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4월은 아우성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온갖 들풀이 삐죽빼죽 솟고 들꽃은 앞 다투어 꽃망울을 터트린다. 벚꽃과 유채꽃은 만발하여 온 섬을 뒤덮는다. 아우성치는 것이 들풀과 꽃만이 아니다. 4월, 제주 사람들의 가슴도 아우성이다.
58년 전 4월, 제주 섬사람들의 가슴은 통일정부를 향한 기대와 열망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열망을 이루려는 저항이 좌절되면서 엄청난 희생과 굴욕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제주도민의 순수하고 뜨거운 의지를 잔인하게 짓밟은 세력들은 반세기동안 진실을 왜곡하고 진상규명 운동을 억압했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진실이 묻히고 거짓이 판치는 상황을 지켜보며 억울함을 호소할 길 없는 가슴은 방망이질 쳤다.
그 가슴들이 모이고 모여 지난한 노력의 결과 2000년 1월 마침내 '4·3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10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진상보고서〉)가 정부에 의해 확정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 해 10월 31일 "국가 공권력의 잘못에 의해 희생된 제주도민의 명복과 유족들에게 위로를 드린다"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의 4월은 아우성이다. 아직 못다 한 말과 흘리지 못한 눈물, 그리고 못다 이룬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1948년 4월 3일,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진상보고서〉에서 파악한 제주4·3의 전개 상황과 결과는 무엇일까?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제주도에는 미군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미군정기에 제주도는 정국의 혼란과 경제의 파국, 모리배의 성행 등으로 혼미한 상황이었다. 그런 중에도 1946년 8월 1일 제주도제(道制)가 비로소 실시되어, 본격적인 행정구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군정은 과거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를 재편·강화하는 방향으로 군정 정책을 일관하고, 특히 친일세력의 재등용으로 도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반면 적극적인 친일파를 배제하며 '인민위원회'는 제주도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운동가 등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미군이 진주하면서 다른 지역은 인민위원회와 미군정 당국의 갈등과 충돌이 빈번했지만, 제주도인민위원회는 미군정과 협력적인 관계를 맺으며 별다른 충돌 없이 제주사회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제주의 해방정국은 1947년 3·1절 기념대회를 계기로 요동치게 된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제주도민은 관공서와 학교·직장은 물론 밭일, 바다 일을 멈출 정도의, 유례가 없는 민관 총파업으로 항의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강경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총파업 이후 1년 동안 2500명 가량이 구금되었고, 특히 1948년 3월 경찰에 의한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민심을 자극했다. 이에 더하여 UN한국임시위원회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1948년 5월 10일로 확정함으로써,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제주도민의 한결같은 꿈은 멀어져만 갔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를 전후해 제주도내 11개 경찰지서를 일제히 공격하고 우익단체에 대한 습격을 단행했다. '단선단정 반대, 제주도민 탄압하는 경찰·서청 축출'을 내건 이 날의 봉기로 경찰과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이 희생됐다. 이로써 '4·3 사건'은 시작되었다. 4.28 회담으로 평화적 해결의 기미를 보이기도 했지만 미군의 양면작전으로 평화회담은 파탄 났고 대량 인명 피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통곡의 세월**
그 뒤 공비 토벌을 이유로 미군정과 군·경 토벌대는 제주도 전역에 대한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이들 희생은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토벌대는 강경 진압 작전을 수립하여 해안선 5㎞ 이상은 적성지역으로 간주하여 무차별 총살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대부분의 제주도 중·산간 마을이 이 범주에 들어갔다.
