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중영화를 읽는가 - 연재를 시작하며**
대중영화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영화다. 바꾸어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다. 영어로 'popular cinema'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일부만이 좋아하는 영화-흔히 예술영화나 실험영화가 대표주자로 꼽힌다-의 반대편에 놓이는 개념이다.
대중영화는 영화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호흡을 함께 함으로써 생겨난다. 다수 대중관객의 호응이 없으면 대중영화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대중영화 여부를 가늠하는 지표가 대중의 호응이라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객관적 지표는 흥행실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중영화는 흥행영화, 히트영화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흥행을 최우선 목표로 만들어진 상업영화(commercial cinema)가 모두 대중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흥행을 목표를 삼았으나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영화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중영화는 영화연구자나 평론가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왔다. 일반관객들이 영화를 하나의 수단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영화전문가들은 대개 영화를 목적으로, 그 자체로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대개 대중적 인기란 스타나 장르적 관습, 센세이셔널한 소재 등 영화외적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며 영화적으로는 오히려 별 볼 일 없는 것의 소산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대중영화 홀대는 이러한 경향의 산물로 보인다.
필자가 대중영화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대중영화가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사회적'이란 당연히 문화나 예술을 그 속에 포괄하는, 더 큰 카테고리로서 우리의 삶 전반을 아우르는 말이다. 대중영화는 한 시대 한 사회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꿈과 소망, 욕망과 욕구를 읽을 수 있는 최고의 텍스트다. 그런데 대중들의 욕망과 욕구는 영화, 나아가 모든 문화적 표현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징후로서 나타난다. 아도르노가 문화를 상형문자에 비긴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우리가 각 개인이 욕망이나 욕구를 드러내고 추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아마도 신세대담론이 전사회를 휩쓴 90년대 초반 이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근래 한국대중영화는 보통 한국인들의 욕망과 욕구를 가장 도드라지게 정의하고 표현해 왔다. 아직 제대로 계발되지 않은, 제대로 표현을 얻지 못한 우리들의 욕망을 가장 충실히, 그리고 앞장서 드러내 왔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에 맞추어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해 돈과 명성을 얻기 위해서였겠지만).
이 사실은 한국 대중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절대적 지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고 예술적 영화도 아닌, 우리 대중영화는 우리의 일반적 삶을 에둘러 보여주는 흥미있는 텍스트다. 대중영화를 꼼꼼히 분석하면서 왜 그런 영화를 대중들이 사랑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상형문자로 아로새겨진 우리의 욕망과 소망을 해독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우리의 지난 시대를 돌아보고 현재의 삶을 살피는 가장 확실한 길 중의 하나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쉬리>는 왜 반공영화가 아닌가**
우선 개인적 감상부터 얘기해야겠다. <쉬리>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슬픈 영화 중의 하나다. 남한 방첩기관의 엘리트 요원 류중원과 남파 공작원 킬러 이명현 간의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은 보면 볼수록 더 슬퍼진다. 이런 점에서 내게 <쉬리>는 무엇보다도 멜로드라마다. 다만 스파이 스릴러의 세팅에 하드 액션을 가미한 점이 색다르다고 할까.
