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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과 10·26, 그리고 박정희와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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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원순과 10·26, 그리고 박정희와 박근혜

[기고] 박원순 후보 서울대 법대 논란, 박근혜가 아버지 대신 사죄해야

"숨을 쉬고 있어도 숨 쉴 수 없는 듯한 상황. 숨 쉬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내린 독재의 정의다. 그는 박정희가 숨진 날, 유신체제가 무너진 날 치르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독재정권인 이명박 정권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자"고 말한 한 신부에게 "독재가 과연 어떤 상황인지를 경험하고 아시고 있느냐"며 힐난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유신말기 때 대학생 신분이었고 당시는 4명만 모여도 처벌받을 정도로 엄혹했다며 독재의 실상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호기롭게 말했던 전 의원은 바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 신부는 유신시절 온몸을 던져 유신독재체제에 항거한 전력이 있는 원로신부였기 때문이다. 독재의 실상을 전 의원보다 몇십 배, 몇백 배 잘 아는 사람에게 "독재를 경험한 적이 있느냐, 독재를 아느냐"고 힐난했던 전 의원은 그 뒤 말이 없다. 죄송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역대 대통령 가운데 독재를 한 사람은 여럿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 가운데 필자가 가장 피부로 느낀 독재는 박정희 유신정권이었다. 그가 아끼던 부하의 총에 스러진 날, 바로 그날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그리고 그가 아끼던 큰딸, 박근혜 의원이 사실상 지원총사령관이 되어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돕고 있다. 그들이 거꾸려 트리려는 상대방은 '유신의 심장' 박정희에 의해 1975년 서울대를 80일간 밖에 다니지 못하고 제적당한 박원순 변호사다.

한 후보(나경원)는 유신독재 때 나이가 어려서 유신독재의 그 살벌함을 잘 모른다. 반면 한 후보(박원순)는 바로 유신독재의 희생물이 되어 정말 힘들게 공부해 들어간 대학을 석 달도 채 다녀보지 못하고 유신반대 데모에 주동도 아닌 단지 참가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힘든 청년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 ⓒ프레시안(최형락)

필자는 박원순 후보와 대학입학 동기다. 그와는 지금껏 악수를 나눈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그는 1975년 사회계열(상대, 법대, 문리대)에 입학했고 나는 자연계열(공대, 약대, 자연대)에 입학했다. 그는 입학 후 대학생 신분을 느낄 새도 없이 잘렸고 나는 무사히 1979년 졸업했다. 그는 당시 서울대생 또는 운동권 학생들이 부르던 이른바 '오둘둘(5.22) 사건' 때 잘렸다.

사람들은 1987년 6월 대항쟁이나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0년 광주민주 항쟁, 1960년 4.19혁명은 잘 알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아마 국민 가운데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은 0.1%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매우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유신의 심장, 박정희를 놀라게 한 사건이다. 박정희를 분노케 한 사건이다.

그날은 서울대 3·4학년이 주축이 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김상진 열사 추도제가 열렸다. 관악캠퍼스 대학본부와 도서관 사이에 우리들이 아크로폴리스광장이라고 부르던 곳이 있다. 긴 계단으로 된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집회하기 안성맞춤이었다. 1975년은 유신이 절정기에 이른 때였다. 1975년 입학하자마자 전국 대학 곳곳에서는 유신반대 데모가 벌어졌고 박정희 독재정권은 고려대에 탱크까지 진주시키면서 대학을 유린했다. 전국 주요 대학에 4월 휴교령이 내려 한 달 가까이 시골로 내려가 지냈다. 다시 학교 문은 열렸으나 숨을 쉬고 있어도 숨 쉬는 것이 아니었다.

관악캠퍼스 안에는 수상한 버스가 수십 대씩 매일 들어왔다. 대학통근버스 외에는 일절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버스는 없던 시절이었다. 시내노선버스도 정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던 때인데도 이 수상한 버스는 무사통과였다. 이 버스에서 30~40대 아저씨들이 떼를 지어 내려 캠퍼스 곳곳으로 흩어졌다. 수백명이나 됐다. 우리는 이들을 '짭새'라고 불렀다.