작전은 실천에 옮겨졌다. 대부분의 산간 마을이 토벌대에 의해 불에 탔다. 일부 마을엔 소개 명령이 전달됐지만 명령 전달조차 안 된 곳도 많았다. 먹을 것조차 변변치 못했던 시절, 막 가을걷이한 곡식과 우마를 두고 갈 수 없었던 주민들은 마을 인근의 야산에 임시 몸을 숨겼다. '며칠만 견디면 이 난리가 끝나겠지…' 하는 희망도 있었겠지만,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지 몰라 우왕좌왕했다'고 당시를 겪은 많은 주민들은 솔직히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군경토벌대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다. 인근 야산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발각되면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군부대에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구타, 희롱을 당하며 하나둘 죽어갔다. 젖도 떼지 못한 어린아이와 그의 어미, 그리고 60대의 노인도 폭도라는 이유로 죽어갔다. 설령 해안 마을로 피난 갔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가족이라도 없는 경우는 '도피자가족'이라는 이유로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함덕해수욕장 인근의 모래밭과 성산일출봉의 '우뭇개동산'과 아름다운 해변 '터진목', 표선백사장 앞 '한모살', 서귀포의 자랑이자 보기 드문 해안 폭포인 정방폭포, 그리고 제주의 관문인 제주공항(정뜨르비행장)…. 안타깝게도 현재 관광객이 즐겨 찾는 제주의 절경 앞에서는 치떨리는 학살이 매일처럼 자행됐다.
조천면 북촌리에서는 한날한시에 400여 명의 주민이 총살당하는가 하면, 토산리에서는 19세에서 40세까지의 남자가 모조리 집단 총살당했다. 북촌리 학살의 경우 "적을 사살해본 경험이 없는 사병들에게 적 사살 경험을 쌓기 위해 감행했다"는 당시 대대장 운전병의 증언(〈제민일보〉, 2002년 6월 1일자)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당시 북촌리 '당팟'에서 어머니를 잃은 밭주인 김진국(76) 씨는 "몇 년 전에도 밭을 일구다 탄피가 발견되었다. 우리 밭에서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사태가 안정된 후에도 밭을 10여 년 이상 남에게 빌려줬었다"고 아픈 기억을 털어놨다. 또 1948년 6월경에 집 옆에 있는 작을 굴에 숨었다가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던 강서수(79) 씨는 "이듬해 3월경에 석방되어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보니 너분숭이 어느 밭에 그대로 방치된 채 들짐승, 까마귀 등이 시신을 뜯어먹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고 증언했다.
토벌대에 의한 희생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세화리, 남원리 등지는 무장대의 무차별 공격으로 많은 민간인이 살상되는 등 제주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대규모 인명희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47년 3월의 총파업 가담자, 도피입산 후 귀순한 사람 등 이미 지목된 사람들은 물론, 토벌에 적극 협조했던 우익인사들조차 이러저러한 이유로 예비검속되었다. 군은 이들 대부분을 제주비행장·사라봉 등에서 처형했고,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수형인들도 대부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진상보고서〉는 희생자 숫자를 명확히 산출하는 것이 어렵다는 전제 하에 4·3으로 인한 인명희생 숫자를 2만5000~3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 즉 10명 중 한 명 꼴로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들 희생자의 86%는 토벌대, 14%는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였고,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61세 이상 노약자·여성이 전체 희생자의 33%를 차지한다면서 국가 공권력의 과도한 진압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많은 논란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진상보고서〉는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48년, 반세기의 몸부림**
제주 사람들에게 4·3은 되살리고 싶지 않은 처절한 비극적 역사다. 역사적으로 제주 사람들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착취·수탈구조와 불의에 맞서는 저항의 역사를 이어 왔다. 그러한 역사를 통해 자존심을 지켜 왔지만 4·3으로 모든 것을 상실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양민학살진상규명운동'이 제주대 학생을 중심으로 펼쳐졌으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된서리를 맞았다. 다시 4·3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 된 것이다.
