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족민주운동사의 정신적 거목인 백낙청 선생이 오랜 침묵을 깨고 대북송금 의혹, 북핵 위기 등 최근의 불안정한 한반도 평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프레시안의 고문이기도 한 백 선생은 이번에 출간된 <창작과 비평> 2003년 봄호에 실린 '희망 속의 진통'이라는 제목의 머릿글에서 "노무현 정권의 탄생은 우리가 미국한테 잘못 보이면 어쩌나, 이북과 화해하려다 거꾸로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을 이겨낸 희망의 승리이자 한반도의 평화를 우리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의 표시였다"고 이번 대선의 역사적 의미를 규정했다.
백 선생은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앞날은 안갯속이다. 평화적 해결을 한다 한다 그러면서 정작 해결을 않다가 어느 새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고 말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고 북핵위기로 야기된 최근의 긴장상황을 우려하며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작년 한해동안 거듭 확인했던 주체적 역량을 한껏 동원하여 한반도 평화의 수호에 몰두해야 함은 물론이다"고 민족의 생존과 자존을 위해 국민이 대동단결할 것을 주문했다.
백 선생은 하지만 "대북비밀지원금을 둘러싸고 정치권은 대립과 혼전의 양상이며, 국민 다수가 불안과 분노와 곤혹감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고 현대의 대북송금이 야기한 국론분열을 우려하며 "이러한 국민여론의 분열과 표류는 국내 수구세력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고, 바깥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려는 세력이 파고들 틈새를 열어놓기도 한다"고 경고했다.
백 선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우리가 온전한 생각으로 새 출발을 기약할 좋은 기회가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도 대북지원 사실이 쟁점이 됨으로써 지원 자체는 누가 뭐라 하든 대다수 한국민에게 월등히 득이 되었다는 상식을 터놓고 확인할 계제가 주어졌다"고 규정하며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감을 갖고 국민 앞에 나서 진상을 밝힐 것을 주문했다.
백 선생은 김대통령에게 "꼭 덮어야 할 대목은 국민을 설득해서 공개를 미루더라도, 명백하게 속였던 점이나 불법한 행위에 대해서는 어쨌든 국리민복에 크게 기여했다는 자신감을 갖고서 인정하며 진솔하게 사과하는 선례를 남겨야 한다"며 "지난해의 경험들은 이런 고해(告解)조차 외면할 우리 국민이 아님을 너끈히 말해준다"고 말했다.
백 선생은 이와 함께 대북송금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야당에 대해서도 준엄히 질책했다.
"야당도 대북비밀지원을 환골탈태 없는 기사회생의 찬스로 볼 일은 아니다. 지난날의 서독정부는 동독에 훨씬 더 큰 규모의 지원을 했으되 야당을 포함한 국민적 합의에 근거했었다고 비판의 목청을 높여대지만, 한국의 야당이 과연 남북화해를 초당적으로 지원하고 추진할 태세가 되어 있었던가. 오히려 한반도의 긴장을 부추기는 미국 보수세력의 국내 교두보 역할을 한 바는 없었는가. 대통령의 초법적 처사를 규탄하지만, 합법적 남북교류의 최대 걸림돌인 국가보안법을 개폐하자고 할 때 앞장 서서 반대한 것이 누구였던가. 거대야당이 자신들의 다짐대로 ‘합리적 보수’로 거듭나서 남북화해사업의 한 주체로 자리잡으려면 그들 또한 고해하고 참회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백 선생은 마지막으로 "오늘의 진통은 다시금 우리의 희망을 시험하며 실력과 성의를 저울질하고 있다"며 "나 자신의 신념으로 말한다면, 고난의 20세기를 거쳐 여기까지 온 한반도 주민과 한민족 성원들이 21세기를 새로운 재앙의 세기로 시작하지는 않으리라 굳게 믿는다"고 지난해말 우리가 목격했던 '공포감을 이긴 희망의 승리'가 재연될 것을 단언했다.
다음은 백낙청 선생이 쓴 글의 전문이다.
