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는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 예기치 못한 사태의 진전은 2001년 말 북한 측의 제안에서 비롯된, 오랜 비밀교섭의 결과였다.
북한지도자 김정일의 전폭적 신임을 받고 있는 '미스터 X'라는 인물이 일본 외무성 아시아태평양국장인 다나카 히토시에게 수교교섭을 제안했다. 다나카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직보했고, 곧 비밀접촉이 시작됐다. 당시 이 비밀교섭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총리와 외무장관, 그리고 다른 3명의 고위관리뿐이었다. 납치문제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던 아베 신조 관방차관은 2002년 8월 양국 외무부 담당 국장의 평양회동 때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8월 말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이 발표됐다.
일본 및 북한 지도자의 9월 회동은 긴장됐고 극적이었다. 회담은 오후 한나절 계속됐다. 보도에 따르면 고이즈미는 자신이 먹을 도시락을 직접 준비해 갔지만 그날 저녁 도쿄에 돌아올 때까지 이를 열지 않았다. 두 지도자는 '조속한 관계정상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고이즈미는 식민지 시절 한반도 주민들에게 입힌 '엄청난 피해와 고통'에 대해 '깊은 유감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표명했으며 김정일은 일본인 13명을 납치하고 일본 영해에 간첩선을 침범시킨 데 대해 사과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김정일은 1977년부터 1982년 사이 일본의 외딴 해변에서 여학생, 미용사, 요리사, 데이트 중이던 3쌍의 커플 등 일단의 일본 시민들을 납치한 사실을 인정했고, 또 사과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북한 요원들은 (1970년 일본 여객기를 공중납치해 평양으로 망명한 일본 적군파 소속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을 여행 중이던 일본 학생 3명을 납치해 평양으로 데려왔다. 북한 첩보요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거나 해외에서 활동할 북한 요원들의 가짜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김정일은 당시 일본인 납치 사실을 자신은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면서 "국가 특수기관의 일부 분자들이" "광신적 믿음에서 또는 공명심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평양 정상회담이 있은 지 3주일 후, 피랍 일본인 13명 중 5명이 특별기편으로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른바 '평양 5인조(1978년 여름 동해상 해변에서 데이트를 즐기다 납치된 2쌍의 부부와 같은 해 여름 사도섬에서 납치된 당시 19세의 간호사)'가 도쿄에 도착한 것은 2002년 10월 15일이었으며 이들은 당초 열흘에서 2주일간 일본에 머물 예정이었다. 북일 정부의 합의에 따르면 이들 5명은 그 후 평양으로 돌아가 그들 자신과 가족들의 영구 귀환 문제를 마무리 지을 예정이었다.
한편 김정일은 일본 영해에 대한 '괴선박'의 침범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평양회담이 있기 바로 1주일 전, 일본이 동중국해에서 '괴선박'을 인양해냈기 때문에 김정일로서는 간첩선 파견을 인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괴선박은 2001년 12월 일본 영해에서 일본 측에 발견돼 도주했으나 총격전 끝에 침몰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북한 특수군이 그같은 일을 저질렀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런 일을 그토록 오랫동안 계속하고 있을 줄은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소. (…) 어쨌거나 특수군은 구시대의 유물이고 나는 이것들을 해체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할 작정이오."
북한 측은 일본 시민에 대한 명백한 인권 침해이자 일본 국가에 대한 명백한 주권 침해인 일본인 납치와 간첩선 파견이 자행된 것은 두 나라간의 비정상적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편 북한 측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 대신 일본 측의 경제 '협력'을 받아들임으로써, 즉 보상 요구를 철회함으로써 일본 측의 사과가 가능해졌다. 양 측은 이런 식의 협력을 통해 상호 이익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집권 자민당의 계산에 따르면 북일 국교정상화는 북한에 대한 상당 규모의 '원조 및 개발' 프로그램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자민당의 핵심 파벌 및 그 측근들에게 아주 수지맞는 사업 기회를 제공할 터였다. 불경기에 허덕이는 일본의 건설회사들이 도로, 교량, 댐, 발전소, 철도 등 북한의 인프라 건설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평양으로서는 식민지배와 전쟁피해에 대한 보상 요구보다는 경제재건의 필요성이 더 화급했다.
