우 큰 규모였다. 그 속에는 본래 일본인의 것도 있었지만 점령 기간 강탈한 중국인의 자산도 있었다. 상하이는 전선에 물자를 지원하는 주요 기지였으므로, 공업 원료, 군용 필수품을 잔뜩 보관하고 있던 창고도 많았다. “1천 개에 달하는 창고에는 산처럼 물자가 쌓여 있었고 없는 것이 없었다.” 상하이에 있던 일본과 괴뢰 정권의 자산은, 전국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하는 강소, 절강, 안휘 지구 전체의 일본, 괴뢰 정권 자산 가운데 90% 이상을 점했다. 이는 당연히 국민정부가 주목하는 접수 대상이었다.
제3방면군은 일본 교민에 대한 관리를 위해 상하이일교관리처(上海日僑管理處)라는 전담 조직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들을 수용, 관리하기 위해 4개 구(區)의 일교집중구(日僑集中區)를 획정했다. 집중구 바깥에 거주하는 교민들에게는 지정 기간 내 할당 구역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일본 교민들은 휴대가 허용된 최소한의 일용품, 현금만을 가지고 집중구로 이동해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통제 속에 생활해야 했다. 이들의 자산은 접수, 봉인되었다.
단기간에 많은 일본인을 통제, 관리하고 송환을 준비하면서 그 자산을 몰수, 정리하는 작업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를 완수한다고 해도 일본의 지배가 이 도시에서 남긴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점령, 지배는 이 도시와 주민에게 이미 많은 과제를 던져놓았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지난 8년 동안 도시와 주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 반 정도 지난 1937년 8월 상하이에서 우쑹회전(吳淞會戰)으로 불리는 3개월 동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를 통해 일본은 쑤조우허(蘇州河) 이남의 공동조계, 프랑스조계를 제외한 상하이 대부분을 점령, 지배했다. 위 지도 제1구, 제2구에 해당하는 홍커우(虹口) 및 공동조계 북구, 제3구에 해당하는 공동조계 동구의 양수푸(楊樹浦) 그리고 제4구를 포함한 강만오각장(江灣五角場) 등은 그 핵심 지역이다. 이때부터 1941년 말까지는 일본의 지배가 두 조계에 직접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흔히 고도(孤島) 시기로 지칭한다.
이 고도 체제는 1941년 12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공동조계에 군을 진입시킴으로써 무너졌다. 얼마 뒤 1943년 두 조계는 왕징웨이(汪精衛) 괴뢰 정권에 차례로 이관되었다. 단 중국 측에 넘긴 행정적 자율은 형식적인 것으로, 상하이 전역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1945년 8월 이후 국민정부가 접수할 때까지 이어졌다.
전쟁과 점령이라는 극단적 폭력과 폭압에 직면해서, 중국인 주민은 각기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해야 했다. 많은 인구가 조계로 피난했다. 조계가 아니면 구 현성 지역, 난스(南市) 등으로 숨어들거나 아예 멀리 피난 가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떠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하이는 이민 사회의 특성이 강해서 여러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며, 그 속에서 동향, 동업 등 사적 연결망이 크게 작용해 왔다고 지적된다. 반면 시민에 대한 공적 차원의 보호 또는 공공 영역은 취약하며 아직 형성되는 중에 있었다. 도시는 조계 권력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중국 측 시정 권력의 역할은 그리 적극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국민정부와 시정부가 패퇴하기까지 한 상황에서, 이들은 이 난국을 극복하는 데 더욱 사적인 자원과 연결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자산, 계층 등의 요소를 더하자면, 각자 동원할 수 있는 자원과 사회관계에 따라 이들 간에 큰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조계에서 이러한 격차는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금융, 상업 기능이 집중되어 있던 조계는 원래도 자산가들이 많았지만, 전쟁으로 그 수가 더 늘었다. 그리고 노동자, 하인, 소상인 그리고 여러 계통의 난민도 몰려들었다. 모두 전쟁을 피해 조계에 모여 있었지만, 이들이 활용할 수 있는 자산과 인맥은 크게 달랐다. 부자의 소비와 향락, 난민과 빈민의 궁핍이 가까운 거리에서 공존했다. 고도(孤島) 조계는 불평등, 비대칭의 대비가 현저하면서 동시에 극단이 엉켜 뒤섞이는 기묘한 섬이었다.
이 시기 중국인의 정치적 선택에는 회색지대가 존재했다고 지적된다. 극단적 폭력 앞에서 생존과 자존을 위해 행한 많은 선택을, 저항 또는 협력이라는 이분법으로 단순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제와 괴뢰 당국에 대해 치열하게 저항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선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다만 이들이 자신을 보호해 줄 공적 권력이 결핍된 상태에서 사회심리적으로 분열적 상황에 몰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점령 아래 중국인 주민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자니, 전쟁 전 국민정부가 펼쳤던 시정을 되짚게 된다. 일본의 점령은 중국인 주민에 대한 도시 행정을 구축하려 했던 국민정부의 시도도 좌절시켰다.
