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76년 경희대학교에 입학해서 역사학을 공부했습니다. 선구자적 혜안을 가진 '세계인'이었던 스승을 폄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분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더구나 유족 분들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인물을 평가하는 데 역사성이 결여되거나 또는 사실이 왜곡된다면, 나아가 그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또한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말은 흘러가지만 기록은 영원히 남습니다. 제가 오늘 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이런 기록이 세상에 정사로 남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저는 뼛속까지 역사학도이기 때문입니다.
'신흥'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 ▲ 조영식 박사 ⓒ경희대학교 |
이 대목에서 제가 한없이 위대한 조영식 박사와 한없이 초라한 이시영 선생을 연상했다면 제가 난독증에 걸린 걸까요?
왜 84세의 이시영 선생이 국회 전문위원에 불과했던 젊은 청년을 '삼고초려' 했을까요?
이제 '신흥'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대한민국은 이시영 선생과 신흥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1910년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할 때 조선의 권문세가 가운데 저항의 길을 택한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백사 이항복 이후 영의정 9명, 좌의정 1명을 배출한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이회영·이시영 6형제는 정말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이 분들은 1910년 겨울 현재 가치로 600억 원이라고 하는 전 재산을 처분해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집단이주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섰습니다. 이 분들은 이동녕 이상룡 선생 등과 함께 중국 지린성 유하현 삼원포에 있는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1911년 6월 10일 신흥강습소를 열었습니다. 강습소는 신흥중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며 1920년까지 200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습니다. 원통하게도 해방된 조국을 보신 분은 6형제 중에서 이시영 선생이 유일했습니다.
이시영 선생은 1947년 신흥무관학교의 전통과 역사를 잇기 위해 신흥전문학원을 세웠고, 1949년에는 신흥초급대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시영 선생이 인수자를 찾아 나섰을 때 무슨 욕심이 있었겠습니까? 삼고초려의 심정으로 오직 신흥의 정신을 이어나갈 교육자를 찾았겠지요.
2011년 초 신흥무관학교100주년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고, 6월 10일에는 100주년 기념식도 열었습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존경 받는 수많은 분들과 경희민주총동문회가 기념사업회에 참여했지만 조영식 박사의 후손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조영식 박사가 철저하게 신흥의 창학정신과 흔적을 지웠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시영 선생과 후손들이 무능해서 부도를 낸 부실회사를 조영식 박사가 결단을 내려 인수해서 낡은 것은 헐어버리고 새 것을 창업한 것처럼 역사가 다시 씌어졌습니다.
어느 가문이나 시조가 있으면, 가문을 부흥시킨 중시조가 있습니다.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선생을 시조로 받든다고 하여 조영식 박사가 중시조로서 이루어낸 성과가 평가절하 되지 않습니다. 저는 언젠가는 조영식 박사의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애국애족하는 신흥의 정신과 세계 속에서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신장하려는 경희의 정신을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대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에 이용당했나요?
"그런 그가 5.16 군사 쿠데타 세력과 1980년 신군부 세력에 의해 두 번이나 총장직에서 물러나도록 강요받았던 바가 있다. 1970년과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경희대가 발전을 위한 기획에 더 나가지 못했던 밑바닥에는 이러한 정세가 얽혀 있었다는 점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대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이 청산되지 않으면, 한 시대의 학문발전과 교육도 지체되기 마련인 것이다." (김민웅 칼럼에서 인용)
교수님, 이 대목에서 저는 가슴이 턱 막히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사건이 이렇게 해석 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감옥을 갔던 친구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유난히 목소리가 컸던 홍우표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1976년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몇 가지 당혹스러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교생 특히 1학년생 1350명은 의무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본관 앞 콘크리트바닥에 주저앉아서 조영식 총장이 강의하는 '민주시민특강'을 들어야 했습니다. 출석표를 큰 통에 집어넣어야 출석이 인정되는 1학점 필수과목이었습니다. 교직원들이 원형광장을 빙 둘러싸고 있어서 중간에 빠져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 특강은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학생들의 시위에 이용될 수 있다고 본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폐지됐습니다.
매일 아침 교양학부 강의실 앞에는 학생처 직원들이 나와 복장검사를 했습니다. 입학금에 강제로 포함된 빳빳한 칼라가 달린 감색 교복을 입고 등교하지 않은 학생들은 빈 강의실에 몰아넣어졌고, 내일부터 교복을 입고 등교하겠다는 각서를 써야 풀려났습니다. 교복을 입기 싫어 항상 1교시 중간에 강의실에 들어오며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했던 그 선량한 친구를 잊을 수 없습니다.
강의가 없는 토요일에는 학교에 나와 영어쪽지시험을 봤습니다. 일찍이 지구촌으로 눈을 돌린 조영식 박사가 영어교육을 강조한 것이었지요. 제가 경악한 것은 그 시험성적을 성적순대로 써서 강의실 벽에 붙여놓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지만 20살 청년에게는 대학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조리였습니다.
김민웅 교수님, 조영식 박사가 1980년 신군부의 압력으로 총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980년 그 봄날, 몇몇 사학에서 설립자 총장이라는 절대 권력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대중적인 학생시위로 확산되고 이를 기반으로 신군부 반대투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를 두려워한 신군부가 쿠데타 성공 이후 물의를 빚었던 설립자 총장들을 일제히 퇴진시킨 것입니다. 그 시절 몇몇 사학의 학내 문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조영식 박사의 호칭은 '총장 조영식 박사'에서 '이사장 조영식 박사' 또는 '경희학원장 조영식 박사'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건재하셨습니다.
교수님 글에 따르면 저와 그 봄날의 시위로 제적이 되고 감옥에 갔던 제 친구들은 졸지에 쿠데타 세력이 조영식 박사를 몰아내는 데 빌미를 제공했고 나아가 대학 발전을 위한 기획을 방해한 공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나친 해석이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제 친구들이 이 대목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세계화'라는 말이 자연스럽지만 40여 년 전에는 무척 생소했습니다. 조영식 박사는 그만큼 선각자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대학의 구성원들이 미처 따라갈 수 없는 구호와 거대한 탑이 난무했습니다. '세계로 웅비하자'고 외쳤던 조영식 박사가 대학 신입생들이 교복을 입지 않았다고 각서를 받던 모순과 인권유린도 벌어졌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수많은 성찰을 거치며 완성되어갈 뿐이지요. 1980년 그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수년 후 총장에 복귀한 조영식 박사는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교수와 학생들의 언로(言路)를 넓히고 자치활동을 폭넓게 보장했던 것입니다. 또한 교수님이 감탄했다는 그 교육과정들도 수많은 갈등과 희생, 화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역사성을 바탕으로 한 조영식 박사에 대한 바른 평가일 것입니다.
그 뜨거웠던 봄날, 학교 본관 앞에서 시작한 시위가 서울역 광장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수많은 친구들이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조영식 박사가 세계적 교육자로 명성을 얻어갈 때 그 친구들도 젊은날의 열정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송두리째 바뀐 운명을 감내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의 자유를 신장하려 했던 그 몸부림, 조영식 박사에 의해 실종된 '신흥'의 정신을 복원하려는 오늘의 노력, 이런 것들을 간과해서는 절대 안될 것입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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