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는 그 때 그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 누구에게나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또 잊어서는 안 되는 상처로 각인돼 있다. 이런 사정은 해월 최시형에 대한 국내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박맹수 원광대 교수(원불교학과)에게도 다르지 않다.
박맹수 교수는 최근 발행된 <녹색평론> 2006년 5~6월호(제88호)에 기고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가 자신에게 어떻게 각인돼 있는지, 그 상처를 자신이 어떻게 보듬었는지를 담담하게 고백했다. 박 교수는 이 자전적인 고백 속에서 당시 광주 시민들의 열망을 어떻게 역사 속에서 승화시켜야 하느냐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프레시안>은 박맹수 교수와 녹색평론사의 동의를 얻어 해당 글을 전재한다. 선거를 앞두고 '5·18 광주'를 박제화해 이용하려는 온갖 시도들이 판치는 이 때 아직 살아 있는 '5·18 광주의 꿈'을 되새겨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편집자>
사단사령부 지하벙커에서 맞은 5·18
1980년 5월 18일, 나는 육군 제37사단사령부 지하벙커에 있었다. 계급은 육군중위, 병과는 보병, 직책은 연대에서 사단사령부로 파견된 연대 연락장교였다. 연락장교의 주 임무는 첫째로 육군본부를 비롯한 상급사령부에서 사단사령부로 하달되는 중요 작전명령이나 지시사항, 우리 군(주한미군 포함)과 북한군의 동향에 관한 중요 정보, 기타 군 내부의 각종 사건사고 내용 등을 전달받아 매일 새벽 사단장에게 브리핑하는 일, 사단장의 명령을 연대나 대대로 하달하는 일, 그리고 연대나 대대에서 일어나는 중요사항을 보고받아 사단장 및 상급부대에 보고하는 일 등이었다. 둘째로는 사단사령부 단위에서 취급하는 주요 군사기밀을 다루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연락장교에게는 군사기밀 취급에 필요한 2급비밀 취급인가증이 발급되고 있었고, 군사기밀 보호를 위해 중요 명령이나 지시사항을 특수한 기호를 써서 신속하게 암호화하거나, 암호화된 군사기밀을 한글로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익히는 일도 연락장교가 해야 하는 필수임무 가운데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다.
지하벙커 안에는 속칭 '티티'로 불리던 텔레타이프가 단 한 순간도 중단되는 일 없이 연중무휴, 하루 24시간 내내 풀가동하고 있었으며, 당직 연락장교를 포함한 4-5명의 연락장교 밑에 역시 4-5명의 연락병이 함께 상주하고 있었다. 주간에는 각 연대와 포병대에서 파견된 연락장교들이 함께 근무하지만, 야간에는 당직 연락장교 한 사람 밑에 당직 연락병 두세명만이 남아 24시간 꼬박 근무해야 했다. 당직근무는 대체로 사나흘에 한번 꼴로 차례가 돌아왔는데, 당직근무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새벽 두세시경쯤 되어 밀려오는 졸음과 싸우는 일이었다. 군대 안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통하는 일종의 잠언과도 같은 말이 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우리 군의 최고급 정보를 다루는 사단사령부 지하벙커 안에서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당직 연락장교의 책무는 경계근무 이상으로 중차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직근무를 하면서 존다거나 잠을 자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었다. 만약, 근무중에 졸거나 깜빡 잠이라도 들어있는 현장을 순찰하는 당직사령 장교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해당 연락장교는 그야말로 바로 그 순간이 자신의 '제삿날'이 되어버린다. 가장 가벼운 처벌이라 해봤자 혹독한 구타를 모면하기 어려웠고(1980년 당시 군 내부에서는 상급 장교가 하급 장교를 구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한 경우에는 사령부 안의 영창에 며칠간 갇히거나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했다. 더욱이, 당시는 10·26사태와 12·12사태가 일어났던 직후라 지하벙커 안의 분위기는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런 까닭에 지하벙커 시절의 나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바둑과 장기, 화투 등을 원없이 즐길 수 있었다. 이런 '잡기'들은 원래 금지된 것들이었지만 심야의 지하벙커 안에서는 졸음 방지용으로 묵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나는 37사단 지하벙커에서 무섭게 밀려오는 졸음과 싸워가며 1980년 5월 18일을 맞이했다. 5·18 소식을 처음 접하던 순간 나는 "이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명령과 복종으로 상징되는 군(軍) 조직 특성상 하급 장교는 그저 상급자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복종할 뿐, 그 어떤 의견이나 문제제기, 불만 표출 같은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무렵, 가장 중요한 일과는 매일 새벽 6시경 지하벙커로 출근한 사단장 앞에서 전날 밤부터 다음 날 새벽 사이에 광주(光州)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브리핑하는 일이었다. 사단장 앞에서 하는 브리핑은 거의 매일같이 반복됐다. 계엄령 아래에 있던 그 당시는 사나흘 간격으로 돌아와야 할 당직근무가 사실상 없어진 상태였고, 모든 연락장교가 24시간 근무하는 비상근무체제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반 장교와 병사들 역시 24시간 영내(營內) 비상대기 상태였음은 물론이다.