99년초 어느 날 갑자기 강제규 감독이 <쉬리>를 들고 나왔을 때 전문가들의 평가는 대개 이러한 액션 스릴러의 외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많은 평문들이 이 영화를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아류로 봤고-그래도 한국영화계가 이런 수준의 액션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어색한 인정을 동반하곤 했지만 -더 나아가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반공영화의 혐의를 두기도 했다. 물론 이런 평가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적으로 뭔가 찜찜한 구석을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리>를 액션 스릴러로만 보는 것은 중요한 많은 것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다. 더구나 반공영화 운운하는 것은 한참 잘못 나간 것이다. <쉬리>는 할리우드 베끼기와 북한 때리기의 혐의에서 오는 찜찜함을 훌쩍 넘어서는 장점을 갖고 있다. 남한과 북한의 지향과 욕망을 각각 대변하는 두 남자 류중원과 박무영,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낀 이명현- 이 세 주요인물을 액션과 로맨스, 혁명과 사랑, 서스펜스와 반전으로 종횡무진 엮어나갈 때 <쉬리>는 무엇보다도 오락영화로 다가온다. 그러나 심심풀이 오락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의 조건에 대해 중요한 얘기를 한다. 결과적으로 오락적 요소는 대중들과의 소통을 쉽게 하는 장치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쉬리>가 여느 할리우드 액션스릴러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우리 얘기'라는 점이다.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없었다면 <쉬리>의 스토리는 공감을 자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성 킬러가 적을 사랑하게 된다는 유치찬란한(?) 소재를 한국적 상황에 담아 절절하게 엮어낸 강제규는 한국인의 욕망을 읽어내는 천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쉬리>는 분단시대 한국인의 욕망의 비극성을 잘 드러낸다.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남북분단 상황에서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상관치 않고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가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드러낸다. 사적 욕망이란 정치적, 이념적 제한을 개의치 않는 것이 속성인데 우리의 욕망은 공적 상황에 의해 규제되고 억압받고 있음을 증언한다.
그래서 나는 <쉬리>를 <다이하드>(1988, 존 맥티어넌 감독)에 <현기증>(1957,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을 결합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웅적 액션과 욕망의 비극성을 영화 한 편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이종결합이 가능했던 것은 남북분단이란 한국적 상황 덕분이다.
당연히 나의 <쉬리> 읽기는 이명현에 집중된다. 김윤진이 빼어나게 연기했던 명현은 류중원과 박무영, 남과 북, 사랑과 혁명 사이에 놓인 문제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북한 특수부대 8군단 소속 여전사 이방희는 무시무시한 특수훈련을 거치며 숱한 남자 대원들을 능가하는 살인기계로 다시 태어난다. 남파된 후 남한의 요인들을 한치의 오차 없이 암살하다 남한 수사당국의 눈을 피해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다시 요인 암살이 재개될 즈음 영화는 뜬금없이 류중원의 사생활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우리가 중원의 애인인 명현을 만나는 것은 이 시점에서다. 열대어 가게를 운영하는 명현은 사랑스럽고 마음씨 따뜻한 이상적 애인상이다. 나중에야 우리는 제주도 출신의 순진한 처녀 이명현이 실은 일본으로 건너가 성형수술을 받고 돌아온 이방희임을 알게 된다. 이제 명현의 정체가 분명해진다. 남한 방첩당국(의 핵심요원 류중원)을 무력화하려는 북한 과격파의 계획에 미끼 역할로 던져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살인기계가 적과 사랑에 빠진다. 명현이 중원을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실은 명현이 그러한 사랑을 욕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명현은 분단체제하에서 무시무시한 킬러로 길러졌지만 내면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따뜻한 사랑을 그리워하는 선남선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냉혹한 정치암살의 집행자와 평범한 삶과 사랑에 목말라 하는 처녀라는 무지막지한 정체성의 분열에 고뇌하는 명현은 알콜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방희/명현은 아마도 영화사상 가장 처절한 자기분열을 겪어야 했던 인물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현기증>의 주디/매들린 정도는 돼야 이에 견줄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결국 사랑하는 중원의 총탄에 쓰러진다. 왜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삶을 꿈꾸는, 그녀의 지극히 평범하고도 보편적인 욕망이 국가-이를 정치나 이데올로기, 또는 역사로 바꿔 부를 수도 있겠다-의 이름으로 좌절돼야 하는가.