이들의 임무는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데모 낌새가 있으면 이를 막는 것이었다. 또 데모가 있을 경우 즉각 주동자나 참가자들을 연행해가는 것이 임무였다. 당시 다른 대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는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형사와 대학생들이 캠퍼스에서 뒤섞여 누가누군지 분간하기 쉽지 않은, 요즘 청소년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풍경이었다.

휴교령 해제 뒤 캠퍼스에 돌아온 뒤 서울대생들은 당시 수원에 있던 서울대 농대 캠퍼스에서 김상진이라는 농대 4학년생이 4월11일 교정에서 유신독재 타도를 외치며 할복자결했다는 어두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서울대생에 퍼져나갔다. 5월22일 김상진 열사 추모제에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1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모여들었다.

교정이 시끄러웠다. 광장으로 갔다. 이미 추도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뒤쪽에 서서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수학(매트릭스)수업이 있어서 강의실로 갔다. 대규모 서울대생 데모 소식에 유신정권은 깜짝 놀랐다.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1974년부터 발동한 온갖 긴급조치로 10명 이상 모이는 것도 금지하고 한 달 전 전국 대학 휴교령까지 내렸는데도 1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다니 아마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날 경찰은 학교 안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강의실 안까지 난입했다고 한다. 경찰은 경찰이 아니라 서울대라는 적국을 점령한 점령군 행세를 했다.

도서관이나 강의실 안에 있는 학생이 아닌, 교정을 지나다니는 학생은 모조리 붙잡아 학교 정문 인근 신림동에 있는 세계 최대의 파출소로 끌고 가거나 남부경찰서 등으로 데려가 조사를 벌였다. 끌려간 학생만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수업도중 교직원 한 명이 강의실로 들어와 교수(옷매무새 등 풍기는 인상이 형사 콜롬보를 쏙 빼닮은 그 교수님은 우리 반 담당교수였다. 당시 자연계열은 학생이 1300명가량이어서 20개 가까운 반으로 나눠서 반별로 교양과정 수업을 받았다)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교수님은 수업을 중단하고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자신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죄다 경찰에게 끌려간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의 인솔 아래 마치 초등학생마냥 우리는 줄지어 정문 쪽으로 갔다. 수백 명의 경찰이 정문을 겹겹이 막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50미터 가량 만들어 학생들을 지나가게 했다. 교수님이 간부로 보이는 한 경찰관에게 "데모가 벌어질 때 이 힉생들은 모두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제야 경찰은 우리들을 통과시켜 주었다.

다음날 들은 것은 대학총장(한심석 의대 교수)과 서울시경국장(지금의 서울경찰청장)의 목이 달아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수백 명이 제적당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나중에 그 숫자가 162명인가로 확인됐다. 높은 곳(청와대)에서 수백명이라도 모두 잘라 앞으로 유신반대 데모 싹을 잘라야 한다고 엄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학생을 잘라야 하니 경찰도 난감했을 것이다. 자르는 기준은 주동자와 의대생(연건캠퍼스)과 공대생(공릉캠퍼스)이면서 그날 관악캠퍼스에 와 붙잡힌 사람(관악에 올 이유가 없는데 관악에 왔으니 이는 곧 데모 사전연락을 받을 정도로 골수운동권이라고 판단했다고 함)과 추모제 때 맨 앞줄에 있다 유인물을 뒤쪽으로 나눠준 학생(맨 앞에 있었던 학생은 그만큼 유신체제에 열정적으로 항거할 인물로 판단했다고 함) 등이었다고 한다. 경찰서(파출소)로 끌려가 소지품에서 데모 유인물이나 불온서적이 적발된 사람도 제적 등의 처분을 받았다.