***희망 속의 진통**
지난 한해 우리 한국인들은 희망의 승리를 거듭 맛보았다. 그리고 이는 기상예보하듯 하는 방관자의 소망이 아니라 시련을 견디며 다중의 힘을 모아 지켜내고 일구어낸 것이기에 헛된 꿈과 구별되는 참 희망이었다.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대다수 국민이 새로운 희망에 차 있는 오늘, 시련과 진통 또한 계속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북핵문제를 둘러싼 위기상황이 심각하다. 노무현 정권의 탄생은 우리가 미국한테 잘못 보이면 어쩌나, 이북과 화해하려다 거꾸로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을 이겨낸 희망의 승리이자 한반도의 평화를 우리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의 표시였다.
그러나 아직은 한반도의 운명을 온전히 결정할 실력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북은 북대로, 우리가 설득한다고 순순히 들어주는 상대가 아니며 도대체 합리적 설득의 대상인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앞날은 안갯속이다. 평화적 해결을 한다 한다 그러면서 정작 해결을 않다가 어느 새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고 말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작년 한해동안 거듭 확인했던 주체적 역량을 한껏 동원하여 한반도 평화의 수호에 몰두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바로 대북관계-대미관계의 문제에서 지금 우리 사회의 기운이 제대로 모이지 않고 있다. 특히 대북비밀지원금을 둘러싸고 정치권은 대립과 혼전의 양상이며, 국민 다수가 불안과 분노와 곤혹감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국민여론의 분열과 표류는 국내 수구세력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고, 바깥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려는 세력이 파고들 틈새를 열어놓기도 한다. 대통령 당선자로서는 취임을 앞두고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맞은 형국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가 온전한 생각으로 새 출발을 기약할 좋은 기회가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도 대북지원 사실이 쟁점이 됨으로써 지원 자체는 누가 뭐라 하든 대다수 한국민에게 월등히 득이 되었다는 상식을 터놓고 확인할 계제가 주어졌다.
한반도의 안정과 긴장완화로 인해 한국경제가 얻은 소득이 엄청난 액수에 달했으려니와, 수십년 동안 헤어졌던 가족끼리의 만남이라든가 드높아진 민족적 긍지 같은 효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혜택이 아닌가. 이런 성과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고 행여나 그것이 손상될까 걱정하는 마음이 없다면, 법치주의와 국민의 알 권리 등 그 무슨 훌륭한 명분을 내세워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이 성과의 대표적 공로자인 대통령 자신이, 국민들은 그러니까 고맙게나 알고 이 문제일랑 덮어버리자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의 재임중에 국민과 민족에게 이득이 못되면서 그냥 비밀스럽기만 했던 일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매사에 투명성과 대중의 참여폭을 확대하려는 것이 오늘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꼭 덮어야 할 대목은 국민을 설득해서 공개를 미루더라도, 명백하게 속였던 점이나 불법한 행위에 대해서는 어쨌든 국리민복에 크게 기여했다는 자신감을 갖고서 인정하며 진솔하게 사과하는 선례를 남겨야 한다. 지난해의 경험들은 이런 고해(告解)조차 외면할 우리 국민이 아님을 너끈히 말해준다.
야당도 대북비밀지원을 환골탈태 없는 기사회생의 찬스로 볼 일은 아니다. 지난날의 서독정부는 동독에 훨씬 더 큰 규모의 지원을 했으되 야당을 포함한 국민적 합의에 근거했었다고 비판의 목청을 높여대지만, 한국의 야당이 과연 남북화해를 초당적으로 지원하고 추진할 태세가 되어 있었던가. 오히려 한반도의 긴장을 부추기는 미국 보수세력의 국내 교두보 역할을 한 바는 없었는가. 대통령의 초법적 처사를 규탄하지만, 합법적 남북교류의 최대 걸림돌인 국가보안법을 개폐하자고 할 때 앞장 서서 반대한 것이 누구였던가. 거대야당이 자신들의 다짐대로 ‘합리적 보수’로 거듭나서 남북화해사업의 한 주체로 자리잡으려면 그들 또한 고해하고 참회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튼 오늘의 진통은 다시금 우리의 희망을 시험하며 실력과 성의를 저울질하고 있다. 나 자신의 신념으로 말한다면, 고난의 20세기를 거쳐 여기까지 온 한반도 주민과 한민족 성원들이 21세기를 새로운 재앙의 세기로 시작하지는 않으리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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