국민정부는, 군벌 할거를 종식하고 통일적인 중앙정부의 지배를 구축하기 위해 북벌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1927년 7월 상하이에 특별시를 건립했다. 이는 상하이의 중국인 주민에게 본격적인 근대도시의 시정을 기대하게 했다. 1929년경부터 상하이특별시는 도시의 중심 위상을 점하고 있는 조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시 중심 구역을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바로 대상하이계획(大上海計劃)이다. 새로운 시 중심 구역으로 선정된 곳은 바로 위 지도의 제4구를 포함해 동북쪽으로 펼쳐진 강만오각장 지역이다. 시정부는 이곳에 시정부 청사, 도서관, 박물관, 체육관 등 건물과 방사형으로 배치된 도로를 하나하나 건설했다. 그리고 1933년 프랑스조계의 남쪽 경계에 인접한 중국인 지역에 있던 펑린교(楓林橋) 청사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정부의 시도는 일본의 점령, 지배로 좌절되었다. 시 청사는 일본에 점령된 뒤, 곧이어 출현한 괴뢰 상하이특별시정부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괴뢰정부는 이 지역에 일본의 주요 기구와 주거지를 배치하는 것에 중점을 둔 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에는 일본의 육해공군 제 부대, 헌병대 등 군사 기구, 특무․정보 기구, 흥아원(興亞院) 등 행정기구, 화중진흥주식회사(華中振興株式會社) 등 경제 기구가 곳곳에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국민정부가 이 도시를 돌려받았을 때, 그 접수는 어떤 의미여야 했을까? 무엇을 위한 접수여야 했을까?
돌아온 상하이시정부는 강만오각장이 아니라 공동조계 공부국(工部局, Shanghai Municipal Council)이 사용하던 건물에 자리를 잡고 업무를 개시했다. 당시 조계는 이미 괴뢰정부를 통해 회수되어 있었고 또 전투 피해를 덜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결정으로 보인다. 국민정부는 열강이 사용하던 상징적인 건물과 시설을 회수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공적인 필요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당․정․군의 고위 간부들은 화원양방(花園洋房)으로 불리던 조계의 고급 주택들을 차지했다. 이들 사이에 접수를 항전 승리의 과실을 나눠 갖는 기회로 여기는 정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접수 작업에 항전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라는 정서가 끼어들었다. 적으로부터 도시를 되찾은 승자, 해방자의 긍지는, 접수 과정에서 사적인 이익을 적당히 챙기는 것도 당연하게 여기게 했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기회주의자, 모험가가 끼어드는 것도 피할 수 없었다.
사실 접수 작업에서 통제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라고 해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제3방면군 사령관 탕언보는 학교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건물을 착복했으며, 동생을 내세워 접수한 기계 설비로 여러 공장을 개설하고, 일본인의 병원을 접수해 자신이 개업하기도 했다. 시장 첸따쥔 역시 거액의 금괴를 착복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부시장 우사오주는 괴뢰정부 재정부 세무서장이던 사오스쥔(邵式軍)의 주택을 점거해 공서를 설치하면서 그 재산을 모두 챙겼다. 이는 한발 늦게 온 군통(軍統)의 다이리(戴笠)를 화나게 했다. 상하이에 설치된 헌병대는 접수 조직의 행동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대장 쟝공메이(姜公美)는 접수한 다수의 주택, 차량 등을 보고하지 않고 은닉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접수를 명목으로 발생한 혼란과 무질서는 국민정부의 부패상을 드러냈다. 시민의 기대도 점차 실망으로 바뀌었다. 후에 장개석은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하고 나서 “우리의 실패는 바로 접수에서 실패한 것”이라고 특별히 언급했다. 국민정부의 실패가 모두 접수 실패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라도, 그것이 이 정부를 향했던 도시 주민의 기대와 희망을 분쇄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들이 보기에 국민정부는 승전의 과실을 접수하는 데 보인 관심에 비해 주민이 처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했다.
이러한 국민정부의 태도는 미숙한 정책으로도 나타났다. 중저권(中儲券)과 법폐(法幣)의 태환(兌換) 정책은 전형적이다. 중저권은 왕징웨이 괴뢰정부가 중앙저비은행(中央儲備銀行)을 통해 발행한 지폐다. 법폐는 국민정부의 공식 지폐다. 국민정부는 복귀한 뒤 중저권의 유통을 금하면서 법폐와의 교환 비율을 200:1로 정하는 정책을 공포했다. 앞서 괴뢰정부는 법폐 대신 중저권을 유통케 하면서 법폐의 가치를 2:1의 비율로 낮춰 교환해 주었다. 결국 이 정책으로 점령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재산 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겪었다. 반대로 대후방(大後方)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수중의 돈이 갑자기 큰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한 학자의 회고에 따르면, 충칭에서 한번 이발할 수 있었던 액수의 돈으로 상하이에서는 고급 이발관에서 1년 이상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돌아온 사람들은 항전에서 승리한 맛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승리의 과실은커녕 박탈감만 주었다. 이는 단순한 실책에 그치지 않고 주민을 대하는 이 정부의 태도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국민정부의 접수 작업을 실패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작업이었음에도 접수 리스트가 나름대로 충실히 정리되었다. 유용한 일본인 기술 인력을 잔류시키거나, 도로 등 기반 시설을 건설하는 작업에 수용 포로와 교민 인력을 동원하는 등 접수 과정에서 확보한 자원을 도시 재건에 활용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문제는 국민정부에 이 도시와 주민들이 처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아가 재건, 성장을 이끌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접수의 대상은 일본과 괴뢰 정권의 시정 기구, 자산이지만 재건의 출발점은 점령 아래 변화한 도시와 주민의 현실이어야 했다. 이들은 이 도시와 주민이 처한 문제를 진단하고 이를 토대로 공간, 자원을 배치하는 구체적인 과제들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빼앗긴 도시를 되찾는 일과 그 도시를 다시 세우고 나아가게 하는 것은 같지 않았다.
이는 국가의 재건과 새로운 성장을 논의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되찾은 것을 어떻게 나누고 누릴지 생각하기 전에, 그것이 돌아오기까지 엉클어진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다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되찾은 성취는 함께 온 과제를 풀어내는 수고를 통해 온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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