1980년 5월의 광주! 그 광주의 모습은 26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의 뇌리 속에 마치 어제 일처럼, 그리고 마치 내가 당했던 일처럼 아주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 까닭은 바로 육군 제37사단 지하벙커에서 매일같이 반복되었던 브리핑 때문에 당시 상황이 너무도 깊숙이 각인되어 버린 탓이다. 고립무원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매일같이 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던 민주화성회(民主化聖會)며, 담양 쪽 광주교도소 앞에서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수많은 시민군들이 사망한 일이며,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시민군들이 장갑차를 탈취하여 호남고속도로로 진출하여 북상을 시도했던 일, 화순 방면으로 진출한 시민군이 예비군 무기고를 무혈점령하여 무장을 강화하던 상황들, 이원화된 지휘계통(당시 광주로 출동했던 공수부대는 정상적인 지휘계통을 따르지 않고 별도의 지휘계통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때문에 계엄군 상호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영관급 장교를 비롯한 다수의 군인이 사망한 일, 그리고 전남 도청을 거점 삼아 최후항전을 하던 시민군들이 진압군에게 처절하게 진압당하던 순간 등등. 내 머릿속에 박힌 이 모든 광주의 영상들은 80년 5월, 37사단 지하벙커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5공 정권 탄생의 하수인으로 일하던 시절
37사단사령부 지하벙커에서 5·18 광주를 경험한 직후인 80년 6월경, 나는 만 1년에 걸친 연락장교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충북 보은에 있는 원대(原隊)로 복귀했다. 복귀 후 새로 맡은 직책은 대대(大隊) 인사군수(人事軍需) 장교. 당시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대대에 단 두명밖에 없는 참모 자리 가운데 하나였다. 인사군수 장교가 하는 일은 대대 내의 인사와 군수, 즉 사람과 물자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고 책임지는 자리였다. 사람과 물자를 관장하는 참모인만큼 말썽도 많고 사연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부대에 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인사군수 장교가 해야 할 일이 대단히 많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5·18 광주 이후, 우리 군은 교육훈련이나 적의 침투에 대비한 경계근무와 같은 군 본연의 임무를 훨씬 뛰어넘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이란 바로 '광주의 폭도들이 일으킨 소요사태'로 빚어진 누란의 국가적 위기에서 나라를 지키고 구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원대 복귀 후 나는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 많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우선 두번에 걸친 선거(한번은 개헌, 다른 한번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 우리 부대 부대원들의 부재자 투표율을 거의 100%로 끌어올림으로써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일조했다. 5공 정권 탄생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청주교도소 경비담당 계엄군 소대장(당시 청주교도소에는 사형판결을 받고 수감중인 김대중 씨를 비롯하여 비전향 장기수들이 다수 수감되어 있었다)을 비롯하여, 청주사범대학(현 서원대학교) 경비담당 계엄군 소대장, 삼청교육대 군수담당 장교, 10·27 법난 당시 보은 법주사 담당부대 소대장 등,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지던 시기에 우리 군이 관련된 정치적 사안에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참여했다.
5·18 당시 나는 그전 해부터 이어져온 일련의 사태를 둘러싼 상급부대의 지시나 명령에 대해 막연하나마 의문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의문투성이의 명령에 대해 어떤 문제제기나 비판적 의견표명, 명령거부 등은 감히 생각치도 못한 채 그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주구(走狗)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 탓으로 군 복무 시절에 대한 추억은 오로지 5공 정권 탄생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던 쓰디쓴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다. 내가 얼마나 상급자의 명령에 충실했던가는, 5공 정권이 명분으로 내세운 '새 시대 구현'에 적합한 모범장교로 뽑혀 사단장 표창까지 받았던 일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참으로 기구하기 그지없는 인생이다.
