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시간을 거슬러 1992년으로 돌아가 보자. 이 해는 역사책에 3당합당 덕으로 김영삼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해로, 그래서 군사정부가 물러나고 이름이나마 '문민시대'가 열린 해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변화는 이러한 표면적인, 정치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 의식의 심층에서도 변화의 격랑이 감지되고 있었다. 무더웠던 이 해 여름 한국 대중문화사에 획을 긋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서태지와 아이들'의 충격적인 데뷔였고 그 다른 하나는 새로운 영화 <결혼 이야기>의 개봉이었다.
서태지의 출현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에는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니 군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 이야기>를 그 반열에 놓는 것에는 의아해 할 이들이 적잖을 듯하다. 서태지가 흔히 '신세대'란 말이 따라붙는 새시대의 최상의 심벌로 떠오르며 그 뒤 한국가요사, 나아가 대중문화의 지형 자체를 바꾸어놓았다면, <결혼 이야기>가 성취한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결혼 이야기>는 밋밋한 제목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매우 '발칙한' 영화였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발칙함은 우리 대중문화가 이전에는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서편제>가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다시 쓴 것이 1993년임을 기억한다면 <결혼 이야기>의 참신함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이 언급이 <서편제>가 진부하다는 말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혼 이야기>가 어떻게 새롭고 어떻게 발칙한지를 따져보면 이 영화가 90년대 전반 어떻게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사적으로는 9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던 (한국식) 로맨틱 코미디의 효시이기도 했던 <결혼 이야기>는 신세대 신혼부부 얘기다. 신혼의 달콤함도 잠시, 남녀 주인공은 갈등과 대립을 겪게 되고 별거를 택하지만 결국엔 재결합한다는 해피엔딩 스토리다.
정작 이 영화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초반 태규(최민수 분)와 지혜(심혜진 분)의 신혼여행과 신접살림을 보여주는 전반부에 이미 다 드러나 있다. 우선 태규와 지혜 모두 매우 솔직하게 욕망을 표현한다. 특히 성에 대한 긍정적, 개방적 태도는 한 비평가가 '말로 하는 섹스'라고 했을 정도로 전례 없이 노골적이다. 신혼여행 첫날밤 고백 장면을 보자. 신랑은 이제까지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심각한 투'로 고백한다. 그러고는 신부의 양다리를 벌리려 달려들고 이들은 깔깔거리며 이내 침대 위를 뒹군다. 이밖에도 태규가 입만 있으면 된다며 오럴 섹스를 요구할 때 지혜가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답하는 장면 등 "어- 요것 봐라"라는 탄사를 낳기에 충분한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적어도 9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보면.
또 하나 두 주인공 모두 자기주장이 뚜렷하다.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하고 주장할 것은 주장하는 주체적 개인으로 그려진다. 이들에게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는 신성한 결합이 아니라 자유의사에 기반한 계약동거처럼 보인다. 특히 신부 지혜는 남편에 자신의 삶을 거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자기실현을 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지혜가 가정보다는 자신의 직장을 앞세우는 데서 두사람 간의 동상이몽이 드러나고 갈등이 본격화한다.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태규와 지혜는 다를 바 없다. 태규가 성적 욕망의 표현에 좀 더 적극적이라면 지혜는 자기주장에서 좀 더 두드러진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두 요소는 남녀 간의 차이와 대립을 주조로 공감과 웃음을 이끌어내는, 성대립 구조에 기반을 둔 기존 로맨틱 코미디(할리우드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라)와 <결혼 이야기>가 차이를 빚는 지점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영화가 리사이클하는 남녀대결 구도가 아니라 그 이전 한국영화와의 차별성이다.
한 예로 이 영화가 대형화면 위에서 천연덕스럽게 보여주는 성의식은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영화의 성의식은 뭔가 은밀하고도 병적인 냄새를 풍겼었다. 이 점에서 <애마부인>류의 현대 성애영화나 <산딸기>류의 토속 에로영화, <매춘>과 같은 관음주의적 창녀영화나 다를 바 없었다. 이에 비기면 <결혼 이야기>의 성은 너무도 개방적이고 건강하고 자연스럽다. 성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결혼 이야기>는 부부 간에 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에 무슨 금기가 있겠느냐며 성을 공적인 담론의 장으로 끌어낸다. 그럼으로써 <결혼 이야기>는 이미 구시대는 뒷전으로 아스라히 사라져간 가운데 얄미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신세대가 전면에 나선, 이전의 칙칙한 영화들과 대결하는 새로운 영화로 읽힌다.