한국인이 떠안을 수밖에 없는 분단의 무게에 희생되기는 비밀정보요원 류중원도 마찬가지다. 한석규가 연기하는 중원은 영웅이면서도 동시에 사랑스러운 오빠 같은 캐릭터다. 그도 국가적 사명이나 임무와는 별도로 조그만 개인적 행복을 꿈꾸는 인물이다. 자신의 손으로 명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때 그 꿈이 산산조각 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원이 명현이 코앞에서 피투성이가 돼 천천히 쓰러지는 것을 바라보는 클로즈업 장면은 한국영화가 만들어낸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다. 엔딩에서 중원이 실제의 명현을 만나 명현/방희가 남긴 어항을 넘겨주며 짝을 잃은 키싱구라미는 결국 죽고만다는 것을 되새길 때 우리는 중원이 명현을 따라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살하지 않더라도 평생을 상처를 보듬으며 지내게 될 것임을 안다.
<쉬리>에서 또 한 명의 인상적인 인물은 북한 8군단 특공대장 소좌 박무영이다. 최민식의 절절한 연기에 실린 그의 발언은 너무도 정치적이고 상투적이어서 공허한 듯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반만년 오욕의 역사"를 지우고 "조선의 새 역사를 우리가 연다"거나 "썩은 치즈에 콜라, 햄버거를 먹고 자란" 남한 사람들이 북한 인민들의 고통을 알 리가 없다고 일갈하는 박무영은 <다이하드>에 나오는 사이코 테러리스트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슨 대가를 치르든 통일이 궁극적으로 한민족에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아직도 혁명을 통한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점에서 그는 정치적 이상주의자다.
그는 직접적으로는 북한의 과격 모험주의자를 재현하지만 간접적으로는 80년대 전투적 운동권을 암시한다. 류중원과의 대결에서 결국 패퇴하고 통일전쟁을 일으키려는 테러계획이 좌절되는 데에서 드러나듯이 박무영은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액션영화의 규칙에 따라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의 시대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볼 때는 박무영이 고꾸라질 때 우리가 적의 위협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안도감에 박수를 치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박무영의 실패는 정치적 유토피아주의 또는 혁명적 정치학의 사망에 울리는 쓸쓸한 조종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쉬리>는 이전의 치열했던 '운동'에 대한 때늦은 레퀴엠으로 들리기도 한다. 박무영도 결국 타자가 아니라 우리의 일부였던 것이다.
<쉬리>는 아마도 9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대중적으로 구현한 획기적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은 <쉬리>가 전례없는 흥행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적 블록버스터를 뿌리내릴 수 있게 했기 때문이거나 한국영화계에 기술적으로 할리우드를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아픔과 소망을 절절히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중들이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 덧붙이자면 <쉬리>를 <현기증>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특히 두 영화의 여주인공 이명현과 주디의 입장을 중심에 두고 살펴본다면 <쉬리>를 <현기증>의 한국판 리메이크라고 볼 수도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현기증>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중의 하나다. 안 보신 분은 찾아보시길.
***필자 소개**
1957년 청주 生
서울대 철학과 졸업
MBC TV프로듀서, 중앙일보 기자 역임.
1996년 도미 유학.
2005년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영화학 박사 취득.
***저술**
공저-Korean Film: History, Resistance, and Democratic Imagination(2003, Praeger) 민응준, 주진숙과 공저
편저-컬트영화, 그 미학과 이데올로기 (1995. 한나래)
공역-대중영화의 이해 (1994. 한나래), 히치콕과의 대화 (1994. 한나래)
박사논문-Mass Culture in the Age of the Public/Private Split: In South Korean Popular Cinema Since 1992 (2005. USC)
***일반논문**
한국영화에서의 근대화 담론-<서편제>와 <축제>를 읽는 한 시각 (1998)
왜 폭력인가 -90년대 깡패영화의 의미분석 (1999)
<강원도의 힘> 또는 해체적 리얼리즘의 힘 (2000)
In Defense of Continuity: Discourses on Tradition and the Mother in <Festival> (2002) Discourse on Modernization in 1990s Korean Cinema (2003)
Sopyonje (2004)
***관심사**
대중문화와 사회 간의 관계
한국대중영화
대중문화의 내러티브 및 재현양식
근대성과 개인화, 주체형성과정
히치콕 영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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