이렇게 5·18 광주에 대해 막연하고도 애매모호한 의문을 가지고 지내던 어느 날, 원대 복귀한 지 한두달이 지난 때였다. 당시 내가 모셨던 중대장은 전남대 학생군사교육단(ROTC) 13기 출신의 이 모 대위였는데, 4년 선배인 그 이 모 대위는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5·18 직후 불안한 마음에 사복을 입고 가족들이 사는 광주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고. 나는 물었다. "중대장님! 그때 광주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중대장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지하벙커 시절, 광주의 참상에 대해 알 만큼은 알고 있는 나에게조차 말해 줄 수 없다는 중대장의 말은 나를 답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답답함은 제대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역사의 죄인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린 세월
1981년 6월 말, 군대에서 사회로 복귀했다. 제대를 한 것이다. 고향 벌교도 다녀오고, 형제들이 사는 광주와 충남 부여에서 공무원으로 있는 매형 댁에도 다녀왔다. 가는 데마다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해 물었다. 진실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모두들 침묵할 뿐이었고, 잘 모른다는 대답이 고작이었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분명 내가 지하벙커 시절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웬만큼 알고 나왔는데도 잘 모른다거나 대답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질 않고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그해 9월부터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원불교 교무로서 나의 첫 교역(敎役)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슴 속에는 그저 광주의 수수께끼를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왜 사람들이 침묵하는지 그 이유를 꼭 알아야만 했다. 이듬해 3월, 마침내 하나의 계기가 찾아왔다. 선배 교무가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동자 정순철 씨 (지금은 고인이 되었음)를 보호해 주다가 구속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직후의 일이었다. 나는 석방대책위원회에 들어가 후원금을 모으거나, 재판이 있는 날이면 서울을 오가며 대책위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광주의 진실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순철 씨의 최후진술을 들으며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순철 씨는 "왜 시민군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왜 총을 들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그리고 왜 광주 미문화원에 방화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를 진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광주 MBC 앞에서 계엄군에게 난도질당한 여러 구의 시체를 운반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고도 내가 가만 있으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서 피눈물을 쏟으며 시민군에 가담하여 총을 잡게 되었다"고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정순철 씨의 최후진술을 통해서야 나는 내 죄가 어떤 죄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사실, 5·18 광주 당시, 나는 광주에 출동했던 계엄군도 아니었고, 시민이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혹한 살상행위를 한 사실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5·18 광주와 관련된 직접적인 명령계통 속에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광주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기 나라 군대가 자국민을 학살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대참극이 일어났는데도 그 진실을 조금도 꿰뚫어보지 못했으며, 그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지도 못한 책임이 있었다. 국가와 군대라는 이름으로 민중에 대한 엄청난 폭력이 자행되는데도 그 부당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나! 그런 나는 5·18 당시 광주에 출동하여 학살극에 가담했던 군인들과 별반 다름없는 군인의 신분이 아니었던가.
정순철 씨는 그 점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다. 정순철 씨 재판을 통해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죄를 지은 중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하루하루를 보내기가 너무나 괴로웠다. 원불교 교무라는 직함은 더더욱 나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나는 80년대 내내 "왜 나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역사의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순철 씨 재판 종결 이후, 생각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한 개인의 양심과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의 양심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에서 시작해서, "개인이 양심을 충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하는 집단이나 사회, 또는 개개인의 양심을 유린하고도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집단이나 사회는 반드시 바꿔야 한다"는 생각, 즉 '정권타도' 운동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82년 늦가을부터 사회변혁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갖고,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개설하는 한편, 변혁운동 진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열기로 후끈 달아있던 나! 80년대 후반의 자화상이다.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에서 답을 찾고자 하다