당초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 및 북일 관계정상화 노력은 일본 대중들로부터 긍정적인 지지를 받았었다. 북한이 자신의 범죄적 행동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북한의 오랜 숙적인 일본에 대해 그토록 양보를 한 김정일의 유화적 태도는 그가 북일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뚫기 위해 전력투구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은 김정일의 사과를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성의로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를 비난하면서 추가제재를 요구했다. 일본 정부의 사죄는 일본에서 완전히 잊혀졌으며 일본 언론도 완전히 무시했다. 일본의 주류언론과 대다수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35년 식민지배로 한국인들에게 끼친 '해악'은 최근 북한이 일본인에게 끼친 해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북한의 납치인정 뉴스가 잦아들고, 피랍일본인들이 돌아오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충격과 우려와 분노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일본인들의 분노는 나머지 피랍 일본인 8명의 운명에 관한 평양 측의 설명에 의해 더욱 증폭됐다. 대부분의 정보는 믿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북한 측은 한 일본인 부부가 1979년과 1981년 사이에 사망했으며 둘 다 심장이상이 사인이라고 설명했는데 당시 남편의 나이는 24세, 부인의 나이는 27세였다. 게다가 남편은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북한 측은 설명했으나 그 날은 한반도 연안에 태풍이 불던 날이었다. 두 번째 부부는 1986년, 1주일 간격을 두고 한 사람은 간경변으로, 다른 사람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북한 측은 설명했다. 세 번 째 부부는 결함이 있는 연탄난로 때문에 자녀와 함께 일가족이 사망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들 모두의 시신은 1990년대 중반 홍수, 댐 파괴, 산사태 등으로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북한 측 설명이었다.
평양 측은 199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7번째 희생자의 유해가 홍수에 쓸려갔으나 후에 다시 수습돼 한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의 유전자 감식 결과 이 유해는 중년 여인의 것으로 판명됐다. 8번째이자 가장 비극적인 사례는 여학생 요코다 메구미의 경우다. 평양 측의 설명에 따르면 메구미는 북한 남성과 결혼해 '혜공'이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으나 그 딸이 막 5살이 됐을 때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일본인 희생자의 가족들은 분노와 불신에 가득 차 평양측의 설명은 궤변에 지나지 않으며, 피랍자들은 살아 있음이 분명하다면서,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이들을 일본으로 데려오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납치된 일본인의 숫자가 13명이 아니라 40명, 어쩌면 100명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번져갔다.
언론들은 피랍자들을 집중 조명했다. 일본 국민들은 이들의 일본적 국민성이 서서히 '회복'되고 이들이 안도의 눈물과 함께 김정일 배지를 옷깃에서 떼어내 내던지는 모습에 환호했다. 그러나 주류언론들은 식민지 시절 일본이 수십만 한국인을 납치해 일본군을 위한 '종군위안부'로 만들거나 광산, 공장 등에서 강제노역 시킨 사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남북한의 한국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보다 큰 역사적 문맥에서 보자면 일본인 13명의 납치를 세기의 범죄로 둔갑시키고, 일본인을 아시아적 야만성의 궁극적 희생자로 덧칠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납치 문제가 일본 정치의 중심 의제로 떠오르게 된 것은 3개 단체가 벌인 거국적인 운동 때문이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하기 위한 전국모임', '피랍자가족 전국 모임', '일본인 피랍자들을 위한 의원 모임' 등 3개 단체는 모두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에 최대한의 압력을 가해야 하며, 협상이 실패로 끝날 경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피랍자들을 북한에서 구해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한반도 관련 싱크탱크의 대표이자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하기 위한 전국모임'의 창설자인 사토 가츠미는 일본은 김정일체제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기 위한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납치문제가 북한체제의 붕괴를 위한 명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구조단체의 지지자들이 한결같이 지지하고 있는 평양정부의 전복은 피랍자 가족들의 재상봉을 불가능하게 할 만큼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대혼란을 초래할 것이 거의 분명하다.