이미 4·3 당시 체득한 생존의 제일조건이기도 한 굴욕과 순응만이 살 수 있는 길이었다. 끊임없이 연좌제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대놓고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을 40여 년 이어 온 것이다. 억울하게 희생된 넋을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마저 죄가 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4·3의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제주도민의 열망을 완전히 꺾을 수는 없었다. 그만큼 4·3으로 인한 상처가 깊고 충격적이어서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숱한 좌절을 겪었지만 신음처럼 4·3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고조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제주4·3은 사회운동 진영 내에서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며 논의가 활발해졌다. 1990년대 4·3은 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각 후보들의 공약으로 부각되었고, 문화예술인은 소설과 시, 마당극, 노래, 그림을 대거 쏟아내면서 4·3을 대중화시켜나갔다. '4·3연구소'의 발족 등 학자들의 연구도 활기를 띠었고, 대학생들도 진상규명에 발 벗고 나섰다. 그뿐만 아니라 〈4·3은 말한다〉를 발간한 〈제민일보〉 등 지역 언론과 방송의 관심도 높아갔다. 이렇듯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사회 상황의 변화는 굳게 닫혔던 4·3 관련자들의 입을 열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실로 4·19 이후 30여 년만의 일이었다.
1999년은 15대 국회의 마지막 회기여서 그 해 안에 4·3 해결을 위한 가시적인 성과가 나와야 한다는 요구가 각계에서 분출되었다. 제주에서는 '4·3도민연대'가 결성되어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범도민적인 투쟁에 나섰다. 서울에서도 '4·3범국민위원회'가 제주의 단체들과 보조를 맞추어 특별법 제정운동을 펼쳐나갔다.
그 결과, 1999년 12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제주도민들이 고대하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실로 한 세기를 마감하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3년 10월 정부의 보고서 확정과 대통령사과에 이르게 되었다.
***2006년 4월, 이제부터 시작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은 돌아왔고, 위령행사 및 기념사업이 제주 섬 곳곳에서 펼쳐진다. 특히 올해 위령제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하여 영령들에게 참배하고 추모사를 올린다. 2006년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넋들이 국가원수에 의해 공식적으로 추모되는 상징적인 해로 기록될 것이다. 이 발걸음은 앞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추모 등에도 적용될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끝인가? 아직 끝이 아니라 한다. 4·3문제의 해결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말하는 이들이 많다.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우선 4·3으로부터 얻을 교훈이나 정신이 모호하다. 그냥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되어서 문제인가. 물론 국가 공권력의 잘못에 의해 저질러진 희생을 평가하고 추모하는 일이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1948년 제주도민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봉기를 일으켰고 그에 대한 미군정과 정부의 탄압이 제주도민에 대한 대규모 살상으로 귀결된 것이다. 따라서 '평화,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와 더불어 '민족통일'의 정신을 얹어야 한다. 제주4·3은 하나의 민족이 둘로 갈라설 수 없다는 순수한 열망을 실현하려던 저항이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인명피해와 계량화할 수 없는 심리적·물적 피해를 몰고 왔지만, 제주도민의 자존을 짓밟는 친일세력의 척결과 민족의 분단을 막으려 했던 봉기의 슬로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둘째, 아직도 신고 된 희생자 중에 희생자로 결정되지 못한 분들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형무소 수형자다. 당시 형무소 생활을 경험했던 분들의 공통적인 증언은 재판을 받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모진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고, 자기가 무슨 죄를 인정했는지조차 모른다. 더군다나 무슨 죄로 몇 년을 형무소에 살아야 하는지도, 형무소에 가서야 간수가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재판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전쟁 발발 후 형무소 집단학살 때 희생됐다. 그 희생자들의 명예는 반드시 국가가 지켜주어야 한다. 이 밖에 4·3특별법 개정과 평화재단의 설립, 사료관 건립 등 산적한 문제들이 있다.
***미래, 4·3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다. 〈진상보고서〉가 확정되었고 국가원수의 공식사과가 있었고 참배를 한다.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은 참담한 기억을 가슴속에 쓸어 담아야만 했던 경험자와 유족,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 했던 지식인·학생·문화예술인, 그리고 패배의식을 딛고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제주도민 등의 지난한 투쟁의 산물이다.
과거의 사실로만 머무는 역사는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왜곡되어 묻힌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지난한 노력을 기울였던 이유가 한갓 한풀이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이들의 경험은 평화·인권의 가치와 민족통일의 의미를 현재와 미래에 고스란히 전파할 수 있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4·3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고문헌**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박찬식, '4·3 진실찾기운동의 발자취', 〈4·3과 역사〉 3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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