그런데 야학운동을 하면서 다행스러웠던 일은, 80년 5월의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전두환을 비롯한 어떤 개인이나 특정집단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한국 근현대사의 파행적 전개에서 찾고자 하는 방향으로 생각이 미쳤다는 점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지금도 그 까닭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광주의 비극으로부터 한걸음 비켜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이 무렵, 나는 한쪽으로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굴절되고 왜곡되어 전개된 이유에 대해 천착하는 한편, 다른 방향으로는 변혁운동으로서 야학운동이 차지하는 역할과 의미를 중심으로 대학 후배들과 공부모임을 꾸리고 밤새워 우리 민족의 현실, 역사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5·18 광주'가 있게 된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즉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적이며 근대적인 국가 건설을 열망했던 시도가 좌절된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문제의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학부시절에 어렴풋이 접했던 "우리는 수운이나 해월, 증산 선생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분들은 선지자들이시다"라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말씀도 떠올라 동학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3년에 한국 근현대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한국학대학원에 진학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동학공부를 시작했다. 동학에 미친 세월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동학에 대한 나의 접근 태도였다. 당시 나는 '다행스럽게도' 원불교라는 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당시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 대유행하던(물론 오늘날까지도 사실은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관점이 되고 있는) 사회경제사적인 관점보다는, 사상사적인 관점이나 종교사적 관점에서 동학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보다는 동학의 역사 속에서 근 40년 가까이를 이끌어오고,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해일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던 해월 선생에 대한 자료나 연구가 거의 전무하다는 데 눈을 뜨게 되었고, 혁명의 땅 전라도보다는 그 혁명의 발원지인 경상도 땅에 먼저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런 나의 문제의식은 지금 시점에서는 소경이 문고리 잡은 격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해월 선생 연구나 동학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하는 연구는 사실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노다공소(勞多功小,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음)의 주제, 즉 연구하기에 힘들기만 하지 큰 성과를 거두기 힘든 주제로 치부되고 있었다. 왜냐면 해월 선생은 38년간 수배자의 신분으로 전국을 돌며 피신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료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각지에 산재해 있는 선생의 은신처를 중심으로 장기간에 걸친 면밀한 현장답사를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바로 그 점이 학구열을 자극했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해월 선생 연구는 나에게는 하나의 싸움이었다. 광주학살극에 대한 역사적 죄책감과의 싸움, 우리 역사가 걸어온 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위한 싸움, 광주학살과 같은 국가폭력이 두번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정신적 절박감과의 싸움이었다.
물론, 공부하는 기간에도 87년의 6월항쟁이나 대선 때의 구로구청에서의 싸움(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한 농성), 그리고 노동자 대투쟁 같은, 현실적인 공간에서의 싸움도 결코 마다하지 않는 가운데〈해월 최시형 연구―초기 행적을 중심으로〉(1986년)라는 석사논문을 마무리했다. 이 논문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해월 연구에 있어 우리 학계 최초의 석사논문이라는 연구사적 의미를 남기게 된다. 그 뒤로도 해월 선생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동학공부와 연구를 계속했다. 이때의 주된 문제의식은 무엇보다 동학의 현장을 일일이 발로 찾아다니면서 정확한 사실을 밝히는 '실증'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말 악전고투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하면서 하는 공부는 1996년 박사논문을 마무리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천도교의 삼암 표영삼 선생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생명·평화운동으로의 방향전환
나의 동학공부와 연구(주로 해월 선생 연구와 현장답사를 위주로 했던)는 1994년의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을 기점으로 일단 정리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해월 최시형 연구―주요 활동과 사상을 중심으로》(1996년,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1995년에 나의 동학공부에 일대 방향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사건이 터진다. 1995년 7월 일본 최북단의 홋카이도대학에서 전라남도 진도 출신이라고만 알려진 동학농민군 지도자 두개(頭蓋) 유골이 방치된 상태로 1백년 만에 발견된 것이다. 그 소식을 처음으로 접한 순간, 나는 "왜 1백년도 더 지난 지금, 한국의 가장 남쪽 섬인 진도 출신 동학군 지도자 유골이 일본 최북단의 섬인 홋카이도에서 발견된단 말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저 사건 뒤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진실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 진실을 반드시 밝혀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른바 IMF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1997년 4월에 자비를 들여 홋카이도로 건너갔다. 우선, 한승헌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님과 유골 봉환 작업을 마친 다음, 그때부터 4년 동안 숱한 고생을 하면서 진상조사 작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새로 알고, 느끼고 새로운 시야를 얻게 되었다.