부분적으로는 이들 세 단체의 압력에 의해 집권 자민당의 의원들은 일본에 일시 귀국한 피랍자 5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고이즈미가 북한 측과 합의한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 술 더 떠 피랍자 자녀들의 일본 송환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나라로 '귀환'시키라고 요구한 것이다. 피랍자 자녀 중 몇 명은 이미 성인이 돼 있었다. 이들 중 5명은 자신의 부모가 일본인이라는, 더구나 납치된 일본인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평양에서 살고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일본에 일시 귀환했던 자신의 부모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있었다.
10월, 유전자 감식 결과 요코다 메구미의 딸이라는 김혜공과 메구미 부모의 생물학적 특징이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 측의 설명이 사실임을 나타낸 것이다. 메구미의 부친 요코다 시게루는 자신이 북한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손녀딸을 만나고 싶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명했지만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하기 위한 전국모임'의 간부들은 그를 설득해 북한방문을 단념토록 했다.
전 국민들의 눈앞에서 피랍자 가족들의 드라마가 펼쳐지면서 주요 방송사와 신문, 잡지들은 일본인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면서 적대감과 공포, 그리고 편견의 거대한 시장을 만들어냈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에서는 북한에 관한 책이 약 600종 출판됐는데 거의 대부분은 북한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의 방북 이후 일본의 TV에는 하루에 3,4개 프로그램을 방영할 정도로 북한관련 뉴스가 차고 넘쳤다. 탈북자, 기아, 부패, 미사일, 핵 위협 등 모두가 북한사회의 악몽과 같은 측면들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나는 역사의 진실을 보았다>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판된 황장엽의 회고록은 일본에서 <김정일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그 속편은 더욱 선정적인 제목을 달았는데, <미친개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였다. 2003년 중반에 출판된, 김정일에 관한 만화는 그를 폭력을 좋아하고, 피에 굶주렸으며, 방탕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 책은 3개월만에 50만 부가 팔렸는데 아마도 이는 한반도에 관한 모든 영문 서적의 판매량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많을 것이다. 북한에 관한 주간지, 월간지 기사들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일본 독자들은 선정적인 내용들이 가미된, 이 궁극적 '악'에 대한 얘기들을 매우 즐기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김정일의 복잡한 가족사, 그의 전처와 애첩들, 그리고 '기쁨조'에 관한 내용이었다.
북한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일본사회를 뒤덮으면서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던 유명 인사들은 곤경에 처했다. 2001-2년 북한과의 협상을 담당한 외무성 관리 다나카 히토시의 집에서 시한폭탄이 발견됐을 때,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즉각 "그에게 올 것이 왔다"고 선언했다. 나중에 그 말의 진의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이시하라는 테러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라면서 그러나 다나카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2002년 10월 말 콸라룸푸르에서 속개된 북일 수교교섭에서 일본은 일본으로 귀환한 피랍자 5명의 자녀들을 무조건 일본에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이들의 귀환 일자가 확정되기 전에는 다른 문제들은 논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은 또한 납치피해에 대한 보상을 북한 측에 요구했다. 위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북한의 입장에 대한) 무관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요구였다. 일본은 언제나 수십만 강제노역자들을 비롯한 식민지 시절 희생자들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의 이같은 요구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사람값이 다르다는 일본의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0명 남짓한 일본인의 삶이 수십만, 아니 수백만 한국인의 삶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메시지였던 셈이다.
한편 북한 측은 일본으로 일시 귀환한 피랍자 5명의 평양 복귀를 요구했다. 북한은 수교교섭 재개에 새로운 조건을 다는 것은 평양선언에 위배된다고 보고 있었다. 관계정상화를 위해 고이즈미와 김정일이 간신히 쌓아올렸던 연약한 신뢰의 기반은 이로써 산산조각이 났다.
일본 정부 내에서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는 아베 신조는 일본이 제시한 조건을 북한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해 북한을 더욱 가난과 절망 속으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2002년 11월, "일본에는 식량도, 석유도 있다. 식량과 석유가 없이는 북한은 겨울을 나지 못할 것이므로 머지않아 북한사회는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기나긴 교착상태가 두 해 동안이나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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