이런 맥락에서 <결혼 이야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사회-역사-정치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 또는 그러한 흔적을 철저히 지운다는 점이다. 여피 주인공들이 사는 아파트나 일하는 직장, 그들이 나누는 얘기 어디에서도 결핍과 억압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모든 결핍과 억압은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인 것임을 감안하면 영화적 시공간에 사회적인 것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두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는 문화적 세련미와 모더니티를 전시하고 있고 승용차는 현대적 이동성을 표상한다. 일터는 다름 아닌 방송국--신세대의 꿈의 직장이다. 함께 사는 삶의 불가피한 스트레스도 보이지 않는다. 가족이나 이웃이 주인공들의 삶에 간섭하는 일도 없고, 직장에선 한담을 나누며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를 고민한다. 사회적, 역사적 요소의 제거는 요즘 대중영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결혼 이야기> 이전의 영화에서는 매우 드문 것이었다.
<결혼 이야기>는 최초로 신세대 감성을 전면적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스타일에서뿐만 아니라 테마에서도 그렇다. 전설에 따르면 신세대 감성/담론은 강남 오렌지족으로부터 발원해 당시 허리케인 카트리나급으로 급속히 세력을 불려 한국사회를 휩쓸면서 나이든 축을 "혹시 내가 '쉰 세대'로 몰리는 게 아닐까"하고 노심초사하게 했던 '괴질'이 아니었던가.
신세대란 개념을 독점해 온 스무살 언저리의 나이 어린 청춘이 아니라 30세 전후의 '한물 간' 직장인 신혼부부가 주인공으로 나서 신세대적 감성과 행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결혼 이야기>는 이미 신세대 감성의 압도적 승리를 예기하고 미리 축하하는 영화랄 수도 있지 않을까. 92년 시점에서 이미 신세대가 판을 치는 새 세상이 도래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영화가 신세대 편을 드는 일부의 영화에 그치지 않고 대중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세대 감성이 단지 젊은 세대의 감성에 머물지 않고 급속히 우리 모두의 감성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구세대 대립의 외양을 띠었음에도 신세대 담론은 시대적 변화를 배경으로 시대의 순리가 돼버린 것이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이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이전의 우리의 삶이 가족, 사회, 국가와 민족을 의식하며 의무와 당위를 앞세우며 개인적 욕망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면 이에 반기를 들고 '나'를 삶의 중심에 놓겠다는 신세대 담론에 누가 감히 저항할 수 있겠는가.
<결혼 이야기>가 주는 쾌감은 우리의 욕망을 옭아맸던 동아줄이 활활 풀어헤쳐진 새 세상을 그리는 데서 온다. 그 해 한국영화 흥행실적 1위라는 훈장은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공감을 표했다는 얘기다. <결혼 이야기>는 영화라는 문화의 한 텃밭에서 새 시대를 열어젖혔고 우리는 기꺼이 동참했다. 이렇게 해서 <결혼 이야기>라는 한편의 대중영화는 90년대 초 정치의 시대의 조락과 문화의 시대의 도래, 궁극적으로는 개인적 욕망의 해방의 시대를 가리키는 이정표로 자리잡게 됐다.
* 덧붙이자면 로맨틱 코미디가 성의 공론화에 매달린 이유를 생각해보자. <결혼 이야기>를 필두로 <그 여자 그 남자> <마누라 죽이기> <닥터 봉>에 이르는 숱한 로맨틱 코미디가 성을 앞세우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센세이셔널리즘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건지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것이다. 성이란 것이 개인적 욕망의 억압과 해방의 길목에서 우리 의식의 변화를 투영할 수 있는 알맞은 접점이 아니었을까. 물론 다수의 관심을 유발해 공론화의 효과도 거두면서 흥행에도 플러스로 작용하는, 일석이조의 수단이기도 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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