진상조사 과정에서 홋카이도대학은 과거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이론을 연구하고, 식민지에 배치할 농업관리들을 양성했던 삿포로농학교(札幌農學校)의 후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진도 동학군 유골은 바로 그 삿포로농학교 출신인 사토 마사지로(佐藤政次郞)라는 인물이 통감부 시대에 전남 목포의 면화재배소 기사로 왔다가, 1906년 9월 20일 진도 출장중에 불법으로 '채집'하여 모교로 반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인종론(人種論)이란 학문 아닌 학문이 1920-30년대에 홋카이도대학 안에서 광범위하게 연구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이누 민족을 비롯한 동아시아 민족의 두개골을 수천구나 수집하여 민족차별의 근거로 삼아왔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4년이나 계속된 일본체재 기간 동안, 나는 양심적인 일본인 교수들을 만나 그분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가운데, 일본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과 방위청 산하 방위연구소 도서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등에 소장되어 있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1차 사료를 광범위하게 열람하고 수집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이런 기회는 외국인 연구자로서는 좀처럼 얻기 어려운 아주 특별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행운이라고 느끼는 것도 잠시, 수많은 사료 더미 속에서 그간의 내 인식의 틀을 깨야 하는 고통스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이 동학군의 씨를 말리다시피 자행한 대학살이 우리 민족에게서만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일본이 지배하거나 침략했던 아이누 민족, 오키나와 사람들, 중국의 난징대학살 등 동아시아 여러 민족에게서도 공통적으로 일어난 보편적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일동포들과도 다양한 교류를 할 수 있었는데, 그들과의 교류 속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 바로 재일동포들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 희생자들의 후예들이 지금도 여전히 '현대 일본'과 '현대 한국'이라는 '국가'의 틈바구니에 끼어 끊임없이 소외당하고 끊임없이 차별당하는 생생한 현실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이런 아픈 체험들은 나에게 그간의 나의 문제의식이 얼마나 '국가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민족'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었나를 뼈저리게 통찰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상과 같이, 전남 진도의 동학군 유골은 나에게 참으로 큰 선물을 주었다.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동아시아'를 발견하도록 했고, 19세기 이래 생명에 대한 억압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났던 현상이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자행된 보편적 현상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
2001년 4월,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나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묘소와 해월 선생님 묘소를 찾았다. 무위당 선생님은 생전에 나의 해월 연구를 가장 크게 기뻐하시며 격려해 주셨던 스승이었고, 해월 선생님은 젊은 시절의 내 정열을 사로잡아버린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묘소 앞에 선 나는 유학을 통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뭇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생명사상의 발현 내지 생명운동의 또다른 모습이었다는 큰 각성을 하고 돌아왔음을 두분께 아뢰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동학을 민족의 울타리로부터 해방시켜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변혁운동까지도 포괄하는 생명평화운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실천하는 두가지 과제에 정성을 다할 것을 고하였다. 동아시아의 발견, 그리고 생명에 대한 깊은 각성과 실천! 이 두가지 과제야말로 5·18 광주로부터 눈물과 고통 속에서 내가 일궈낸 보석이었다.
박제화된 5·18이 아닌, 끊임없이 살아나는 5·18을 위하여
80년 5월 광주! 그 '5월 광주'가 있은 지도 벌써 4반세기 이상이 흘렀다. 폭도로 몰렸던 광주시민들은 이 땅의 민주화를 진전시킨 유공자로 당당히 복권되었고, 희생자들이 묻힌 망월동 묘지는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우람하고도 장엄한 각종 추도시설이 들어섰다. 기념재단도 만들어져 5·18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연중 진행되고 있고, 초중고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 속에서도 5·18은 한국 민주주의를 완성한 촛불이요 평화와 인권 실현을 상징하는 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상 참 좋아진 것이다.
세상이 좋아졌으니 '5월 광주'가 꿈꾸었던 세상이 도래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이 땅의 곳곳에서는 민초들을 억압하고 죽이는 국가폭력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고, 국가주의가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핵폐기장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부안사태와, 지금도 진행중인 평택 팽성읍 대추리·도두리에 대한 국방부의 강제토지수용이 바로 그 전형적 사례가 아닌가.
5·18 광주는 공식적으로 복권됐고 역사에서 당당하게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복권되지 못한 억울한 죽음들, 아직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숨은 역사들이 이 땅 구석구석에 널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면, 바로 한국전쟁 전후에 학살당한 수십만, 수백만 민간인들의 죽음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5·18 광주의 꿈은 아직도 미완성이요 끝나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5·18 광주는 결코 몇가지 기념사업이나 장엄한 추도시설, 몇푼의 보상금 따위로 박제화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국가주의와 국가폭력에 맞섰던 광주시민들의 위대한 열망―평화와 인권, 생명의 존엄성을 향한―에 부응하는 세상이 오기까지는 5·18 광주의 진정한 복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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