이들 학생을 선별하는 데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찍은 비디오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대학본부 건물 총장실 옆에는 중앙정보부 상주요원실이 있었으며 여기서 데모 당시 모습을 비디오로 모두 촬영했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준 때문에 학교에 입학한 지 80일 밖에 되지 않는 1학년생도 무더기로 제적됐다. 고등학교 동기생 한 명도 잘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1학년생에 바로 박원순 후보가 들어있었다.

당시 박원순 후보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말다 데모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악랄한 유신독재의 희생자였다. 제대로 된 국가, 민주화된 정부였다면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2학년 때 법대를 배정받아 무사히 졸업했을 것이다.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서울대 졸업생이 될 수 없도록 만든 것은 박원순이 아니라 바로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 의원도 유신 때 대학생이었고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숨진 뒤 영부인 역할을 했으므로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아버지와 관련된 것이므로 회피하거나 모른 척하고 싶을 뿐이다.

박 의원이 열성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나경원 후보와 후보 진영, 그리고 이들과 한통속이 되어버린 거대 보수신문과 일부 방송들은 박원순 후보의 법대 중퇴 학력 논란을 주요 의제로 내세워 네거티브 공세를 줄곧 펼치고 있다.

아마 박 후보가 1학년이 아닌 2학년이나 3,4학년 때 잘렸어도 이런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당시 계열별 모집이 아니라 대학별, 과별 모집이었다면 이런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서울대가 옛날처럼 사회계열, 인문계열, 자연계열 식으로 계열별 모집을 하고 있었더라도 이런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몇 년간 시행하다 사라진 서울대 모집방식이어서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사회계열이라고 하면 이것이 무얼 말하는지 알 사람이 0.1%도 채 되지 않는다. 출판사에서나 방송진행자 등이 자꾸 법대 중퇴라고 물어보거나 그의 학력에 이를 기재한 이유도 이들은 사회계열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한 몫을 했으리라고 본다.

물론 필자가 출판사 대표나 방송진행자였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법대라고 하면 백의 백이 다 알지만 사회계열이라고 하면 백의 한 명도 알지 못하는, 바로 그런 문제 때문에 박 후보가 자신의 책이나 인터뷰에서 정확하지 않은 학력을 기재했거나 그냥 지나친 것이리라 생각한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결과적으로 정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대단히 중요하고 심각하고 결정적인 문제인 것처럼 요란하게 떠드는 것은 다른 꼬투리를 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지 않을까. 아니면 자그마한 문제라도 침소봉대하거나 자꾸 떠들면 듣거나 보는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하도록 만들겠다는 전략일 것이다.

우리가 정말 문제를 삼아야 하는 것은 한 젊은 청년이 피눈물 나게 공부해 들어간 서울대를 잠깐도 다니지 못하도록 만든 유신독재 정권이며 그 독재정권의 단물을 많이 맛본(물론 어머니를 잃는 아픔 등 아픔도 있었지만, 그 뒤 영부인 역할을 하는 등을 두고 한 표현임) 박근혜 의원이 나경원 후보의 가장 든든한 지원권이 되어 또 다시 박원순 후보를 압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의원은 지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아버지를 대신해 박원순 후보가 젊은 시절 겪었던 아픔에 대해 미안함을 표시해야 한다. 그가 제적당하고 감방에 갈 때 박 의원은 영부인 역할을 맡아 아버지를 보좌하지 않았던가. 박원순 변호사는 당시 고초를 겪은 뒤 이를 악물고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변호사도 하고, 시민운동가로서 성공도 하고, 지금은 서울시장 후보까지 되었지만 당시 '오둘둘 사건'을 비롯해 박정희 정권 때 핍박을 받은 대학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좌절한 사람도 꽤 될 것이다.

박 의원은 정치를 하면서 이들에 대해서도 미안한 마음을 항상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지금 당장 나 후보 진영에서 박원순 후보에게 벌였던 서울대 법대 관련 네거티브 공세에 대해서도 '지원총사령관'으로서 사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0월26일 한나라당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박근혜 의원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마디다. "죄송합니다." 이는 나경원 후보에게도 해당한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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